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역사학


표제/저자사항폭력의 역사학 / 최성철 지음
 최성철[1964-]

발행사항서울 : 서강대학교출판부, 2019
 

형태사항xii, 308 p. ; 24 cm

총서사항(서강학술총서 ; 122)

주기사항참고문헌(p. 269-291)과 색인수록
SK SUPEX 기금의 후원으로 제작됨

표준번호/부호ISBN 9788972731399 (세트)
ISBN 9788972733614 94300: ₩26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334.23 듀이십진분류법-> 303.6

주제명폭력[暴力]    역사학[歷史學]

Vii

폭력은 그 본질상 특정 유형이나 범주로 묶어서 관찰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은 ‘인간 또는 삶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 인간들의 삶을 연구하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역사가가 폭력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움과 당연함을 넘어 당위성 또는 필연성마저 느껴진다. 즉 ‘연구할 수 있다’가 아니라 ‘연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Ix

사회학, 정치학, 철학 등에서의 폭력 담론은 꽤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지만, 역사학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폭력 현상에 대한 이론적, 개념적, 철학적 검토가 연구 풍토를 주도하는 상황에서 개별 사건들을 천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역사학자들이 굳이 이 주제 전체를 아우르는 별도의 연구를 시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 현상의 유형화 또는 범주화 작업도 역시 굳이 역사학에서 시도해야 할 필연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역사학이야말로 폭력 문제를 가장 심도 있게 잘 다룰 수 있고 또 다루어야 할 학문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개별 사례를 실증적으로 잘 알 수 있거나 활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좀만 더 성찰해 나간다면 역사적 폭력의 이론화 작업도 무난히 해낼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역사학이기 때문이다.

제1장

서론: 역사와 폭력, 폭력의 개념

3.

폭력과 폭력 사이의 잠깐의 비폭력 상태를 우리는 안락한 상태, 평화의 상태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만일 ‘행복’을 ‘고통의 부재’로 정의한 쇼펜하우어를 패러디하자면, ‘평화’란 전쟁이 잠시 없는 상태 또는 ‘폭력의 부재’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전쟁이나 폭력행위가 촉발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4

‘정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의 역사는 한결같이 정통에서 벗어났거나 벗어났다고 간주되는 모든 분야와 그 분야에 속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소외시켜왔다는 측면에서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다. ‘정통’이란 이른바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장치이자 포장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 권위와 명예, 그리고 기득권을 지켜나가기 위해 그로부터 벗어난 모든 이단, 이교, 반란 세력 등에게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허울을 씌워 폭력을 행사해왔다.

5.

아렌트가 1970년에 폭력을 주제로 이미 고전이 된 짤막한 책을 내면서 서론부에서 한 말은 우리가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역사와 정치에 관하여 사유하는 사람은 누구든 폭력이 인간사에서 항상 수행하는 거대한 역할을 깨닫지 않을 수 없으며, 그래서 폭력이 특별한 고찰을 위해 아주 드물게 선정된다는 사실을 일별하고 오히려 놀랄 것이다. (각주: 물론, 전쟁과 전쟁 행위에 대한 수많은 문헌이 존재하지만, 폭력의 도구만을 다룰 뿐, 폭력 그 자체는 다루고 있지 않다.)(사회과학 백과사전의 최신판에서 폭력은 표제어 항목에 기재조차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폭력과 그 임의성이 어느 정도로 당연시되고 따라서 무시되어왔는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모두에게 명백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만을 보았던 사람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우연적이므로 중요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거나 신은 영원히 강자들과 함께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폭력이나 역사에 대하여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과거의 기록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폭력을 주변적인 현상으로 보는 데 거의 얽매여 있었다.”

7.

미국의 한 평화학자(Michael N. Nagler)가 현대는 폭력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니라 최초로 폭력을 문제로 인식한 시대라고 지적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시대를 진정으로 특징짓는 요소는 과거에도 얼마든지 있었던 폭력이 넘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류가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폭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도전에 직면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8.

그렇다면 역사가들은 그동안 왜 폭력 문제를 종합적으로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거나 못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1. 너무 익숙해서
  2. 철학이나 이론을 되도록 멀리하려는 역사가들의 본능적인 또는 전형적인 태도
  3. 마땅한 연구방법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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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본래 ‘능력’, ‘강력’, ‘강제’를 뜻하는 용어였다. 두 번째 뜻으로는 ‘지배’와 ‘통치’로, 하느님의 구너능이 작용하는 또는 입법적 권한을 갖는 폭력이 그것이다. 가령 루터는 모든 폭력이 원래 “신적인 질서”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신학적 차원에서의 개념 정의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폭력은 ‘권력’을 의미했다. 국제법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그로티우스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폭력은 합법적이며 자연스러운 인간의 자연법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이는 “어떻게 폭력 없이 폭력에 대항할 수 있딴 말인가?”라고 일갈했던 키케로의 ‘폭력의 자율성’ 원리에 합당한 사유다.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이러한 전통은 19세기 부르주아지에 맞서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옹호했던 소렐Georges Sorrel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긍정적인 유사 개념들은 폭력으로부터 분리되어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폭력은 이후 오늘날 거의 ‘침해적, 파괴적 행위’라는 부정적 의미만을 갖는 용어로 전락했다. 폭력이 본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술어였다는 증거는 가령 ‘삼권분립’을 뜻하는 독일어 ‘Gewaltenteilung’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1.

그렇다면 폭력의 어원적 기원이 아닌, 고고인류학적, 인간학적, 심리학적 기원과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곧 ‘폭력의 개념적 본질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이에 대한 고찰은 그동안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져왔다. 여기서는 특히 사회를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 희생제에 대한 프랑스 종교이론가들의 해석이 주목된다. 먼저 카유아Roger Caillois는 희생제에 사용되는 희생양은 사회적 회춘과 갱신의 기능을 하는 축제의 중요 요소로서 축제 때 발생하는 폭력은 고도로 제의화된다. 희생제는 숭고한 잔여폭력이자 제한된 광란이다. 이 희생제의 제한된 폭력은 그 해의 남은 기간 동안 사회를 평화롭게 만든다. 축제 기간에 흘린 피로 인해 다른 시기에는 유혈이 사라진다. 제의적 광란 중에 행한 폭력은 그로 인해 평상시 폭력이 사라지기에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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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지라르Rene Girard이다. 그는 폭력이 인간이 이상적인 것을 받아들이려는 타인의 모방 욕망 또는 타인과의 경쟁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인류 역사는 다른 사람을 질시하고 경쟁우위를 점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원초적 폭력으로부터, 점차 갈등을 회피하고 공동체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단계로 넘어감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극복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원초적 폭력과 구별되어야 하기에 ‘성스러운 것’으로 명명되고 간주되어왔다는 것이 지라르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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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위키피디아 영어판)에서 제시하는 고전적인 분류로는, (1)자신을 향한 폭력, (2)개인 간의 폭력 (3)집단 폭력 등 세 종류의 폭력이 있다.

루터는 신학적 차원에 근거해 (1)세속적 폭력(칼), (2) 종교적 폭력(말)로 구분했고,

그로티우스는 (1) 자신의 자유와 자연법에 근거한 ‘긍정적 폭력’, (2) 타인의 권리를 공격하는 ‘부정적 폭력’, (3) 타인의 폭력을 방어하는 ‘합법적 폭력’ 등 세 가지로 나누었다.

이보다 더 독특한 분류는 벤야민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폭력을 (1) 신화적 폭력과 (2) 신적 폭력으로 나눈다. 전자가 국가의 폭력처럼 법 제정적이고 경계를 설정하며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키는 위협적인, 피를 흘리게 하는 폭력이라면, 후자는 법 파괴적이고 경계가 없으며 죄를 면해주고 내리치는,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오는 폭력이다.

오늘날 가장 널리 통용되는 (1) 개인적 폭력, (2) 구조적 폭력, (3) 문화적 폭력으로의 분류는 온전히 노르웨이의 평화연구자 갈퉁에 기인한다. …구조적 폭력은 불평등한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오는 폭력을 말한다. 문화적 폭력은 언어, 예술, 종교, 이념, 도덕 등 상징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을 뜻한다.

그 밖에 최근에는 지젝이 폭력을 (1)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 (2) 간접적인 객관적 폭력으로 나누었는데, 객관적 폭력은 다시 언어를 통해서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3) 정치와 경제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로서의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에서 역사상 전개된 폭력들을 삶의 각 영역으로 나누어 (1) 정치외교적 폭력, (2) 사회경제적 폭력, (3) 문화예술적 폭력, (4) 종교이념적 폭력 등 네 가지로 분류해 고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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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미지의 세계인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밝히고자 하는 시도가 현재의 입장에서는 멋진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과거 그 자체에는 엄청난 폐해를 줄 수 있기에 역사연구가 ‘역사에 폭력 가하기’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폭력을 역사학의 학문적 주제로 다루는 이 작업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이 든다고 해서 이러한 작업을 방기하면 과거에 이런저런 이유로 또는 심지어 아무런 이유 없이 폭력을 당한 수많은 피해자와 희생자들의 영혼은 누가 위로해줄 것인가? 물론 역사가의 임무가 과거에 억압당해온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는 적어도 역사가에게는 과거에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왜 그런 폭력을 당했는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밝혀주고 해명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와 폭력의 관계를 밝히고, 역사상 폭력이 어떻게 전개되어왔으며, 그런 폭력들을 어떻게 유형화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고 연구하는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고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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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사회경제적 폭력 : 계급과 자본 그리고 빈부격차

사회적 폭력이란 ‘구조적 폭력’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사회계급간의 갈등, 경쟁, 억압, 차별 등을 통칭한다. 대체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갈등이 문제가 되며(갈등사회학), 이는 언제나 경제체제 또는 정치체제 등과 맞물려 논의된다. 전자와 연결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연관되어 나타나기 때문이고, 후자와 연결되는 이유는 그것이 항상 정치적 권리와 자유의 불균등한 부여를 통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관점에 따르면, 가령 노예제 사회 하에서의 노예주, 봉건제 사회에서의 영주, 자본제 사회에서의 부르주아 등은 이미 그들의 존재 자체가 각각 노예들, 농노들,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로 간주된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그 지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폭력이 되는 셈이다. 그 점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구조적 제노사이드”로 보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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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특히나 사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확인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때의 폭력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폭력이 행사될 수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폭력을 인정할 경우 인간은 살아있는 한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자면-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을 탄생부터 죄를 짓는 원죄적 존재로 보는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마치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로 규정했듯이, 사회적 폭력 담론의 주창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늘 폭력의 환경에 내던져져서 언제나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는 ‘폭력 속에 존재’ 또는 ‘폭력에 둘러싸인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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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사회를 만들었지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회는 다시 인간을 폭력 속으로 몰아넣는다. 반대로 인간은 폭력의 환경 속에서 태어나면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바로 그 폭력을 통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로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의 구조적 폭력 개념을 처음 제시한 인물은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갈퉁이다. 그는 평화를 연구하는 사람답게 폭력에 대해 다른 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 즉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특이한 변증법적 방법으로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폭력은 인간들이 자신의 현실적인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그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보다도 더 적게 발휘하는 데 영향을 받게 될 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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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언하면 “폭력이란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격차를 더 크게 하거나 그 간격을 줄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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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회피 가능한 일이 회피되지 못하고 일어날 때만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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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회 구조가 발생시키는 폭력은 직접적 폭력이 아니라 간접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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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퉁은 직접적 폭력이 현실적인 것의 실현 가능성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파괴할 때 발생한다면, 간접적 폭력은 현실적인 것을 잠재적인 것에 다가가도록 만드는 통찰과 노력이 제거되었을 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간접성 때문에 그는 사회적 폭력을 일종의 “영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령 아사가 회피될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이 기아로 죽었다면 이것은 폭력이 행사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서 상위계층의 기대수명이 하위계층의 기대수명보다 두 배로 높다면, 아무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폭력행위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폭력이 행사된 것이다. 이때 폭력의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갈퉁은 이처럼 폭력의 주체와 객체, 그리고 폭력행위가 명확히 확정되지 않은 사회적 폭력을 “구조적 폭력”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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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폭력은 그 피해 규모가 -물론 피해 당사자 입장에서는 끔찍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음에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끝나지만, 구조적 폭력은 피해 규모가 큰 것도 큰 것이지만 그 피해를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우리가 도대체 어떤 시도와 노력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참혹하고 절망스럽다.

갈퉁은  그 의미의 포괄성 때문만이 아니라 단어의 훼손을 막기 위해, 그리고 아마도 그 부정적인 인상 때문에 “구조적 폭력”을 “사회적 불의”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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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퉁의 담론을 이어받아 사회에서의 구조적 폭력에 주목한 이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지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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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원시사회라는 국가 탄생 이전의 단계를 논외로 쳤을 때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이 막 시작된 현대의 지식정보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계급이 분화되지 않은 평등사회가 실현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슬픈 현실이지만 이것은 역사가 실증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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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구조적 폭력도 물리적 폭력에 해당하는 어떤 유형을 가질 수 있을까? 갈퉁은 구조적 폭력에 근저에 놓여 있는 보편적 형식인 “불평등”을 그 대표적 유형으로 제시한다. 갈퉁은 여기서 정치적 권력 분배의 불평등에 주목했지만, 나는 여기서 경제적 부의 분배의 불평등에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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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체제가 갖는 폭력성은 이처럼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만큼 사회질서가 내포하는 폭력성보다도 더 잔인하고 근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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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단성생식을 거듭하면서 저 하나만 챙겨도 됐던 자본의 자기증식은 이제 오늘날 남들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예측을 대상으로 삼는 선물투기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인간이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가는, 스스로 번식하는 괴물이라는 이 유령은 이데올로기적 추상화일 뿐이라는 주장, 그리고 이 추상화의 이면에 자본이 순환할 수 있게끔 생산력과 자원을 제공하는 실제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고 있으며, 자본은 거대한 기생충처럼 거기에 달라붙어 먹고 산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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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enzi & Breerbi

“재정, 경제, 이념적 힘이 소수의 손에 집중된 비인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언젠가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집단 히스테리 상태에 이를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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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폭력이 정치적 폭력을 낳는다’는 테제가 제시된다. 외관상 그 역은 성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역이 반드시 거짓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반란이나 혁명이 성공해서 새로운 정치체제와 사회구조가 등장하면 통상 그 새로운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다시 인간을 억압하고 통제함으로써 새로운 폭력을 낳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만들어왔고 확대해 온 폭력의 결과로서 ‘불평등’은 결코 해소되거나 또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인가? 대부분 학자의 대답은 ‘예’이다.

불평등의 문제와 관련해 최근에 아주 특이한 관점을 제시한 학자가 바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 샤이델이다. 그는 2017년에 발표한 ‘위대한 평형자 : 폭력과 불평등의 역사, 석기 시대부터 21세기까지’라는 매우 흥미로운 저서에서 전쟁, 혁명, 패망, 역병 등 네 개의 폭력적 사건들이 역설적이게도 불평등한 사회를 오히려 평등한 사회로 만들어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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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분량의 자료들에 대한 샤이델의 분석에 따르면, 미래의 전망은 암울하다. 그는 “불균형을 완화하는 좀 더 평화적인 다른 메커니즘”은 없다고 선언한다. “전체 역사를 통틀어 우리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물질적 불평등의 굵직한 압축 하나하나는 이 네 가지 평준화 동력(대중 동원 전쟁, 변혁적 혁명, 국가 실패, 치명적 대유행) 중 한 개 이상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샤이델은 충격이 수그러지고 나면 모든 것이 원상태로 되돌아오면서 불평등이 정착하고 심화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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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샤이델의 관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회경제적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끔찍한 폭력을 일으켜야 한다는 논리의 불편한 역설을 우리가 수용하도록 설득하려는 듯한 논지로 글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평등을 위해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대체로 사람들은 차라리 약간 불편하더라도 불평등을 감내하며 안전하게 살아가는 길을 더 선호하지 않을까 싶다.

자본주의를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연관시켜 관찰해보면, 그 폭력성의 강도와 규모를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더욱더 흥미로운 결과가 도출된다. 오늘날 그 두 체제는 특별히 친화성이 높아 어긋남이 없이 훌륭한 조합을 이루어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이룰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불평등을 지향하는 자본주의는, 적어도 그 단어들이 내포하는 핵심 의미들을 준거로 보았을 때,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이 둘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득권자들이거나 아니면 아직도 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들이다. 자본주의가 확산될수록 민주주의는 죽어가기 마련이고, 민주주의가 확립될수록 자본주의는 약화되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간다. 그 점에서 정치체체로서의 민주주의와 경제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놓여 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반의어는 전제주의일지 몰라도, 경제적 반의어는 자본주의인 셈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친화적인 경제시스템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의도했던 공산주의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마르크스식 공산주의, 전제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서로 친화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구축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옹호하는 대다수의 선진국 경제학자들이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할 이 기이한 논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생리를 정확히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완전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구현된 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하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 또는 부르주아들은 대부분 이런 환상적 구호를 외치며 가난한 민중으로 하여금 이 체제에서 순응하도록 강요하거나 너희들도 우리처럼 부자가 될 수 있으니 열심히 노력하라며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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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가 그 어떠한 폭력을 실제로 행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편안함과 자유로움과 행복은 곧 남의 불편함과 부자유와 불행 위에서 구축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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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문화예술적 폭력 : 문명과 야만 그리고 상징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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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에 따르면 “문화유산의 현존은 그것을 창조한 천재들의 노고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동시대인들의 부역에도 힘입고 있다. 그 자체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니면서 문화의 기록인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문화 자체가 곧 야만은 아닐지 모르지만, 모든 문화의 업적 안에는 동시에 야만의 기록도 스며들어 있다는 벤야민의 뛰어난 통찰에는 우리로 하여금 문화의 업적이 기본적으로 창조적이고 위대하다는 착각과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만드는 각성 효과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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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가 인간들 사이의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권력 행사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 ‘상징폭력’이라는 탁월한 개념을 만들어낸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언어는 의사소통 또는 지식의 수단일 뿐 아니라, 권력 행사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려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믿고 따르며 존중하고 대우해주기를 바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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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권력이나 상징폭력은 언제나 권력의 행사자와 수용자가 모두 그 언어를 이해하고 서로의 계급적 위치를 인정할 때에만 효력을 발휘한다. 서로의 사전 합의와 동의 또는 이해가 없이는 발휘되지도 않고 무의미해져 버리는 황망한 개념이 바로 부르디외의 ‘상징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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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퉁에 따르면, 폭력은 크게 (1) 직접적 폭력, (2) 구조적 폭력, (3) 문화적 폭력으로 분류된다. 사람들은 그 어디로도 탈출할 수 없는 이 폭력의 삼각 편대의 그물망 속에 갇혀 살아간다. 이 중에서도 문화적 폭력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그 어느 유형보다도 더 심각하고 폭력적이다. 비유하자면, 직접적 폭력이 육체를 망가뜨리는 폭력이라면, 문화적 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폭력이다.

칼퉁에 따르면, “직접적 폭력이 ‘사건’이고 구조적 폭력이 ‘과정’이라면, 문화적 폭력은 상당기간 ‘장기 지속’되는 불변체로 두 폭력의 발현을 추동해내는 폭력의 기저층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실제 현실에서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 형성하는 ‘폭력의 삼각형’은 어느 각에서나 시작해 어느 변으로나 흐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확대 재생산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세 유형의 폭력 사이의 인과적 서열이 아니라, 그들 간의 긴밀한 상호규정성, 또는 그로 인한 ‘폭력의 악순환’을 차단하는 것이다.”

문화는 자신을 제약하려고 하는 각종 힘이나 세력들을 돕고 키운다. 그러나 문화에서의 폭력은 다른 삶의 영역들에서의 폭력들과 달리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생산적이다.

Zygmunt Bauman “문화는 일정한 존속 기간이 지나면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는다. 하지만 죽음은 […] 문화의 창조력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다. 지속이 하나의 과제, 즉 모든 과제의 원천과 척도를 위한 가장 절박한 과제가 될 수 있는 것도 실은 죽음 덕분이다. 그래서 죽음은 문화, 즉 거대한 지속의 구조물을 창조한다.”

게시자: Phronesis.ysb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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