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3. 지적 생산과 기술과 인간 사이에서의 적응

  1. 인류의 지적 생산 과정

예를 들어 도서 한 권을 작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치자. 그 도서는 주제가 있어야 하고, 목차가 있어야 한다. 작가는 먼저 그렇게 나무 구조를 생성한다. 그러고 난 다음 그 나무 구조에서 나뭇가지들, 뿌리들을 생성한다. 전자의 과정은 목차 설정/세부 목차 설정/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들이고, 후자는 세부 목차에 따른 내용에 관한 자료 조사, 글의 흐름 설정 등이다. 전자에만 집중하면 그 도서는 독자에게 따분함만 주는 도서가 되어 버리고, 후자에만 집중하면 그 도서는 독자에게 혼란만을 주는 도서가 되어 버릴 것이다. 한 면만 집중하다간 불성실한 도서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설정하고 이행하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방식이고, 그 방식은 top-down과 그 반대인 botton-up의 혼재인 것이다. 거시적인 접근과 미시적인 접근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처럼 계속 반복하며 좁혀 들어가다보면, 결국 그 도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지적 생성물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조정을 해 가며 이상적 질서를 찾아 나가는 것, 우리의 삶에 필요한 태도는 이러한 생산 과정과도 일체화 되어 있다.

2. 인류의 지적 생산 과정의 기술의 확대되는 개입, 그리고 그 생산 목적들의 해체

범용 AI의 등장으로 우리가 top-down의 틀을 일단 제시하면 AI는 bottom-up의 과정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서 프로그램을 추출하는 과정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알고리즘’이라고 대중적으로 불리는 ‘사용자 기반 추천’은 우리가 수행하는 bottom-up 과정에서 데이터를 전달해 줄 뿐이었다. 과연 우리의 일상에 그 기술이 접목되면서 우리 대부분은 생산성의 증가를 느꼈을까?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어느 순간 위 도서를 만드는 과정과 같은 항상성으로 비유될 만한 신체와 관념이 일치된 실천적 행동을 하기 보다는 믿음으로 관념의 견고화에만 도움이 될 뿐이었고, 신체와의 항상성 유지는 커녕 질서의 붕괴가 컸던 것 같다. 대중의 흐름이 파도와도 같이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질서는 붕괴되었어도 더 큰 질서(대중)가 형성되는 듯한, 주체가 개인에서 대중으로 확장되는 바디우의 주체 개념과 비슷해진 것 같다. 다시 쉽게 말하자면, 그동안 인류는 데이터화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집단화 되고, 점차 물질화가 되어 가는, 그렇게 기계로 변하는 듯 했다. 동시에 철학적 담론도 과학기술적 언어들의 차용을 통해 지금까지의 서양 철학사의 완고했던 본질적 개념인 ‘개인’과 대다수의 관념들은 사장되고 성경과 같이 문학 작품으로서 취급되기 마련인 듯 했다. 중세에서의 성경의 권위는 해체된 지 오래인 것처럼, 이제는 인문학의 권위는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권력과 결탁하여 배제로서 질서 유지를 수행했다면, 인문학은 포용으로서 질서의 유지와 동시의 자유의 발산을 수행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질서의 유지와 자유의 발산의 주체인 개인은 흐릿해진 채 동시에 자유라는 관념에 대한 고찰은 중요해지지 않았다. 자유 외에도 다양한 인문학의 본질적 개념들에 대한 해체 가능성을 간략하게 말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2-1. ‘자유’

자유라는 관념은 정치철학사와 독립적으로 논리를 전개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상 현존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저마다 자유를 방어하고 확산한다고 내세운다. 그렇게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거쳐 나타난 자유주의적 흐름과 영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진 민주주의적 흐름은 사실 상 현대인들에게 자유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정보화라는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민주주의에 기초한 제도적 질서와 기술-현실의 괴리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자유주의에 기초한 우리의 도덕적 담론들은 기술과의 공존 가능성이 주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정리되지 못하는 순환에만 머물렀다. 세계를 서술하고자 형성된 언어인 과학과 그 과학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이해시키고 해석하고자 형성된 언어들과의 동기화 문제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한쪽 면에서의 언어적 해석의 탐구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것이 자유라는 개념에서의 해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의미를 정리하자면, 자유라는 개념의 일상에서의 영향력이 이제는 정치적으로만 작용한다는, 보다 더 순수한 의미로 축소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2. ‘시간’

시간이라는 ‘관념’은 볼츠만의 열역학 제 2법칙으로 확률적으로 생성될 특정 변화의 흐름을 인류는 ‘시간’이라는 해석 틀로 적용했다는 것으로 해체되기 시작했고, 뉴턴의 절대 시간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오직 거시적 세계에만 작동될 효율적인 방법으로만 그 지위가 강등되는 듯 하다. 언어적으로 들어가면 목적이라고 하는 것에는 ‘이유’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고, ‘목적’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는 등, ‘이유’와 ‘목적’ 간의 구별은 단순히 ‘시간’이라는 관념을 대입했을 때에만(과거/미래) 생성되는 것이지, 시간을 벗기고 보면 구별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없다고 사실 상 시간의 본질은 추상성에 있다고 말을 했다.

2-3. ‘주체’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인본주의가 꽃을 피우면서 ‘개인’이 발견되고 그 실천적인 ‘주체’가 탄생했다. ‘자아’를 형성하고 그에 따른 분석 틀과 방법론들이 철학적으로, 심리적으로 탐구가 계속 이루어졌다. 하지만 양 차 세계대전 등을 통해 ‘주체성’에 대한 재 탐구가 이루어지고, 대중의 등장과 함께 환경적 요소를 먼저 판단하기 시작했다. 미학에서는 팝아트로, 철학에서는 시뮬라크르로, 과학에서는 진화론 등으로, 점차 ‘주체’와 ‘환경’ 간의 연계는 긴밀해지고 있었다. 데이터 과학이 발전하면서 ‘주체’는 ‘데이터의 흐름의 일부’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쪽으로 해석이 이루어지고, 철학적 담론도 그에 맞춰 변해갔다.

2-4. ‘자본’

근대사 이후부터는 ‘자본’에 대한 연관된 논의 없이 탐구할 점은 없다시피 하다. 그만큼 중요 변수이기도 하고, 현재 상황도 그렇다. 하지만 정치 사상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탐구가 이루어지고 강화와 해체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소비를 하는 주체인 인간에 맞춰 자본시장의 초점은 인간의 욕망을 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 아직까지 자본의 영향력은 엉킨 실타래같이 복잡해, 더욱 탐구를 해 보아야 할 문제인 듯 싶다. 다만 사무 영역을 대신할 수도 있는 AI의 발전으로 인해 산업 구조에 따른 거시적 경제적 문제와 자본의 영향력 분석은 계속 찾아봐야 할 듯 싶다.

3. 인류의 지적 생산 노력으로부터의 일차적 해방

이렇게 추상적이지만 직관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념적 언어들의 해체 -다시 말하면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로그램 생성 과정을 우리는 기존까지 A-Z까지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A와 Z만도 아니라, Z만 한다면, 즉 목차만 만들어 준다면, 지적 생산물은 형성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생산물은 결국 ‘정리’에 불과하고, ‘직관’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지금까지 반응을 하며 정리를 못한 채 무한한 무기력증에 빠질 위협에 있었다면, 이제는 반응과 정리까지는 하지만, 계속해서 목차를 생성해야 한다는 것, 즉 관리자에서 경영자로, 연주자에서 지휘자로 삶의 태도와 목적이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삶의 조건은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고, 그 관계의 연쇄를 이루어내고 사건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데이터화를 시켜 정보에서의 자유를 이뤄내는, 세계와의 동기화를 지속 생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제 역사가가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한 “항상 역사화하라!”라는 말의 실천적 중요성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디지털 공간에 우리가 남기는 모든 정보들은 공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동시에 검색 AI의 등장으로 우리는 정보들의 동기화를 지속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 우리는 동시에 기존 삶에 대한 경험에 대한 가치는 사라진다. 그 가치는 ‘최초’ 혹은 ‘나의 경험’이다. 그 두 가치는 정보화가 이루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정보화로 인해 자본에 입각한 가치는 사실 상 언젠가 개혁을 넘어서야 하는 당위성을 드러낸다. 그렇게 자본의 권위 해체도 이루어지기란 기술의 발전 단계에 따른 결과물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본에 의한 지적 해방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할 부분은 점차 자본을 제외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대상은 기술 아님 사람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 두 초점에 접근하는 데 생각해보아야 할 태도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4. 사람과의 지적 생산에서 가져야 할 태도

사람과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 등을 해석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감정을 읽는 것, 감성적인 대화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욕망의 제일 큰 연관되는 대상은 자본이므로, 사람과의 대화는 협상일 경우에는 결국 자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동시에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하게 되고, 그 논리적 합의점은 기술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합의에 제일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역시나 사람의 신체적 반응에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신뢰가 제일 중요하게 되고, 결국 신뢰를 먼저 쌓으려면 욕망을 해석하고, 그 욕망과 동기화하여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화에서는 먼저 말투, 몸짓, 태도 등이 중요하고, 그 뒤로 설득 및 정보 전달에서의 신뢰성을 높이려면 데이터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며, 그 데이터를 읽는 데 공통된 언어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그 합의에 있어서 많은 접근법이 생성되는데, 청각적으로는 영어와 한글 같은 언어가 효율적이고, 시각적인 것은 우리 신체의 지각과 연계되는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막상 적어보니 너무나 당연하게 보인다. 그만큼 우리는 사회 관계 형성에 있어 자연스레 이런 방법들을 학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신뢰를 지속해서 생성해야 하고, 그래서 공통 언어로 소통을 계속 해야 하며,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 이는 욕망의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설득의 영역에는 그 욕망의 동기화를 통해 나의 욕망으로 끌어들이는, 정치적인 태도 또한 필요하다.

5. 기술과의 지적 생산에서 가져야 할 태도

AI 기술과의 대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인 것 같지만, 사람과는 결이 다르다. 믿음으로서의 신뢰라기 보다는, ‘인간이 원하는 대화에 얼마나 근접한가’에 따른 정확도에서의 신뢰인 것이다. 결국 인간과의 대화에서 공통된 언어를 통해 서로의 직관을 조율해 가며 같은 욕망의 실천 점을 찾기보다는, 기술과의 대화는 공통된 언어를 통해 인간의 직관만 조율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인간만의 욕망의 실천 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공통된 언어로 높은 신뢰성을 기대하려면, 결국 그 다른 지각으로부터 출발한 언어적 개념들에 대한 배제를 사용해야 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가지치기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동기화가 필수적이다. 같은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생성인 반면에, 기술과의 대화는 인간들이 생성해낸 데이터를 기초로 다른 시공간에서 언제든지 추출할 수 있는 사건의 재 생성인 것이다. 시공간에서 탈피를 한 점에서, 시공간의 정립으로 형성된 인간의 언어 일부의 역할은 기술 앞에서 축소되기란 필연적이다. … 막상 적다 보니, 글의 속도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보아 나의 한계는 여기인 것 같다. 태도에 대한 교정은 직접 기술과 대화를 지속적으로 해 가며 판단을 더 해 보아야 할 문제인 듯 하다.

6. 정리

인간과 기술과의 대화 방법론의 차이를 좁히려고 나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방법론에서 혼동이 되다 보니 어긋된 접근법을 일으키고, 이는 오류로 나아가고 결국 사람과 기술 모두와의 소통이 안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분석철학과도 비슷한 논리이지만, 나는 하나로 합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관계를 정리해 나가려는, 나의 이해 범위에 맞게 재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권태 사이, 그 간격을 좁히고 모든 부분에서 항상성으로 비유되는 질서를 찾아서 안정화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적응이고, 생존이다.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게시자: Phronesis.ysb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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