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2020)
(과제였습니다..)
주거 공간은 집과 항상 같을 수 없다. 집이 있어도 주거를 못 하며, 집이 없어도 주거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집이 없고 주거도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영화는 시작이 되고, 영화의 흐름은 이렇게 유랑족(Nomads)의 삶 보다도, 그 경계부에 위치한 어느 한 남편을 잃고 고향을 잃은, 배경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한 여성을 조명하며 의미를 넓고 깊게 담아간다.
그녀의 삶은 영화에서 단순히 자유로운 개성으로 치부되지 않고, 삶의 의미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끊임없는 연대를 그려 나간다. 이는 우리 관객에게도 묵직하게 전달이 되며, 이는 현 대도시에서도 확장적 비유의 대상이 될 이들 또한 조명이 된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밴을 타고 죽음을 보며 달리는 그녀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원룸에서 월세를 지불하고 오늘만 보며 달리는 청년들, 그리고 죽음을 보며 가는 노인들의 생활하고 무엇이 다른가? 다른 것은 결국 미국의 광활한 대지와 한국의 좁디좁은 대지라는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다. 주거 공간을 계획하는 건축가는 사람의 삶을 구축한다는 점에 있어서 ‘주거 공간’이라는 물리적 환경만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사람의 인생이 다채롭다는 것을 분위기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던 이들 또한 건축가는 포착하고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고독, 실존적 불안을 다채롭게 느끼게 한 이 영화를 나는 그녀의 밴과 그녀의 주변 환경을 통해 충분히 주거 공간에 대한 감수성을 기를 수 있다 생각한다.
영화의 초반부에 주인공이 자신의 지인에게 자신의 밴(애칭이 Vanguard, 선구자이다.)을 공간적으로 활용한 것을 자랑하며, 동시에 소중한 물건들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물건과 공간들이 있는 공간은, 사실상 집의 구성 요소하고도 같다. 최근 SUV가 집안의 새로운 ‘방’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녀에게 밴은 집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물질적으로 부족하지만 역설적으로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울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를 물질주의적으로 끌고 간다. 그녀는 결국 지인의 추천으로 유랑자들과 합류를 하게 되고, 이는 마을의 형성과 같이 그녀는 공동체 속에서 잠시 주거의 질의 핵심 요소인 편안함을 느끼나 싶으나, 이 문장의 늘어짐처럼 그녀는 이 공동체는 묵묵히 서 있는 돌들로 이루어져 있는 대지와는 달리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동시에 안정을 찾고자 하는 욕구는 커져만 간다. 그 욕구는 욕망으로 결핍을 내재하게 된다. 곳곳에서 가져온 돌맹이들, 그리고 공사 현장의 돌무더기들, 자신의 문신에 대한 의미를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 그렇게 주인공은 주거와 집을 갈망한 것보다도, 결국 사람을 갈망한 것이었다. 그 대상은 하늘로 간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람은 갔지만, 언젠가는 만난다는 조언을 듣고, 그녀는 물질을 목적으로 한 밴의 움직임이 아닌, 진정 자신의 끝을 만들기 위해 밴을 움직인다. 파도가 유난히 치는 세찬 바위 위에서, 그녀는 계몽을 한 듯이 서 있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된다. 사라져버린 그녀의 마을 엠파이어, 그리고 비어버린 그녀의 과거 집.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집이라고 인정한 밴의 짐들을 처분하고, 대지 위를 어디론가 향하듯 걸으며 영화는 끝남과 동시에 진정 시작한다. 그녀는 정신적 성숙으로써, 전위(前衛)로써가 아닌, 측위(側衛)로서 존재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은 있다. 치매 어머니는 아들을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고, 아들은 소리 없이 오열하는 한 장면을 상상해 보라. 기억에 대한 소중함은 그렇게 증폭되고, 그 기억은 결국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은 공간을 장소로 만들고, 주거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자신을 유일하게 위로해 줄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의 입장으로 보면, 위로가 아닌, 그 이상을 실현시키는 공간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정주의 의미가 환기되는 물건들이 영화에서 계속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건들이 진정 주거의 성격을 띠는 경우는 결국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이다. 물건을 무료로 공유하는 것도, 사실은 그 기능보다도, 의미로써 지속하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그 물건의 기능으로 대화하지 않았다. 누가 준 것이고, 누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결국, 주거라는 것도 의미로 지속하는 것이다. 기능은 부차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기존의 사람과 시간, 공간에 대한 소중함을 상기하게 한다. 건축가는 그 소중하던 기억의 저장고에서 분위기를 추출해야 하는 것이다.
영화의 대부분은 외부 공간에서 전개가 된다. 그래서, 자연과의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많이 보이는데, 특히 청각적인 것에 집중을 해 보면, 다양한 물질들과의 마찰 소리, 빈도, 크기는 곧 우리의 공간적 지각에서 깊이 있는 울림을 이끌어낸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가사 있는 노래 보다도, 배경으로 깔리는 노래는 공간감을 더 느끼게 하며, 우리의 외로움이라는 필연적인 아픔을 느끼게 하면서 극적으로 쾌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디자인은 볼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솔직한 디자인들이다. 이는 순수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손을 통해, 그 어떤 것들보다 의미 깊은 디자인들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소통의 매개로 등장하는 당장 방황하는 청년이 준 라이터에서, 의자 하나, 블랙 커피까지, 선택적으로 반응해도 되는 대 자연이라는 배경 속에서는 인간과 관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녀의 주거지는 대지 그 자체였다. 그래서, 공간구성 특징은, 그녀가 말하는 광활한 사막 뒤 산맥 위로 떠오르고 지는 태양과, 끝임없이 치는 파도, 그리고 세차게 부는 해풍, 날카로운 선인장, 쓰러져 버린 거목, 돌들이 쌓여 파도치듯 형성된 지형 등인 것이다. 여기서 공간이란 공간의 개념에 집중하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러면, 당신은 아직도 밴 안에 있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그녀는 심적 고향인 엠파이어로 다시 가고, 그녀의 과거 사무실을 가고, 그녀와 남편의 과거 집에 ‘도착’하며 다시 움직이지만, 이번에는 밴의 이동이 아닌, 자신의 이동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는 점에서, 결국 그녀의 주거공간은 엠파이어를 중심으로 인지적 확장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주거 동선은 미국이라는 대지 위에서 돌고 도는 것이었으며, 결국 거실로 다시 온 것이다. 그녀의 주거와 집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는 항상 존재했지만, 그녀가 의미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변.
건축 이론의 정립은 언어로 구축되듯이 이루어져 왔고, 이는 곧 해체, 사건이라는 모순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건축은 사람을 필연적으로 포괄한다. 이론은 사람을 배제하려고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건축 이론의 정립에 대한 강박보다는, 건축과 사람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영화감독과도 같은 자세를 봐야 한다고 본다. 추상적인 태도처럼 들리겠지만, 이는 건축가가 될 나에게 실천의 필연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태도적인 정치성에서만 담론을 결론짓기로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 영화는 나에게 아픔으로 아픔을 위로해 주었고, 과제로서 영화를 건축적으로 분석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깊이 있게 영화를 관람했던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무조건 두 번 이상 봐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한 번은 그냥. 두 번째는 곱씹어가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나중에라도, 한 번 더 보면서, 경계부에 있는 주인공의 입장에 바라보는 세계를 더 다채롭게 경험하고 싶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