브레인스토밍 – 건축에 대한 태도

모더니즘의 논리는 미학에서 정치성을 담고 있었다. 이는 곧 근대성이었고, 건축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대적 사명을 말하며 이는 전쟁을 전후로 가속화가 되었고, 건축은 전위병(아방가르드)의 대표자였다.

그렇게 팍스 아메리카나 시기를 넘어 1970년 오일 쇼크가 일어나고, 건축계는 많은 변화가 불어왔다. 1960년대에는 일본에서 유기체적 건축 운동인 메타볼리즘이 일어났고,

오일 쇼크 이후 건축계의 흐름은 에너지 안보의 국제 정세와 동시다발적으로 에너지 관리 측면으로 진행되었다.

녹색 건축이란 무엇인가? 최근 건물 녹화를 통한 ‘친환경적’ 건축물이 상당히 선보이고 있다. 무미건조할 콘크리트에 무성한 녹음과 푸르른 하늘 그 머니샷은 이름 그대로 가치가 있었다. 싱가포르는 그에 맞는 적합한 대지였고, 그렇게 친환경적 건축 중 패시브 디자인은 그쪽에서 활발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사막에서 자본과 기술의 집중을 통한 액티브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 친환경적 건축은 중동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성을 볼 수 있고, 모더니티의 재림을 알 수가 있다. 이미지메이킹과 그 소비로 이루어지는 팝 아트의 대량생산 시대. 이는 기술의 발전과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그 경계는 모호해지고, 건축 또한 데이터화가 되어 이제는 모작이라는 미명또한 사라진다. 우리의 방향성은 결국 친환경적 건축이란 데이터화가 되어서 상시 제어가 가능한, 조절 가능한 건축. 이는 유기체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메타볼리즘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탈 이데올로기라는 사상의 흐름에서 이제는 기계에 의한 재조합이 진행되지만, 이는 결코 과거로의 회기가 아닌, 사람의 인식론적 확장이 이루어져 곧 기계-사람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객관화가 더 진행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더 종속되어지고 있다. 기술 관료의 등장인 것이다. 권력 분배는 이미 필연적인 불평등의 실체화를 가져왔고, 이는 자본의 논리로, 기술의 편리성 논리로 귀결되었다. 우리는 성공을 부르짖다가 끝난다는 것을 안 청년 세대는 부르짖지 않고, 기술의 편안한 요람 속에서 가치를 찾는, 니체의 허무주의적 흐름에 올라탄 듯 싶다. 전쟁은 러시아가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똑같은 반성을 하고 있고, 그렇다.

그렇게 건축은 이제 건축과 환경, 공간이라는 이분법적 ‘인간의’논리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닌, 블랙박스화가 진행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그 기계들을 잘 활용하는, 관계성을 잘 짓는 역할을 하면 되는 위치에 왔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더러, 결국 언어의 숲으로 들어간다. 결국 모든 것은 방향성을 담지하고, 그 태도는 결국 나의 권력욕에 기인한다. 정치성을 띠고 설득을 함으로써 대중을 동요시킨다면, 나의 말은 논리가 되고 이론이 된다, 그렇게 건축계는 여전히 이론을 중시하게 되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 그에 반해 건축 디자인이 아닌 건설 논리로 들어가면, 그 누구도 이론으로 정립하고 싶지 않아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잡는 시대적 사명은 그렇게 친환경적이라는 주제로 이끌어진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말하고 싶다. 디자인은 결코 기계적 논리로 대표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기계적 논리에 의미를 더한 것이 디자인이지, 기계적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이는 디자인이 아닌 설계다. 나는 지금 나의 디자인이 아닌 우리의 디자인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기계적 논리만을 대입해 정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건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렇게 발전해왔다. 애초부터 자연과는 대립적인 구도라고 말을 하지만, 이는 자연과 도시의 공생을 통한 컴팩트 시티의 실현화와 세계화를 통해 아니라고 알게 되었고, 우리는 자연을 동시에 그리워하면서 결국 건축과 도시는 인간이 편리하게 관찰과 분석을 하기 위한 스케일적 도구로 정의된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기하학이 왜 건축에 자주 도입이 되는가? 이는 친환경적이기 때문이다. 비용 절감이라는 면은 당연한 친환경의 핵심 변수이다. 파라메트릭 디자인을 실제로 시공한다고 해서, 이는 정말로 친환경적일까? 아니다. 친환경적처럼 보이는, 말 그대로 자연과도 같은, 결국 중국의 원림 문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landscape 건축은 그렇게 자본의 집약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진정한 친환경 건축은 설비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이것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디자인으로 나오는, 곧 패시브 디자인으로 추출된 것이 나는 맞다고 본다.

친환경적 건축물 설계를 위해 사람보다 앞서 생각해 건축물의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곧 디자인이 아니고, 사람을 앞서 생각하되 설비 측면, 액티브에서 친환경적 설계를 과정에서 보여주고 동시에 이를 수려한 디자인으로 보여준다는 것. 이 방향이 나에게는 맞는 것 같다.

대형 건축물이 친환경적일까? 시스템이 잘 구축이 되어 있다면, 기반이 잘 되어 있다면, 나는 소규모의 분산형 시스템의 건축물들 군집 또한 충분히 친환경적일뿐더러 휴먼스케일에 맞는 접합부인 것 같다. 박스의 무수한 분절. 즉 칸토어 집합, 프랙탈의 포스트 모너니즘 건축의 양상을 띠던 그 스케일만 다르던 모듈화된 건축물의 필연적 한계는 ‘인공지능’건축을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나는 보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한계는 동시에 대지에 대한 해석이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거하는 사람들이 의미를 얼마나 생성을 할 지가 관건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인공지능 등장 이전에도 똑같은 한계였다는 점에서, 결국 건축은 곧 의미부여를 얼마나 하느냐에 달려 있고, 건축가는 그 건강한 의미부여의 끝임없는 지속가능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정치성이 다분한, 입-이 필요한 분야인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라졌다. 형이상학적 건축 이론을 들먹이지도 못한다. 기술과 접목한 건축가가 곧 말을 하지 않아도, 데이터에 대한 적절한 표현과 관계맺음을 통해 더 큰 파급력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건축은 이미 데이터를 아주 ~ 잘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BIM의 등장으로 이는 더 가속화되었고, 건축은 곧 순수한 컨셉만 잡아도 되는, 조형 논리까지 안 가져와도 되는 것 같아졌다.

하지만, 조형 논리는 필연적으로 작동한다. 대중들에게 쾌한 매스감을 선사해주기 위해서는, 결국 디자인적 논리를 가져와야 하는데, 이제는 우리는 과학기술에서 이를 가져와야 한다. 공학적인 지식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는 지금까지의 거장들에게 다 해당되는 속성이었다. 논리를 기술에서 끌고 오는 것. 이는 디테일로도 구현이 된다. 기술이 아닌 미학에서 끌고 오면 이는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시적 스케일로의 확장은 불가능해진다. 건축이 아닌 것이다.

학생인 나는 그래서 어떤 학습 태도를 가지고 어떤 것을 학습해야 하는가?

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쉽다.

건설에서 건축으로. -건축공학 구조 관련 실무

건축에서 표현으로. – 그래픽 툴, 설계 툴, 디자인 툴, 도구

표현에서 설득으로. – 커뮤니케이션 스킬, 인문학적 감각.

설득에서 건설로. – 경제적 논리, 실무.


학생때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까?

당장 건축공학 / 구조 관련 개념 익히기 -> 용어 암기 -> 설득.

건축에서 표현 – 그래픽 툴, 설계 툴, 디자인 툴, 도구 암기

표현에서 설득으로 – 인문학적 감각 . 독서. 독서 .독서. /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

그렇게 태도로 마무리가 되었고, 거창하게 우리 건축은 여기로 가야 한다는 선언은 나의 피상적이고 얕은 지식을 알기에 조용히 있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논리로 엮어서 정립했다고, 쾌함을 남겼다고 나는 인지하고 있어서, 이는 건축적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설계를 하는 것은. 건축적 쾌함을 궁극적으로 최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게시자: Phronesis.ysb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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