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저자사항뉴 맵 : 에너지·기후·지정학이 바꾸는 새로운 패권 지도 / 대니얼 예긴 지음 ; 우진하 옮김
Yergin, Daniel[1947-] 우진하
형태사항631 p. : 지도 ; 24 cm
주기사항원저자명: Daniel Yergin
리더스북은 웅진씽크빅 단행본사업본부의 브랜드임
원표제: New map : energy, climate, and the clash of nations
영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
표준번호/부호ISBN 9788901249605 03320: ₩29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321.3 듀이십진분류법-> 333.79
들어가는 글 = 4
한국의 독자들에게 = 16
1장 미국의 새로운 지도
01. 천연가스를 찾는 사람들 = 28
02. 바켄, 이글 포드, 퍼미언 분지 = 43
03. 다시금 부흥하는 미국의 제조업 = 59
04. 세계적 경쟁에 불을 붙인 미국 LNG = 67
05. 개방과 폐쇄 : 멕시코와 브라질 = 80
06. 송유관을 둘러싼 전쟁 = 86
07. 미국의 석유 수출 재개 = 94
08. 셰일 혁명, 빅 3의 시대를 열다 = 102
2장 러시아의 지도
09. 푸틴의 원대한 계획 = 116
10.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립 = 128
11. 유럽과 러시아의 에너지 안보 갈등 = 137
12. 우크라이나와 새로운 제재 조치 = 145
13. 유가 폭락과 러시아의 충격 = 158
14. 천연가스든 LNG든,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 162
15. 러시아의 새로운 동진 정책 = 180
16. 마르크스와 레닌에서 석유와 천연가스로 = 187
3장 중국의 지도
17. G2와 ‘투키디데스의 함정’ = 198
18.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 = 207
19. 남중국해를 둘러싼 세 가지 쟁점 = 215
20. ‘핵심 이익’과 ‘국가적 이익’ = 222
21. 중국이 세운 해양 전략의 이면 = 228
22. 중국의 에너지 안보와 바다 = 233
23.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보물 함대 = 242
24. 신중한 대결 = 246
25. 계획이 아닌 전략, 일대일로 = 261
4장 중동의 지도
26. 모래밭 위에 그려진 선 = 282
27. 중동의 지정학 질서를 뒤흔든 이란 혁명 = 300
28. ‘석유의 왕’을 꿈꿨던 사담 후세인 = 306
29. 핵무기와 맞바꾼 석유 수출 = 319
30. 이라크의 사투 = 331
31. 겨울이 되어버린 ‘아랍의 봄’ = 340
32. 동지중해는 살아 있다 = 363
33. 무슬림 형제단, 알 카에다, ISIS = 370
34. 요동치는 석유 시장 = 388
35. 사우디아라비아의 새로운 행보 = 413
36. 코로나19, 세계 석유 경제를 뒤흔들다 = 440
5장 또 다른 지도들
37. 내연차 대 전기차 = 458
38. 무인자동차 시대를 위한 경쟁 = 486
39. 미래를 호출하라 = 502
40. 새로운 자동차 관련 기술을 기다리며 = 514
6장 기후 지도
41. 에너지 전환과 기후 변화 문제 = 528
42. 파리 협정 이후의 세계를 위하여 = 543
43. 대체 에너지에서 주류 에너지로 = 550
44. 획기적인 기술들 = 562
45. 개발도상국에서의 ‘에너지 전환’이란? = 567
46. 다양한 에너지 자원의 시대 = 573
결론 : 불안한 미래 = 589
감사의 글 = 599
주석 = 604
1장 미국의 새로운 지도
08. 셰일 혁명, 빅 3의 시대를 열다 = 102
103
지난 40년간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지배하고 외교 정책의 발목을 잡아온 건 다름 아닌 에너지 자원의 부족 및 취약성에 대한 염려였다.
105
세계 석유 시장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유휴 생산 능력(spare capacity), 즉 실제로 석유를 생산하고 있진 않으나 언제든 곧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 현재 세계 유휴 생산 능력의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집중되어 있으며 UAE, 즉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쿠웨이트도 일부를 보유 중이다. 여기에 석유 매장량까지 더하면 세계 석유 시장의 무게중심은 사우디아라비아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때때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석유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이유다.
105
그런데 미국의 전체 석유 수입량 중 페르시아만에서 들어오는 양은 셰일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2008년에 이미 2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고, 그 실제 소비량 역시 전체 석유 소비량에서 10분의 1 정도만 차지할 뿐이었다. (캐나다 앨버타의 오일 샌드의 미국으로의 석유 공급이 원인.)
현재 미국은 전체 석유 수입량의 7%정도만을 페르시아만에서 수입하고, 따라서 페르시아만 주변 국가들은 아시아 지역을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여기며 그곳에 점점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이 계속해서 페르시아만을 신경 쓰는 건 단지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혹은 UAE의 특정한 석유가 미국의 특정한 정유 시설로 들어오기 때문만이 아니라, 페르시아만의 석유 매장량이 세계 경제 전체를 좌우하는 데다 이 지역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교역국 및 동맹국 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에서의 석유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전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
106
그렇다면 셰일 혁명은 지정학적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5년의 이란 핵협상이다.
107
두 번째 사례는 유럽,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았던 푸틴의 분노와 관계가 있다. … 유럽연합의 일부 인사 및 워싱턴의 상당수 정치인들은 서유럽에 갖아 많은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있는 러시아가 그것을 무기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시장의 다양화야말로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다.
109
한국은 이미 미국 LNG의 최대 수입국이다.
2018년 가을,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이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40여년 만에 세계 최대의 석유 생산국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113
셰일 혁명은 세계 석유 시장을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에너지 안보의 개념 자체를 변화시켰다. 수십 년 동안 석유 시장을 지배해왔던 ‘OPEC과 비 OPEC국가들의 대결’이라는 구도가 사라지고 새로운 개념과 구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빅 3’의 시대가 그것이다.
2장 러시아의 지도
09. 푸틴의 원대한 계획 = 116
116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15개의 독립 공화국이 새롭게 세워졌는데, 그중에는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와 같이 아주 작은 공화국도 있었는가 하면 국가 면적이 인도하고 맞먹는 카자흐스탄 같은 곳도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 형성된 독립 국가들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건 역시 우리가 지금 흔히 러시아라 부르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다.
118
20년 넘게 장기 집권을 해온 블라디미르 푸틴에겐 국제 사회를 향해 품은 원대한 야망이 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위상을 회복하고 러시아를 다시 강대국으로 복귀시키며 새로운 동맹 관계를 만들어 미국을 밀어붙이는 게 그것이다.
러시아의 부활을 이끌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한 건 바로 석유와 천연가스다. 또한 러시아는 이 두 천연 자원을 이용해 국방력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자국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은 “석유가 국제 정치 상황과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러시아는 미국,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석유 생산국 빅 3 중 하나이며 세계 2위의 천연가스 생산국 및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수출국이라는 지위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러시아의 국력을 뒷받침하는 재정적 기반이다. 러시아는 국가 예산의 40~50%, 전체 수출 수익의 55~60%, 그리고 GDP의 대략 30% 이상을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의지하며, 무엇보다 이런 천연 자원들을 통해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121
그렇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석유 수출을 재개했을 무렵 세계 시장에선 이미 중동 지역 떄문에 석유 공급량이 넘쳐나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까지 석유 수출에 나서자 다국적 기업들은 1959년과 1960년 두 차례에 걸쳐 가격을 떨어뜨렸고, 그 때문에 국가 수익이 감소해 격분한 석유 수출국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주도로 새로운 기구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바로 석유 수출국 기구, OPEC이었다.
122
러시아 공화국은 당대 최대 규모의 ‘공화국’으로 USSR, 즉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 실질적인 중심이었다.
123
1991년 12월 보리스 옐친과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의회 의장들은 … 합의를 내놓는다. 1922년 ‘USSR 건국의 주체’였던 자신들이 새 ‘공화국’의 입지를 내세우며 “국제법과 지정학적 현실의 주체로서 USSR은 이제 완전히 해체된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그의 보자관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사망 통지서’라 일컬었던 내용을 TV 중계로 국민들에게 전달했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며 과거 이름뿐이었던 ‘공화국’들은 각각 독립국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러시아 연방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의 대표로 그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통합되어 있던 석유 산업 체계 역시 함께 붕괴시켰다.
125
푸틴이 취하는 이런 모든 정치적 행보의 중심에는 에너지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 정부는 에너지 산업에 대한 국가의 통제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Ex)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유코스 회장의 10년 형
(국영기업)로즈네프트는 현재 … 러시아 소유다.
러시아 정부는 또 가즈프롬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126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보리스 옐친은 모두 석유 산업과 관련해선 그리 운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이 러시아를 이끌 떄 유가가 폭락했고 러시아 경제도 따라서 크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블라디미르 푸틴은 대단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석유 가격은 그가 집권했던 2000년대부터 정상을 되찾더니 브릭스 시대에 이르러선 계속 상승했다.
127
러시아는 브릭스 시대의 원자재 슈퍼사이클 혜택은 물론 신흥 시장 국가들에서 갑자기 늘어난 원자재 소비의 혜택도 가장 많이 받은 국가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중국의 과열된 경제성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10.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립 = 128
128
러시아는 유럽이 소비하는 전체 천연가스의 40퍼센트 이상을 공급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유럽에서 일어나는 지정학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 이런 긴장감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 및 갈등 관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양국 사이의 갈등은 에너지 시장은 물론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간계,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관계 등에 모두 큰 영향을 미쳤다.
129
우크라이나로 알려진 지역은 대부분이 넓은 평야 지대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일종의 경계선이며, 산이나 강 같은 자연적 경계는 찾기 힘든 곳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은 모두 슬라브족 최초의 통일 왕국인 키예프 공국의 후예라 한다.
130
우크라이나 독립 당시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보유했던 1900여 개의 핵탄두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 태생부터가 핵무기를 보유한 세계 3위의 핵무기 군사대국이었다. 하지만 1994년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만들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갖고 있던 핵무기 모두를 러시아에게 넘겼고 그 대신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현재 국경’을 ‘존중 및 인정’하기로 약속한다.
131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뒤 약간의 타격은 입었지만 거의 무탈하게 혼란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살아남은 러시아의 정부 부처가 있었다. 바로 천연가스 관리 부처다. 그러나 이 부처의 명칭은 곧 가즈프롬으로 바뀌게 된다.
132
천연가스와 가스관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하나로 이어줌과 동시에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천연가스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에너지 자원이며 경제와 산업을 뒷받침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에 더해 서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천연가스관이 자국 영토를 지나가게끔 해주며 받는 수수료 명목의 관세 역시 우크라이나 정부의 주요한 수입원이다.
그렇지만 러시아 역시 이런 입장에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유럽은 가즈프롬에게 있어 천연가스의 주요 시장인 만큼 그 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133
2004년 말 우크라이나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상황은 갑자기 급변했다. … 대규모 부정선거로 …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승리를 거둔다. 대선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의심으로 엄청난 시위가 일어났다. 수도 키예프의 독립 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진 이 대규모 시위는 훗날 유센코 진영을 상징하던 색깔과 연결해 ‘오렌지 혁명’으로 불리게 된다. 우크라이나 법원이 재투표를 통해 결국 유센코의 대선 승리를 선언하자 모스크바 측은 큰 충격을 받았다.
134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이 더욱 심각하게 다가온 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에 NATO 병력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36
2009년,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인한 큰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발칸 반도 일부 국가들이 피해를 입었을 뿐 우크라이나에게는 비축분이 충분했고 서유럽 국가들 역시 그간 비축해두었던 천연가스를 풀었기 때문이다.
11. 유럽과 러시아의 에너지 안보 갈등 = 137
138
노르트 스트림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가스관을 설치함으로써 천연가스 수출 시 우크라이나에 의존하는 정도를 줄이려는 것이었다.
메르켈 총리도 이 계획을 치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유럽과 러시아는 안전하면서도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관계를 향후 몇 십 년에 걸쳐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다.” 유럽연합은 이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을 유럽의 에너지 안보 보장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지정하기도 했다.
139
지난 수년 동안 유럽연합은 통일된 에너지 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28개 회원국들이 러시아에 대해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상호기여도, 그리고 요구 사항 및 관점을 갖고 있는 이상 그런 일은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유럽연합의 공동 에너지 정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두 가지 중요한 목표가 만들어졌다.
- 천연가스의 경우엔 공급 체계 내에서 더 큰 유연성과 에너지 안보를 구축하고 유럽 대륙 전체를 위한 단일 천연가스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로 정해졌다.
필요한 건 ‘관계’가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로 이루어진 세상인 ‘시장’이었다.
- 탄소 가스 제거와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하며 재생가능 에너지 시대로 빠르게 접어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41
러시아를 제외한 최대 ‘유럽 본토’ 천연가스 공급지는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가스전과 영국의 북해의 최대 가스전이다.
12. 우크라이나와 새로운 제재 조치 = 145
147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부터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2008년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쟁,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 사태와 함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148
서방의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그저 유럽연합과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해관계 당사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 입장에서의 우크라이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훗날 확인했던 것처럼 “핵심적”이해관계의 당사자였다.
149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도처에 부패가 만연했다. 그리고 그 부패의 정점에는 다름 아닌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2005년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고 물러났던 이 전직 권투 선수는 정치라는 경기장에 또 한 번 뛰어들어 재경기를 치른 끝에 2010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격분했다. 2013년 말 … 유럽연합과의 협정 포기에 항의했고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부정부패와 러시아의 간섭에 대항하려 했다. … 2014년 2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
150
결국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도주해버렸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즉시 새로운 과도 정부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 과도 정부의 첫 번째 조치는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어와 함께 당시까지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러시아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151
크림 반도의 항구 도시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해군이 사용할 수 있는 흑해 유일의 부동항으로 당시 우크라이나와 일종의 임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2014년 6월 중순, 크림 반도에서는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국민 투표가 시행되었고 그중 대략 96퍼센트가 러시아와 합병되는 쪽에 표를 던졌다. 이튿날 푸틴은 크림 반도와 러시아의 ‘재통일’을 발표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과 유럽연합 측은 러시아가 유럽이 승인한 경계선을 넘어섰다고 선언하며 제재를 결의했다.
152
러시아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에 합의하면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를 가져가는 대신 영토 보존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해당 각서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 따르면 서방측이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사 정변’으로 우크라이나의 ‘합법적인’ 정부가 전복되었으니 지금의 정부와 양해각서 내용을 지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분리주의자들과 준군사 조직, 그리고 ‘휴가를 받은’ 러시아 정규군 병사들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돈바스에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최대의 공업 중심지이며 특히 방위 산업 부문에서 러시아 경제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었다.
154
그 이후로도 전쟁은 일전일퇴를 거듭하며 계속 이어졌고 최소 1만 40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더 이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결이 아닌, 러시아와 서방측의 대결로 확대되었다.
13. 유가 폭락과 러시아의 충격 = 158
160
경제성장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러시아의 희망은 이제 기반 시설, 교육, 보건 등 다양한 경제 분야 모두를 목표로 하는 일련의 ‘국가적 계획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으며 이런 계획들은 주로 정부의 지출과 관련된다. 경제는 재차 국가 주도의 체제로 바뀌고 있었고, 러시아의 개혁은 다시 한 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4. 천연가스든 LNG든,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 162
162
그렇지만 독일의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퐇마한 다른 유럽 사람들은 노르트 스트림 2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노르트 스트림 2는 그저 여러 상업적 계획 중 하나일 뿐이며 그와 관련된 기업들, 즉 러시아의 가즈프롬과 유럽의 협력 업체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메르켈의 설명이었다.
171
새로 설치되는 가스관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유럽은 여전히 천연가스를 더욱 필요로 했다.
유럽 대륙 안에서의 공급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북부의 그로닝겐 가스전은 1959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유럽 대륙 최대 규모의 가스전이었고, 유럽 대륙의 천연가스 공급망은 이를 바탕으로 세워진 거싱나 마찬가지였다. 그로닝겐은 규모 면에선 여전히 세계 10대 천연가스전 중 하나였지만 그 끝을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 2018년 봄, 네덜란드 정부는 그로닝겐의 천연가스 생산을 줄이고 2022년엔 가동을 완전히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172
유럽의 천연가스 시장은 한 번 내용이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국가 간의 장기 계약이 아닌, 실제 구매자와 판매자가 실시간으로 만나는 진짜 시장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로 변해가고 있었다.
173
이제 새로운 세계 경쟁 시장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구매자 입장이 된 유럽은 필요한 수요와 경제 상황, 그리고 위험부담을 계산하며 저울질을 할 것이다.
178
가스전이 오가는 항로는 북극해 항로로 알려져 있는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한 거시안 다름없으며, 이를 통해 러시아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가 달성되었다. 북극해를 통과해 유럽과 아시아를 중게하는 항로가 실질적으로 열린 것이다.
179
북극해 LNG의 개발은 또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지정학적 변화도 보여준다. 바로 러시아의 새로운 ‘동진 정책’이다.
15. 러시아의 새로운 동진 정책 = 180
180
2014년 5월, 수많은 정부 각료들과 기업가들을 대동하고 상하이에 나타난 블라디미르 푸틴은 국빈 자격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환영을 받았다. … (러시아-중국 우호관계)
188
만일 이 독립국들(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취약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면 다시 예전처럼 러시아에 휘둘리거나 바로 이웃하고 있는 이란에 희생제물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일부 국가들의 경우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은 독립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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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서는 카자흐스탄이 중요한 교역 통로이며 카자흐스탄에게는 중국의 시장과 투자가 향후 카자흐스탄의 번영을 보장해줄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193
경제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중국에게는 미국이 러시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시장이다. 무역 전쟁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2018년, 중국은 러시아에 350억 달러 규모의 상품을 수출했지만 미국으로의 수출 규모는 4100억 달러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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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힘을 합친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자신들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고 서방측이 제시하는 ‘보편적’ 가치와 기준에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은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을 지지하면서 이른바 미국의 ‘주도적’ 위치와 ‘일방주의’에도 대항하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지정학적 결속에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에너지 자원이다. 한때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이념으로 뭉쳤던 두 나라는 이제 석유와 천연가스를 중심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다.
3장 중국의 지도
17. G2와 ‘투키디데스의 함정’ =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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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 대한 의존도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서로 밀접하게 얽힐 운명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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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WTO 합의’는 무너지고 갈등에 대한 또 다른 새로운 합의들이 만들어졌다.
200
역사에서는 특히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기원전 5세기 경의 ‘기존의 세력’ 아테네와 ‘떠오르는 세력’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을 그 시작으로 본다. 두 도시 국가 사이의 전쟁은 30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의 사례도 있다. 해군력 증강과 경제적 경쟁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정점을 찍었고 20세기 초반에 짧게 유지되던 평화의 시대는 그렇게 그 막을 내렸다. 패자는 물론 승자까지도 전쟁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빠졌고, 참혹했던 전쟁의 결과는 또 다른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201
국가 혹은 공산당 같은 정당이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중국식 모형’은 미국 방식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 경제가 2009년부터 위기를 벗어나 다시 회복세에 접어들게 해준 핵심 동력이었고,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미국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중국의 관점에서 금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 역사적인 분수령”이었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은 중국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게”되었다.
202
중국은 세계 철강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책임지는 최대 생산국이며 알루미늄과 컴퓨터, 반도체는 물론 전기자동차와 풍력 발전기 제작에 꼭 필요한 희토류 생산량 규모 역시 세계 최대다. 2011년에서 2013년까지의 3년간 중국은 미국이 20세기의 100년 동안 소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멘트를 소비했다. 또한 외환보유고도 충분해서 중국 인민은행의 국가외환관리국은 모두 3조 달러 규모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중 3분의 1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다.
또한 중국 정부가 수출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경제 변화를 모색함에 따라 중국은 빠르게 소비자들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203
환율로 GDP를 계산할 경우 미국 경제는 여전히 중국 경제보다 그 규모가 더 크다. 하지만 구매력 평가와 같은 또 다른 주요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고, 사실상 2014년에 이미 미국을 넘어섰다. 조금 첨언하자면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0년에 경제 규모에서 영국을 추월한 바 있었다. … 그렇지만 중국 GDP의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꼭 확인해봐야 할 사안이 있다. 바로 1자녀 정책과 사회적 변화에 따른 결과인 인구 통계다. “중국만큼 노령층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국가는 없다.”
중국은 석유 제품의 75퍼센트를 수입해 의존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 입장에서 이 문제는 자국의 중요한 약점이자 전략적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다.
205
(트럼프 행정부)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PP)에서 미국이 탈퇴할 것이라 선언했다. 이 협정에는 세계 무역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새로운 지역인 태평양 연안의 12개국이 참여하는데 여기에서 중국은 제외되어 있다.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은 미국이 아시아 지역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약속인 동시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 경제의 강력한 영향력에 휩쓸리지 않게끔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205
G2의 경쟁은 두 가지 영역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지도에서 볼 수 있는 남중국해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 경제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노력을 나타내는 이른바 ‘일대일로’다.
+남중국해
18.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 = 207
209
현재 남중국해에서는 스프래틀리 군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또 베트남 측에서 파라셀 제도라 부르는 중국 영토 근처 섬들을 비롯하여 역시 물 밖으로 보일 듯 말 듯한 ‘여러 섬들’, 그리고 남중국해 자체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둘러싼 다툼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이런 다툼이나 갈등은 사실 그 실체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은 석유와 천연가스 자원,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풍부한 어류 자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 그리고 그 항로를 통해 이루어질 장래 교역량 같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로’라고도 불리는 남중국해는 인도양에서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까지 뻗어 있으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베트남, 중국, 그리고 타이완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싱가포르 역시 거의 근접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남중국해를 통해 3조 5000억 달러 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 해상 교역량의 3분의 2, 일본 해상 교역량의 40퍼센트, 그리고 전 세계 해상 교역량의 30퍼센트에 달하는 규모다.
중국의 경우 석유 수입량의 80%를 이 항로에 의지하고 있다.
210
이렇게 남중국해는 여러 위험으로 가득 찬 바다다. “단 한 번의 무책임한 행동이나 선동이 이 중요한 교역로를 가로막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결과들은 이 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를 수렁에 빠뜨릴 것이다.” 베트남 총리의 경고다.
212
1933년에서 1935년 사이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지도들이 발표되어 중국의 주권이 남중국해는 물론 중국 본토에서 거의 1000마일 떨어진 곳까지 미친다고 주장했고, 여러 섬들에 새롭게 중국 이름을 붙인 뒤 그걸 문서로 승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지도 전쟁’을 책임지고 이끈 사람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많은 존경을 받았던 지리학자 바이메이추였다.
213
중국 본토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공산당 정부가 바이메이추의 지도를 가져와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고, 현재 중국의 지도와 그 역사적 관점은 그때부터 그대로 이어져 이른바 남해구단선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19. 남중국해를 둘러싼 세 가지 쟁점 = 215
215
남중국해를 둘러싼 충돌은 여러 섬들의 ‘영해(territorial waters)’문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세 가지 쟁점이 있다.
1.남중국해에 흩어져 있는, 섬으로도 보기 힘든 작은 암초며 바위들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중국은 산호초 위에 수백만 톤의 돌과 모래를 쏟아부어 인공 섬들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런 인공 섬들은 기존에 있던 육지를 넓혀 새로운 섬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완전한 인공 구조물이 아닌 실제 ‘섬’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현재 그곳에선 해군 함선이 정박하고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군사용 기지들이 건설되고, 전략 폭격기들을 운용할 수 있는 활주로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217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방공 식별 구역을 선포할 가능성이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거센 반발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2.남중국해 자체, 그러니까 그 바다가 완전한 공해인가, 아니면 일부라도 중국 영해에 속하는가 하는 것이다.
217
자국 영해권을 주장할 때 많은 국가들은 1982년에 만들어진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을 바탕으로 한다.
- 세 번째 쟁점은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EEZ)에 대한 거싱다.
그러니까 갈등의 중심에는 국제변호사 로버트 벡맨의 설명처럼 단순한 “항행의 자유”가 아닌, “외해에서 군사 활동을 할 자유”가 자리한다.
남중국해 분쟁에 대해 미국은 자국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그저 국제연합의 협약에 따라 사태가 평화적으로 진정되길 바랄 뿐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해왔다.
미국은 바다에서의 자유 및 자유로운 항해를 ‘외해에서 군사 활동을 할 자유’를 포함한 해양법의 근본이라 여기고, 미 해군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21. 중국이 세운 해양 전략의 이면 = 228
230
중국의 해양 전략 뒤에는 경제적 필요성과 커다란 야망이 자리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말 특별한 이유도 있다. 바로 타이완 문제다.
22. 중국의 에너지 안보와 바다 = 233
233
2009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대국으로 올라섰으며 현재 전 세계 에너지 소비량의 25%를 혼자서 소비하고 있다.
234
중국 석유 산업의 역사는 6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이끌었던 1950년대 초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석유 공급이 중단되고 이후 공산주의 세계의 ‘큰형님’이던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도 틀어지자 중국은 석유의 ‘자급자족’을 절대적인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1959년 ‘큰 경사’라는 뜻의 만주 다칭에서 대규모 유전 지대가 발견되면서 석유의 국내 생산이 실제로도 가능해졌다. 1980년대 중국 내 석유 제품 산업은 일본으로 수출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이 시작되고 국내 석유 수요가 생산을 크게 앞지르면서 1993년 중국은 지금의 상황을 결정짓는 역사적 분기점을 넘게 된다. 순수한 석유 수입국으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15년이 지나는 동안 중국의 석유 소비량은 2.5배 더 늘어났다. … 2020년에는 전체 석유 수요의 75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하는 세계 최대의 석유 수입국이 되었다.
239
HD-981사태는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 탐사 및 어업권을 둘러싼 일련의 갈등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겉으로 드러난 사례들 중 하나다.
240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남중국해에선 최대 1250억 배럴의 석유가 더 발견될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이라크나 쿠웨이트에 매장되어 있는 수준과 맞먹는 규모라고 한다. 물론 … 미국 에너지 관리청은 … 크게 낮춰 보고 있다.
241
중국의 에너지 안보와 관련해 정말로 중요한 건 항로와 멀리 떨어진 저 바다 깊은 곳 어디에 있을지 모를 자원이 아니라 항로 그 자체와 그 항로를 오가는 화물인 것이다.
23.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보물 함대 = 242
242
맬컴 맥린은 해상 화물 운송에서 오늘날 세계 경제의 근간이 되는 컨테이너 혁명을 일으킨다.
244
1960년대 초 컨테이너는 실제로 주목받는 사업이 되었고 그 선두에는 맥린과 그의 회사가 있었다.
컨테이너 혁신이 퍼지고 관련 연결망과 제도를 통해 완전히 자리를 잡자 아시아는 세계 경제와 하나로 통합되었다.
245
세계 최대 규모의 컨테이너 전용 항구 열 곳 중 일곱 곳은 중국에 있고 그중 가장 큰 곳은 상하이 항구다. 중국은 전 세계 컨테이너 화물의 40%이상을 소화하고 있다. 중국 GDP에서 해외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40%에 달한다.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고 석유를 비롯한 각종 원자재를 수입하는 이 과정은 중국 경제성장의 근간임과 동시에 정치 및 사회적 안정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248
2013년 시진핑은 중국 국가주석의 자리에 오르며 중국의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이른바 중국의 ‘제3의 혁명’을 시작해 이끌어오고 있다.
더불어 해군력과 공군력을 증강시킴과 동시에 인터넷 검열도 강화했다. 2018년 중국의 전국인민대표회의는 덩샤오핑 이후 국가주석직의 연임을 제한해온 관례를 깨고 시진핑을 종신 국가주석으로 추대했으며 이른바 ‘시진핑 사상’을 ‘마오쩌둥 사상’이나 ‘덩샤오핑 사상’수준의 반열로 끌어올린다.
남중국해에서는 지금도 잦은 사고와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 선박들과 ‘자유로운 항행과 순찰’을 주장하는 미국 해군 함정들 사이의 갈등이다.
251
유럽연합과 달리 ASEAN의 10개 회원국은 정치체제가 서로 크게 다름에도 인구 6억 명의 경제 공동체로 점점 연결되는 중이다. 이 국가들은 쉬지 않고 반복해서 균형 잡힌 외교를 펼쳐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동남아시아는 안보 문제 면에서 미국과 하나지만 경제 문제에선 또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주미 싱가포르 대사를 지냈던 찬행치의 말이다. 게다가 중국은 남중국해 주변 국가들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동일한 의사를 표시했다. “미국과의 동맹이 지정학적 개념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지리적으로 실재하는 존재다.”
252
남중국해 해상에 있는 ‘육지’나 ‘섬들’의 기준을 명확히 정하고 그 ‘땅’들의 인근 해역에 대한 ‘권리’를 분명하게 결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바로 배타적 경제 수역의 합법적 기준에 대한 이해 및 정리다.
만약 ASEAN을 중심에 놓고 다자간 구도 안에서 문제점들을 제시해 해결하려 한다면, 남중국해를 둘러싼 갈등이 근본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대결이란 확신으로 굳어져버린 상황을 수정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254
일본의 경우 대 중국 수출량은 전체 수출량의 20퍼센트이며 이는 미국으로의 수출량과 맞먹는 규모다. 한국은 그보다 더 많아서 전체 수출량의 27퍼센트를 중국으로 보내지만 대미 수출량은 전체의 12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255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트럼프 행정부의 시각에서 중국은 더 이상 경제적 동반자가 아니며 도전자이자 경쟁자에 더 가깝다.
255
1930년대를 돌이켜보면 무역 전쟁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리 쉽게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아니었으며, 모든 관련국들에게 안 좋은 결과만 안겨주었다.
260
로버트 졸릭
: 당시에는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이 없었지만 여러 확실한 긴장 상태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실제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낸 국제 질서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를 시도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히 다른 규칙과 독자적인 체제를 구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25. 계획이 아닌 전략, 일대일로 = 261
261
이제 누르술탄에 가면 세계 유명 건축가들이 설계한 미래지향적이고 화려한 건축물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991년 독립 이후 석유 수출로 수익이 늘어나면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해진 것이다.
262
시진핑은 세계 경제를 겨냥한 중국의 새로운 지도를 소개했다. 바로 ‘일대일로’라는 지도였다. 새롭게 재편된 세계 경제 지도 위에 ‘중국’을 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놓겠다는 계획이 일대일로다. 이 계획을 통해 중국은 유라시아, 즉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합친 대륙의 모든 국가들과 기반 시설, 에너지, 투자, 통신, 정치, 그리고 문화 등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시진핑의 계획에 따르면 일대일로의 영역은 다시 중동과 아프리카 대륙까지 확장될 텐데, 그러면 그 안에서 중국은 발전의 원동력이자 새로운 동반자, 믿을 수 있는 투자자, 기획자, 그리고 최고의 전략가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266
일대일로는 에너지 자원과 기반 시설, 그리고 운송 시설 등을 모두 포함해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 투자 규모는 무려 1조 4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로, 달러 가치로만 환산해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해 진행했던 마셜 플랜 예산의 일곱 배가 넘는다.
268
중국 바닷길 개척의 최종 목표는 곳곳에 중국의 해상 무역에 도움이 되는 항구를 건설하고 중국 해군을 위한 기항지를 제공하겠다는 이른바 ‘진주 목걸이’ 전략이다.
269
중국은 또한 새로운 비단길을 따라 이루어질 개발 사업들에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도 새로 세울 계획을 마련하였다. 국제연합 상ㄴ하에 있는 세계은행(World Bank)의 ‘관리 방식’ 안에선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어울릴 만한 발언권을 충분히 얻을 수 없다는 불만을 이 새로운 금융기관은 반영하고 있다.
270
일대일로는 중국의 새로운 대외 및 경제 정책의 구성 원리일 뿐 아니라 정치적, 학술적, 대중적 담론의 중심이 되었다. 일대일로와 관련된 중국의 학술 논문은 2014년의 492편에서 2015년의 8400편으로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
273
지금까지 진행 중인 일대일로 사업 계획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620억 달러 규모의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이며 그중 거의 70퍼센트는 전력 사업과 관련된 투자다.
275
크리스틴 리가르드(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외교적 표현으로 “문제가 많은 채무 국가”의 위험이라 말했던 것이 바로 파키스탄과 같은 경우다. 이들 두고 ‘빚의 함정’이라는 비판도 나오는데, 이는 중국이 채무 관계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구다.
함반토타 항구 : 결국 채무를 탕감해주는 대가로 중국의 국영 기업 한 곳이 함반도타 항구를 99년 동안 임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도 정부의 강한 압력을 받은 스리랑카 정부는 중국 측으로부터 인도양의 전략 요충지에 위치한 이 항구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겨우 받아냈다.
276
이렇듯 중국이 제공하는 차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중국 정부 역시 상환 문제를 염려하는 상황에서, 시진핑은 2019년 다른 국가들이 빚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채무 지속 가능성 체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중국 재무부는 이 체제를 일종의 ‘정책 수단’으로 공식 인정한다. 그렇지만 약 1년 뒤 수많은 국가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라 그들이 지고 있는 채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될 확률이 커졌다.
277
그럼에도 미국은 많은 국가들 사이에서 점점 더 예측하기 어렵고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그 평가가 떨어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모두들 중국과의 교류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런 미국도 일대일로 계획을 따라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크게 자극받은 듯하다. … 미국 국제개발 금융공사(DFC)로 새롭게 태어났고 주로 하는 일은 세계 각국의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다. DFC는 중국의 비단길 기금과 맞먹는 600억 달러 정도의 대출용 자본을 확보할 예정이다.
278
일대일로 계획의 추진에 대해 이 지역에서 가장 신경 쓰는 국가가 있다면 또 다른 새로운 거인인 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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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국가들에게 중국은 가장 좋은 투자 조건을 제시하는 곳 중 하나다. 사회 기반 시설 및 에너지 자원의 개발을 위한 투자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세계 경제라는 새로운 지도 위에서 자국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이런 국가들은 점점 더 제대로 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며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는 듯한 미국보다는 새롭게 일어서는 중국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4장 중동의 지도
282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
283
“ISIS는 단순한 테러단체의 범주를 넘어섰다.” 미국 국방부 장관의 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모두 뛰어넘는다.”
ISIS의 야심은 이슬람 세계의 모든 국경선과 민족 국가들을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가 다스리는 국가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국가는 국민의 주권이 아닌, 7세기경 완성된 이슬람교의 율법과 권위를 바탕으로 하는 제국이며 성전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사실 ISIS의 이런 공세는 한 세기 전 만들어진 중동 지역 지도와 관련된 여러 사건들 중 가장 최근에 일어난 것인데, 이런 중동의 역학 관계는 앞서 언급된 이름의 두 사람, 사이크스 및 피코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85
1915년, 어쨌든 사이크스는 피코를 만났다.
각기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사이크스와 피코는 5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스만 제국을 대체할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신하에 서로 힘을 합친다.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에 중동 지역 대부분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 남동부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 이후의 중동 지역을 상정해 이 지도를 제작했다.
295
영국이 원래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던 이 지역은 이제 이라크가 되었고 북쪽 지역과 모술에는 쿠르드족이, 서쪽 지역과 이라크 중심부 및 바그다드에는 이슬람 종파 중 수니파가, 그리고 남쪽 지역과 바스라에는 시아파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문제는 이 세 지역에 공통된 정체성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296
이라크 지역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1932년, 이라크는 비로소 독립국이 되었다.
시리아는 그로부터 좀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프랑스로부터 독립했고 역시 이라크보다 더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시리아가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1946년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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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일어났던 민족 학살을 근거로 들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를 차지하고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주변의 다섯 개 아랍 국가들은 그 즉시 선전포고를 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중동 지역에서 유대인의 국가가 공식적으로 세워졌다. … (1차 중동전쟁)
또한 이 전쟁을 통해 한 이집트 장교의 인생도 뒤바뀌었는데, 이집트 민족주의자로 성장한 가말 압델 나세르 소령이 그 주인공이다. … 그로부터 4년 뒤 1952년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 파루크 1세를 몰아낸다. 당시까지 여전히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 세력 역시 이때 함께 몰려났다.
297
자신이 남긴 기록처럼 “중동 지역의 각 국가를 갈라놓고 고립시키는 국경선을 상징하는 철조망들”을 철거하고 대신 모든 국민들을 “범아랍권” 안에 모이도록 만든 것이다.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영국과 프랑스 및 이스라엘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중동 지역의 새로운 ‘영웅’으로 부상하게 된다.(2차 중동전쟁)
298
나세르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체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 시도했다.
… 그 대상은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였다.
… 나세르는 중동 지역의 석유가 “범아랍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원천”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1959년
이집트의 예맨 내전 개입은 안 그래도 엉망으로 관리되던 이집트 경제에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는 정치적 수렁이 되고 말았다.(북예멘 내전)
299
제 3차 중동 전쟁(1967년)에서 이집트(그 당시 국명 아랍 연합 공화국)가 다시 한 번 패배하고 시나이 반도까지 이스라엘에게 빼앗김으로써 나세르의 정치적 입지는 큰 타격을 받는다. … 심각한 당뇨병에 시달리던 나세르는 1970년 52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27. 중동의 지정학 질서를 뒤흔든 이란 혁명 = 300
300
OPEC 회원국 중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다른 주요 산유국인 이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중동 지역의 지도를 가로지르는 주도권을 위한 다툼이다.
301
이러한 갈등과 관련된 종교적 뿌리는 7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 벌어졌던 전쟁과도 연관이 있다. 누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그의 장인인 아부 바르크인가, 아니면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인가? 수니파는 아부 바르크를 따랐고 결국 아부 바르크는 이슬람 세계의 제1대 칼리프로 등극한다. 그렇지만 ‘알리파’인 시아파는 계속 그의 정통성을 문제삼았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니파와 시아파는 서로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시아파는 신정 국가를 표방하는 이란, 이라크 및 바레인에서 다수파를 차지하며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시리아, 레바논, 아제르바이잔, 파키스탄, 인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무함마드 팔레비 국왕이 다스리던 시아파 이란은 공동의 적들(소피에트 연합, 단일 아랍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부르짖는 정치세력인 바트당, 아랍 사회주의, 그리고 이집트의 나세르 등)을 앞에 두고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
302
팔레피 국왕은 서둘러 이란의 현대화, 그리고 경제성장을 추진했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욤 키푸르 전쟁, 제4차 중동전쟁), 국제 유가는 네 배나 뛰어올랐다.
석유 판매 덕에 성장은 이루어졌을지 모르나, 이란은 곧 ‘자원의 저주’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물가는 폭등했고 … 팔레비 국왕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적수는 다름 아닌 아야톨라 루훌라 호메이니였다. 금욕 생활을 즐기고 독단적이고 편협한 성격인 데다 종교에 모든 걸 다 바치는 이 시아파 성직자는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공화국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는 누구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완고한 인물이었다.
호메이니는 망명 생활 중에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이끌었고 …
1979년 1월, 이란 왕정이 무너지면서 팔레비 국왕은 이란을 탈출했다. 그로부터 … 호메이니가 귀환했고 … (이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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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는 오늘날 이란 정치권력의 기초가 되는 새로운 헌법을 도입했다.
…
호메이니는 이슬람교의 절대신 알라로부터 권위를 이어받은 존재이므로 그의 말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신정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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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정 국가 체제는 헌법과 혁명수비대를 통해 이란의 경제를 팔레비 국왕 시절보다 훨씬 더 강력히 통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이란의 경제가 움직이는 방식이다.
호메이니의 새로운 헌법은 이란 혁명이 단지 이란뿐 아닌 ‘전 세계 단일 공동체’ 구성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충분할 정도로 분명히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호메이니 자신도 “이란 혁명은 그 출발 지점에 불과하다.”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모든 폭압적인 범죄 정권”을 깨부수는 것이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이란이 반드시 “다른 국가들에게도 혁명 정신을 전파하고 이란 안으로 들어오는 오염된 사상들을 거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28. ‘석유의 왕’을 꿈꿨던 사담 후세인 = 306
306
그렇지만 미국을 페르시아만으로 끌어들인 건 이란 혁명뿐만이 아니었다. 1979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소비에트 연방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이 지역 공산당 지도자가 비밀리에 미국과 접촉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망상에 빠져 저지른 실수였다.
… “페르시아만 지역을 장악하려는 외부 세력의 어떤 시도든 미합중국의 주요 국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다.” 미 대통령 카터는 이렇게 말했다.
307
미국은 페르시아만과 석유를 직접 나서서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10년 전 영국이 힘에 부쳐 포기해버린 임무였다. 소비에트 연방 입장에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드는 부담스러운 작전이었고 결국 훗날 벌어지는 연방 붕괴 과정의 단초가 되고 만다.
307
한편 이라크에선 사담 후세인이 잔혹하게 권력을 휘두르며 혹시 존재할지 모를 모든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아랍세계의 새로운 맹주가 되기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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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을 그런 위치까지 끌어올려준 건 다름 아닌 석유였다. 1973년 전쟁으로 석유 가격이 치솟자 이라크는 매우 큰 이득을 거두었고 정부 주도의 계획 경제와 대규모 산업화를 위한 자금 조달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1979년 이란 혁명이 성공하면서 등장한 시아파 이슬람 국가는 그 즉시 바트당이 장악하고 있는 이라크에 큰 위험이 되었다. 사담 후세인과 그의 측근들은 소수 수니파로서 이라크를 지배하며 강압적 통치를 펼치고 있었지만 다수의 시아파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 중이었고 저항군도 은밀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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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 22일 이라크는 우선 대규모 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게 쉽게 이란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내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가 20세기 들어 일어났던 주요 전쟁들 중 가장 길고 피비린내나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이란-이라크 전쟁) 이란 군대는 새롭게 전장에 등장한 지원군의 도움으로 열세를 회복했다. 그 지원군이란 처음에 급조된 민병대에 불과했으나 곧 호메이니에게 충성을 바치는 광적인 전사들로 성장한 이란의 혁명 수비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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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에 유가 하락까지 겹치자 이란과 이라크 양국은 모두 큰 타격을 받았고 석유의 생산과 수출 역시 크게 줄어들었다.
… 이란은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 … 호메이니는 결국 국제연합이 제시한 휴전안을 받아들였다. … 사담 후세인과 바트당이 지배하는 이라크에 적대감을 가졌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쟁 기간 동안 이라크를 지원한 것은 당장 더 급한 위험으로 판단되는 이란을 막아줄 보호막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
이란은 새로운 테러리스트 조직인 헤즈볼라 알 하지즈에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 조직의 목표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의 전복이나 최소한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을 이뤄 사우디아라비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311
1990년 여름, 이라크의 이란의 전쟁이 마무리된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사담 후세인은 다시 한 번 중동 지역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겠다고 결심한다. 8월 2일 아침, 이라크는 그동안 이라크에게 자금을 지원해준 석유 부국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312
쿠웨이트 점령으로 이라크는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거의 20퍼센트를 손에 넣었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가 없어도 사담 후세인은 전 세계 석유의 3분의 2가 몰려 있는 페르시아만을 지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세계 석유 산업의 결정권을 쥐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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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담 후세인을 바로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건 다국적군의 전쟁 계획에 들어 있지도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다국적군은 목적을 달성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물러났고 군은 파멸되었으며, 쿠웨이트는 자유를 되찾았고 페르시아만의 지도는 원상태로 복구되었다.(걸프 전쟁)
314
2001년 조지 W.부시는 아버지인 조지 W.H. 부시가 빌 클린턴에게 패한 지 8년 만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1일, 민간 여객기를 납치한 알 카에다가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워싱턴 근처의 미국 국방부 건물을 공격해 297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탈레반은 알 카에다의 근거지였다. 부시 행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1991년 다국적군이 바그다드 점령을 주저하면서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 즉 사담 후세인의 축출을 위한 다음 단계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라크가 알 카에다와 연계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바트당과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알 카에다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이런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럼에도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제재 조치와 견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부시 행정부는 단순한 제재난 봉쇄가 아닌 ‘선제공격’ 정책을 채택했다. … 2003년 3월 20일, ‘충격과 공포’라 명명된 맹렬한 공습과 함께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라크의 저항은 4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완전히 끝났고 사담 후세인은 망상에라도 빠진 듯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은 군대에게 계속해서 명령을 내렸다. 4월 9일이 되자 미국이 주도하는 ‘유지연합’은 12년 전 하지 못했던 일을 끝마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바그다드 점령을 시작으로 짧았던 전쟁은 길고도 힘든 싸움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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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체.) 이렇게 해서 이라크 국민들에게 남은 건 쥐고 있던 무기와 허탈감, 그리고 분노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은 고스란히 이라크 국민들의 저항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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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침공의 빌미가 되었던 대량 살상 무기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
318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반인도주의적 행위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29. 핵무기와 맞바꾼 석유 수출 = 319
319
1997년 치러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하타미는 보수 성향의 이슬람교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후보에게 역전승을 거두었다. 최고지도자이면서 호메이니의 후계자인 알리 하메네이가 지배하는 이란에서의 삶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너무나 깊었고 인구의 70퍼센트가 30세 이하가 될 정도로 인구통계학적인 변화가 너무나 컸던 것이 이유였다.
하타미는 사회 분위기를 완화하고 이슬람교가 바탕이었던 엄격한 통제를 풀며 법치를 내세우는 동시에 경제개혁을 시도했다.
320
국내에서의 반발이 일었음에도 하타미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였다. 당시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아직 건재했던데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라크를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다.
321
그렇지만 여전히 결코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양국 정부와 그 체제가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다. 한쪽은 혁명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차 있었지만 다른 한쪽은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또 한쪽은 시아파, 다른 한 쪽은 수니파였다. 양국의 화해 분위기는 결국 이란의 레바논 사태 개입으로 깨지고 말았다. 2003년 사담 후세인이 몰락하자 두 나라는 이제 더 이상 공동의 적에 의한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진 이라크가 내전 상태로 돌입하면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도 서로 충돌했고, 이란이 이라크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려 시도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322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화해 분위기가 완전히 막을 내리고 새롭게 경쟁 관계가 시작된 건 2005년 이란 대선에서 아흐마디네자드가 승라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이란 혁명 수비대 출신.
322
대통령이 된 아흐마디네자드는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국제연합의 제재를 피해가며 보다 적극적으로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을 다시 개발하기 시작했다.
-> 미국의 이란 제재
324
국가 수익이 줄어들고 경제 활동마저 어려움을 겪자 이란은 경제 모든 분야에 걸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325
이듬해인 2013년 6월, 이란의 정권이 교체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1997년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개혁파, 아니 최소한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후보가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기득권 진영의 후보를 이긴 것이다. 하산 로하니가 승리의 주인공이 된 것은 역시 1997년 당시처럼 국제적 제재와 고립으로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진 데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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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015년 8월, 최종 합의가 시작되었다.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중단되었다. 핵연료를 축적하고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이란의 능력은 최종 합의에 따라 10년간 봉인되었다.
327
미국은 그 대신 이란에 대한 석유 및 금융 관련 제재를 풀어주기로 했다.
328
(트럼프 행정부) 2018년 11월, 이란 석유 구매에 대한 새로운 제한 등을 포함한 미국의 제재 조치가 일방적으로 실시되었다. “대립과 저항의 최전선에는 바로 석유가 있다.” 로하니 대통령의 말이다.
328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크고 작은 갈등들 중 상다수는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벌이는 더 큰 규모의 다툼으로 형성된 것들, 즉 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냉전’의 결과물들이다.
329
레바논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지도 만들기에 따라 세워진 국가이며 국민 과반수가 마론파 기독교를 믿고, 정치 질서는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이 권력을 공유함으로써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식 독립 이후의 레바논 정치는 총리 및 대통령 들에 대한 지속적인 암살 시도 등으로 언제나 불안했다. 또한 레바논은 아예 현대식 자살 폭탄 공격의 시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 레바논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인 헤즈볼라, 즉 ‘신의 당’은 레바논의 시아파를 중심으로 이란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 헤즈볼라 소속 민병대원들을 훈련시킨 건 다름 아닌 IRGC(이슬람 혁명 수비대, 이란 혁명 수비대)이며 이란 출신의 성직자나 군인들 또한 헤즈볼라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고 해즈볼라의 자금과 로켓, 미사일 같은 무기들의 공급처 역시 이란이다.
330
2018년에 헤즈볼라는 레바논 총선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했고 2020년에는 헤즈볼라를 주축으로 하는 연정 세력이 정권을 차지했다. 레바논은 이란의 혁명 수출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 이라크의 사투 = 331
331
사담 후세인이 있는 이상 이란 혁명 수출의 길은 막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자 곧이어 권력과 자원 사이에 둔 다툼이 벌어졌다. … 이란의 목표는 이라크의 분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시아파를 앞세워 자신들이 이라크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333
이란에게 있어 이라크는 이른바 ‘저항의 축’이라 불리는 그들 계획에서 없어선 안 될 요소였다. 그리고 그 축의 가장 중심에는 가셈 솔레이마니가 있었다. 솔레이마니는 20년 넘게 쿠드스 부대를 이끌어온 사령관이자 ‘저항의 축’계획을 설게하고 진행시켜온 인물이었다.(쿠드스 부대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특수 부대)
333
2003년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공이 일단락된 후 솔레이마니는 다국적군에 대항하는 전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이란, 그중에서도 자신의 지원과 지휘를 받는 시아파 민병대였다. 이란은 이슬람 전사들을 모집해 자국 및 레바논에 있는 비밀 훈련소에서 훈련을 시켰고 이란의 사상과 순교가 가져다주는 영광 등을 그들의 머릿속에 주입시켰다. 또한 민병대에 자금과 함께 각종 정보와 위험한 살상 무기 등도 제공했는데 거기에는 각종 중화기는 물론 IED, 즉 급조 사제 폭탄과 미군 장갑 차량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폭발 성형 관통자 EFPs’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무기들은 수많은 미국 및 다른 다국적군 병력들을 희생시켰다.
336
2014년 여름, 끝없이 권력을 탐하던 말리키가 총리직에서 퇴출되었다. 그 후임인 하이다르 알-압바디 총리는 미군이 다른 다국적군과 함께 공군 및 육군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라크에 주둔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면 우선 무엇보다 ISIS를 격퇴하고 국토를 완전히 수복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득이 있었으니 바로 ‘이라크 정부에 대한 이란의 참을 수 없는 압박’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도움이었다.
337
ISIS와 맞서는 등의 치적을 세웠음에도 알-압바디 총리의 입지는 이라크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사회복지 제도의 붕괴로 위험한 지경에 놓였다. 이라크 산업 생산 시설의 80퍼센트가 집중되어 있는 사실상의 경제 수도 바스라에서는 2018년에 시위가 발생했다. 투자와 일자리 부족, 그리고 섭씨 45도를 넘는 여름 더위 앞에서 정상적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식수 및 전력의 부족을 호소하는 시위였다.
338
… 그 이후로 정치적 혼란.
339
미국과 이란의 대립 외에도 이라크의 새로운 정부는 맹렬하게 확산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와 ISIS 소속 민병대들의 공격 재개, 그리고 이라크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석유 판매 수입의 엄청난 감소 문제 등을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 와중에 이란은 목표했던 일들의 상당 부분을 달성했다. 국력이 크게 떨어진 이라크는 이란의 ‘저항의 축’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31. 겨울이 되어버린 ‘아랍의 봄’ = 340
340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랍 정권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드디어 튀니지에서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절망에 빠진 어느 젊은 과일 행상이 분실자살을 시도한 직후부터였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촉발된 시위 물결은 튀니지의 부패한 독재자 지네 엘 이비디네 벤 알리를 몰아냈다. 알리는 23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2011년 1월 튀니지를 탈출한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는 소셜 미디어와 위성 TV에 자극받은 엄청난 숫자의 국민들이 시위에 참여해 거리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이런 시위와 정권 교체 과정은 훗날 ‘아랍의 봄’으로 알려지게 된다.
341
그렇지만 그 기쁨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랍의 봄’ 역시 누군가의 표현처럼 아랍의 겨울 비슷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341
2011년 말, 이집트의 시위대가 카이로 시내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 이들은 한목소리로 82세인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다국적군에 합류해 조지 H.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내 지혜로운 친구”라는 말까지 들었으며 알 카에다의 공격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이집트를 미국의 확실한 동맹국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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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게이츠(국방부 장관)는 이렇게 기록했다. “거의 모든 혁명이 처음에는 이상주의와 희망을 갖고 시작하지만 결국 탄압과 유혈사태로 얼룩지고 만다. 무바라크를 몰아냈다고 치자. 그러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바라크 대통령은 TV에 출연해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약속했다. 게이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오바마 행정부가 원했던 그대로 정확하게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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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몰락은 중동 지역의 세력 균형에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게이츠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중동 지역의 미국 동맹국들은 이집트의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나 소요 사태로 자신들도 무바라크처럼 미국에 의해 내쳐지게 되진 않을지 염려하고 있었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아랍 국가들은 이란의 세력 확장으로 자신들의 위치가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는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미국을 믿을 수 없는 상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역시 중요한 석유 수출국이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의 소요 사태 이후 리비아에서도 42년간 독재를 휘두르며 기행을 벌여온 무야마르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는 이내 내전으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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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그는 수도 뱅가지 안에서 정권 반대 세력을 향해 유혈 사태로 번질 수도 있는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아랍 각국 정부의 협력 기구인 아랍 연맹이 황급히 도움을 요청하자 국제연합과 NATO 사령부가 지휘하는 미국과 유럽 공군은 반대 세력을 구하기 위해 리비아로 날아왔다. 오바마의 측근 중 한 명은 미국이 리비아 사태에 대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라고 회고했다.
리비아의 내전 사태는 그 즉시 석유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리비아에선 한동안 모든 석유 생산이 중단되었고 석유 가격은 배럴당 130달러까지 치솟았다. 2011년 10월, 공습을 피해 도주하던 카다피가 하수도에 숨어들었다가 그곳에서 피살됨으로써 카다피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다.
카다피는 리비아를 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사회 제도라 할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무기들은 사방에 넘쳐흘렀고 내전은 민병대와 범죄조직들의 전쟁이 되어갔다. 그러는 사이 ISIS는 리비아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했고, 다량의 무기가 리비아로부터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로 흘러들어갔다.
351
시위의 물결은 시리아 전체로 번져나갔다.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험에 처한 바샤르에게 있어 더 이상의 개혁은 없었다.
시리아 군대가 개입을 시작하자 반정부 성향의 장교들이 군을 떠나 자유 시리아 군을 조직해 여타 반정부 조직들과 어느 정도의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봉기는 아예 정말 내전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362
예멘은 대혼란에 빠진 명목상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또한 그 전략적 위치 때문에 현대 중동 지역의 두 강력한 경쟁자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충돌하는 주요 전장이 되어버렸다.
… 하지만 이란의 전략, 그리고 중동 전 지역이 대결과 갈등의 장이 되어버린 이유를 짧게 요약하는 건 쿠드스 부대의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몫이었다. 이란 혁명 기념일을 위한 집회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이란의 혁명이 바레인에서 이라크로, 또 시리아와 예맨,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수출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32. 동지중해는 살아 있다 = 363
363
이란은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에 확고한 군사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하지만 그건 이란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조치들 중 하나일 것이다.
364
IRGC의 고위급 지휘관 중 한 사람의 말을 빌면 이란의 주요 목표는 “동지중해까지 우리의 국경선을 안전하게 확대하는 것”이다.
1999년, 이스라엘 남부 연안에서 가스전이 한 곳 발견되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석유 관련 자원을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던 이스라엘로서는 처음 있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나라에게 있어 자원의 수입은 대단한 큰 약점과 불안의 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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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스라엘 전력 생산량의 60퍼센트는 외국에서 수입한 석유나 석탄이 아닌 자체 천연가스로 해결된다. 이스라엘은 이미 민간 기업들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 요르단에 천연가스를 수출 중이며 머지않아선 LNG나 해저 가스관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유럽과 거래하는 국제적인 에너지 자원 수출국이 될 수도 있다. 수입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며 국가 안보를 걱정해야 했던 이스라엘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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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헤즈볼라의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이스라엘은 시설 보호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 거기에는 자국에서 개발한 아이언 돔 미사일 방어 체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언 돔은 헤즈볼라와 하마스가 보유하고 있다는 러시아와 중국제 해상 미사일에 대한 요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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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중해는 전 세계 에너지 산업과 지정학적 문제를 흔들 만한 새롭고 역동적인 요소로 산업 지도와 지정학적 지도 모두를 바꾸고 있다. 동지중해의 천연가스는 유럽뿐 아니라 LNG를 통해 전 세계 시장에 공급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의 정치 상황으로 인해 동지중해는 계속해서 논란과 분쟁의 바다로 남을 것이다.
33. 무슬림 형제단, 알 카에다, ISIS = 370
370
ISIS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른바 민족 국가에 대한 이슬람교의 거부,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후 일어난 결과들, 유럽의 간섭, 세속적 세계와 현대 문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국경선, 그리고 무능력한 지도자들로 점철된 한 세기의 역사가 있다.
이집트에서 하산 알-반나가 ‘무슬림형제단’ 창설 -> 따라서 이슬람교도로서의 궁극적 목표는 “전 세계에 대한 지배”로 이어질 칼리프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칼리프의 나라”라는 개념은 민족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해결책이 되기도 했다.
1949년 이집트의 총리가 암살당한 직후 알-반나 역시 암살을 당했는데 이는 아마도 총리 암살에 대한 보복 조치였을 것이다.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바로 새로운 목표들을 정한다. 그중 하나는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였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세속적 위협 중 가장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미국에 대한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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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무슬림 형제단은 가말 압델 나세르 대령이 이끄는 자유 장교단이 1952년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을 때 사실상 동맹 역할을 했으며 나세르는 실제로 쿠틉에게 이런저런 정부 요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세르가 좀 더 세속적인 민족주의와 아랍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져감에 따라 쿠틉과 나세르의 사이는 크게 벌어졌다.
1954년에는 일단의 무슬림 형제단 단원들이 나세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무슬림 형제단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고 쿠틉은 무슬림 형제단 산하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고발되어 감옥에 갇힌다.
쿠틉은 감옥 안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적어두기 시작했는데 그 글들은 외부로 몰래 반출되어 ‘길가의 이정표’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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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건 “이러한 결의로 무장한 선봉대”이며 이들이 있어야 잔혹하고 성스러운 전쟁을 통해 이슬람교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음은 물론 “결국 세계 지배라는 숙명으로 이슬람교와 그 교도들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나는 이런 이슬람교도 선봉대를 위해 ‘길가의 이정표’를 썼다.” 쿠틉은 이렇게 덧붙였다.
(쿠틉)은 1966년에 처형당했다.
374
500여 명에 달하는 알-오타이비의 전사들은 몰래 무기를 감추고 그랜드 모스크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무장 세력들을 모두 죽이거나 체포해 완전히 몰아내는 2주일 동안 많은 희생이 있었다. 1979년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은 “현대에 이르러 국제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운동이 일으킨 최초의 대규모 활동”으로 기록되었다.
이 무렵 이집트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연결망이 광범위하게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력을 규합하고 나세르 지지파가 쥐고 있는 권력을 빼앗기 위해 이들 강경파 이슬람교도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디트는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그의 아내는 여성들이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며, 사디트는 이슬람교도선 상상할 수 없는 죄까지 범했다. 1967년 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영토를 돌려주는 대가로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이다. 1981년 10월 6일,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무장단체 소속 군인 세 명이 열병식 도중 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쏴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했다.
중동 지역의 강경파 이슬람 운동은 그 활동 범위가 대단히 광범위하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영향력이 큰 활동 단체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으로, 이들은 다른 수십 개 국가들 안에 여러 ‘직계 및 방계 조직들’을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376
1979년 12월, 메카에서 알-오타이비가 체포된 후 1주일이 지나 소비에트 연방의 군대가 아무 다리아 강 위에 부설된 임시 다리를 건너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했다. 짧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 전쟁은 길고도 혹독하게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무자헤딘이라는 강력하면서도 무자비한 적이었다. 이슬람교를 믿으며 성전에 임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사들을 뜻하는 무자헤딘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무기와 자금을 지원받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사람들 중에는 예맨 출신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한 유명 건축업자의 17번째 아들이었던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다.
그의 오른팔, 알-자와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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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도임에도 이슬람교의 엄격한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 혹은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자들은 배교자들이며 따라서 죽어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또 알-자와하리는 이슬람교 율법이 자살을 금지하고 있음에도 자살 폭탄 공격 지원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1998년 초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몇몇 무장단체들이 하나로 뭉쳐 알 카에다라는 조직을 만든다. 알 카에다는 ‘기반’ 혹은 ‘근본’이라는 뜻이다. 알 카에다의 수장은 오사마 빈 라덴이었으며 알-자와하리는 조직의 2인자였다. 알 카에다의 목표는 “전 세계에서 미국의 이익과 관련된 모든 곳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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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에다의 전쟁은 1998년 8월 7일에 시작되었다.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들은 이날 각각 11분 간격을 두고 대규모 자살 폭탄 공격을 받았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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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알 카에다의 근거지와 탈레반 정부가 있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알 카에다 조직원들은 끝까지 추적을 당했지만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1년이 되어서야 사망했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바마드로부터 35마일가량 떨어져 있는 어느 작은 시골집에 몇 년간 숨어 있다가 공격당한 것이다. 그 뒤 알 카에다의 2인자였던 아이만 알-자와하리가 조직을 이끌게 되었다.
알 카에다가 수립한 전략들을 보면 아랍 정부와 미국, 그리고 세계 경제에 대한 공격에서 석유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빈 라덴은 석유와 관련된 공격은 석유 가격을 끌어올릴 뿐 아니라 “파산 직전에 몰릴 때까지 미국이 계속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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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에다의 활동이 계속되면서 이라크에도 알 카에서다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은 너무나 잔혹해서, 심지어 “불경한” 이슬람교도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는 탁피르 교리를 설파했던 알-자와히리조차도 이슬람교도들을 너무 많이 학살한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이라크 알 카에다에게는 곧 새로운 이름이 붙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라크 이슬람 국가’다. 이들의 사명은 중동 지역에서 지난 100년 동안 그려진 기존의 지도를 없애고 더 이상 어떤 국경이나 지도도 존재하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칼리프가 다스리는 통일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조직명에 ‘시리아’를 덧붙여 ISIS(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라고 자신들을 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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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IS는 알 카에다를 포함한 다른 이슬람 반군 세력들 모두가 배교자들이며 “어디에서든 찾아내기만 하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했다.
2013년 내내 ISIS는 이라크에서 목표로 했던 암살 작전을 진행하며 자신들의 정적이 될 수 있는 핵심 지도층 인물들을 말살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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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 6월 6일, 이라크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모술에 대한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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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IS가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약탈을 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ISIS에서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나면 그다음 목표는 이라크 시아파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나자프와 카르발라라고 선포했다. 다시 말해 이라크 남부의 주요 유전 지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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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모술에 있는 모스크의 연단에 오른 알-바그다디는 칼리프가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알렸다. 일반적인 민족 국가와 달리 칼리프의 나라는 정해진 국경 같은 것이 없으며 무력, 즉 계속되는 성전을 통해 보호받고 확대되는 신실한 이슬람교도들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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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수익은 석유에서 나왔다.
ISIS는 여러 선전 활동과 소셜 미디어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고 새로운 조직원이나 단원들 또한 수월하게 모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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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IS는 시리아에서 자신들의 영토를 계속 넓혀가고 있다.
ISIS가 쿠르디스탄 자치구의 수도인 아르빌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국도 마침내 반격에 나섰다. ISIS 병력을 향해 처음으로 공습을 시작한 것이다.
2017년까지 ISIS가 차지한 실제 영토를 보면 알 카에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위용을 자랑한다.
성전을 부르짖는 이런 이슬람 무장단체들은 테러 공격을 통해 유럽에 다시 전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11월에 있었던 파리의 그 끔찍한 밤, 그리고 2016년 3월 아침 브뤼셀 공항에서의 폭탄 공격을 떠올려보자.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개인 테러리스트를 뜻하는 ‘외로운 늑대들’ 중 일부는 인터넷 등을 통해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ISIS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유럽과 미국, 캐나다에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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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말, 미국은 ISIS와 싸우는 이라크와 쿠르드 민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2019년 3월, ISIS는 시리아 동부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점령 지역을 빼앗겼다. 이제 칼리프가 다스리는 국가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ISIS는 아직 건재하다. 다시 소규모 유격부대로 돌아간 그들은 또다시 테러 공격을 무기로 삼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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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델타포스, 알-바그다디 폭사.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보자면 ISIS의 영향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쇠퇴하고 있었다. 2014년 ISIS가 이라크를 전격적으로 침공했을 당시 석유 시장은 크게 요동쳤고 석유 가격도 급등했지만,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4. 요동치는 석유 시장 = 388
388
2011년~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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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셰일오일 생산량이 급등했음에도 유가가 한동안 균형을 이루었던 것은 이런 모든 상황(중동) 등이 맞물린 덕분이었다.
사실 2014년 봄까지만 해도 늘어나는 석유 수요를 생산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었다.
그렇지만 2014년 여름이 지나면서 페르시아만의 석유 생산국들은 시장에서 당혹스러운 신호를 받게 되었다. 무슨 영문인지 아시아에서의 석유 판매량이 예상치를 밑돈 것이다.
당시 정확히 해석되진 않았지만 그 신호들은 적어도 전 세계 석유시장과 세계 경제에 일어나는 중대한 변화, 즉 브릭스의 시대가 저물고 셰일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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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수요 면에서의 문제 : 중국의 경기 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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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 회원국들 중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높이고 시장에 영향을 줄 만한 역량을 가진 나라로는 우선 사우디아라비아가 있고 그다음이 UAE와 쿠웨이트 정도다. 하지만 역시 석유 가격이 올라갔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국가는 이란일 것이며, 그런 식으로 이란을 돕는 건 세 나라 모두 결코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지정학적 긴장과 갈등이 유가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그와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경쟁으로 인해 나타난, 가격 폭락의 시작으로 보이는 이 상황을 중단시킬 만한 거래는 어떤 것도 없었다.
393
문제는 결국 “새로운 산유국들이 너무 많이 늘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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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몇 주 동안 시장에는 석유가 넘쳐났고 이듬해 1월 중순이 되자 석유 가격은 5개월 전과 비교해 절반 이하로 폭락했다.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이 새로운 석유 전쟁을 주요 기사로 다루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셰일의 대결’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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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오일의 출현으로 석유 산업은 새로운 용어들을 접하게 되었으니 바로 ‘단기 개발’과 ‘장기 개발’이었다. 단기 개발의 대표적인 예는 당연히 셰일오일이다.
장기 개발은 주로 바다에서 발견되는 석유나 LNG 사업에 적용된다.
많은 장기 개발 계획들은 대부분 브릭스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계획 수립 당시의 손익분기점은 ‘새로운 기준’인 배럴당 100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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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OPEC은 석유 가격의 통제권을 이른바 ‘변동에 따라 움직이는 투자자들’에게 넘겨준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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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대부분의 석유 수출국들은 엄청난 곤경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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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는 시장에서 가격이 하는 역할을 착실히 수행 중이었다. 시장은 재조정되었고 수요와 공급 사이의 격차는 줄어들었으며 유가의 하락은 새로운 공급처 개발을 지연시켰다. 가격이 낮아지자 이번에는 수요가 증가했다. 2015년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성장세는 2014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401
OPEC-PLUS(석유 생산량 감산)는 또한 지정학적 질서를 새로운 개편에도 도움을 주었다.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새로운 관계를 맺은 것이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후 누군가 알-나이미에게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러시아를 경쟁자로 생각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답했지만 이제 한때 경쟁 관계의 근원이었던 석유가 두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402
몇 개월 뒤 푸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에너지 장관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함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경쟁 관계에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측의 제재와 함께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상황이었기에 러시아는 아랍 세게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력을 크게 반길 수밖에 없었다.
403
석유 시장의 회복세는 베네수엘라의 정치와 경제가 계속 무너지고 그로 인해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은 세계 최대 규모로 그 양만 보자면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많지만 대부분은 처리하기 까다로운 중질유라 그 생산과 처리에 많은 비용이 든다.
404
2018년 봄이 끝나갈 때까지 전 세계 석유 가격은 배럴당 80달러 선을 회복했다 .그렇지만 이 석유 시장에 새로운 요소가 등장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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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봄,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석유 수입에 대한 제재 예외 조치가 끝났음을 알린다. 완전 수출 금지가 새로운 정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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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런 제재 조치는 이란 경제의 숨통을 옥죄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지난번 합의에 따라 제한하고 있던 우라늄 연료의 농축 작업을 늘려갔다.
그렇지만 이미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바로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었다.
석유 수요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유가는 당연히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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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만 해도 세계 석유 산업의 중심지에서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나면 바로 전 세계 시장에 공황 상태가 일어나고 석유 가격 또한 치솟아 오르곤 했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번에는 유가 폭등 같은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잠시 올랐던 가격도 이내 공격 이전의 수준으로 안정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 서둘러 사태를 진화하고 국내 정유 시설로 공급되는 양을 줄이면서 비축분을 풀어 이전의 수출 물량을 유지한 것이 효과를 거둔 것이다. 또한 시설 수리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애초에 전 세계의 석유 비축 물량이 충분했던 상황 역시 도움이 되었다. 과거와 다른 상황을 가능하게 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미국의 석유 생산에 따른 세계 석유 시장의 새로운 균형과 안정이었다. 계속 생산되는 미국의 셰일오일은 세계 석유 시장의 지형을 바꿈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심어줌으로써 심리적 지형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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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3일 0시 45분 바그다드 국제공항에 내린 솔레이마니가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미군의 무인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차에 명중했고, 솔레이마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차에는 솔레이마니 사령관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로 그동안 민병대를 이끌고 ISIS와 싸워왔던 카타이브 헤즈볼라 사령관도 있었으나 그 또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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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레이마니는 사망했지만 유가는 오르긴 커녕 오히려 몇 주간 폭락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2003년 이후 새롭게 증가한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40퍼센트를 담당해온 중국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35. 사우디아라비아의 새로운 행보 =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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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S,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참석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1979년에 시작된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온건한 이슬람교”의 본산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자신의 뜻을 좀 더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그는 이렇게 약속했다. “우리는 극단주의자들을 물리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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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정계와 재계를 이끌고 있으며 전현직 장관들이 포함된 200명 이상의 왕족들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고, 새로운 시작을 부르짖었던 바로 그 리츠-칼튼 호텔에 구금된 것이다.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누가 진짜 권력을 쥐고 있는지는 이 사태로 확인되었다. 압둘아지즈, 혹은 이븐 사우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초대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이후 지금까지는 국왕의 여러 나이든 아들들이 차례로 왕자에 올라 이 나라를 지배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중에서도 이븐 사우드 국왕의 25번째 아들인 현 살만 국왕과 그의 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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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분야에서 MBS는 개혁 그 이상을 약속하는 이른바 ‘비전 2030’을 발표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는 지나치게 석유에만 의존하고 있고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제 분야를 다각화하여 좀 더 경쟁력 있고 또 최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들의 활동을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422
정부가 오일 머니를 거둬들여 공평하게 재분배하는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른바 국가가 주도하는 부유한 ‘복지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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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경쟁력 있고 혁신적이며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기업들이 참여하는, 한층 다각화된 경제를 통해 지금보다 훨씬 더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하나되는 것이 목표였다. 우선은 서둘러 젊은 청년 세대에게 일자리 및 사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극단주의나 반정부 성향에 빠지는 걸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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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시작된 석유 가격의 폭락과 함께 우연찮게도 “이미 석유 수요는 정점에 도달했다,”라는 말과 함께 석유 제품 수용의 미래에 대한 전 세계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 이런 논의는 기후 변화 관련 정책과 연료 효율성이 크게 높아진 운송 수단이 등장하면서 덩구 급박하게 전개되었는데 특히 한 세기 만에 부활한, 석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전기자동차의 새롱누 탄생이 가장 큰 화두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마 꽤 오랫동안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석유가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는 국가인 데다 계속해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석유를 생산해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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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 시작된 시대를 넘어선 이후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제약이 조금씩 느슨해짐에 따라 이 나라는 민족주의와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가 자체를 더 중시하는 정체성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2005년 압둘라 국왕은 이슬람교와 무관한 국경일 제정을 반대하는 성직자들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기념일을 지정해 발표했다.
1971년 영국이 페르시아만의 주둔군을 철수시키면서 만들어진 아부다비는 UAE를 이루고 있는 일곱 개 토후국 중 하나로 사실상 UAE를 대표한다. 아부다비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며 세계화된 섹ㅖ 경제를 상징하는 국제적 도시 국가인 두바이다.
UAE는 나라 자체가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석유가 발견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의 교역망 중 일부를 담당했으며 지금은 세계화와 개방의 상징으로 더 많이 인용되고 있다. UAE는 어쩌면 전 세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관용과 허용을 담당하는 부처를 정부 내각에 둔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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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부터 아부다비를 통치해왔으며 1971년 UAE의 설립을 주도한 자이드 알 나흐얀 국왕은 UAE가 언제까지나 석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왔으며 이러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 국부 펀드인 아부다비 투자 위원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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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선 과제는 민간 부문에서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해 정부 지출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고용 구조 자체는 이 문제와 관련된 어려움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자리는 있지만 대부분이 정부와 관련되어 있고, 민간 부문의 일자리들은 보통 임금이 낮고 매력도도 떨어진다. 따라서 이런 일자리들의 대부분은 단기 체류를 하는 ‘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채워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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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노동 계급은 둘로 나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체 인구는 3000만 명을 헤아리지만 그중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는 2000만 명이고 나머지 1000만 명은 모두 외국인이다. 그런데 고용 시장을 보면 직장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는 450만 명에 불과하고 그중 70퍼센트는 정부에 고용되어 있다. 반면에 외국인은 800만 명 이상이 민간 부문의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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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개혁은 계속되겠지만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여파로 더 이상의 국제적인 찬사와 호응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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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아람코는 사우디아라비아 경제의 원동력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한 곳이다. 국영화과 완료된 1980년대 이후 사우디 아람코의 지분은 온전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석유 기업 아람코와 관련된 모든 부문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미국이나 영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대학 출신의 기술자 및 과학자 들이 포진되어 있어 석유 산업 기술의 최전선으로도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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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는 앞으로 투자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빈 살만 왕세자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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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9년 12월 11일, 훨씬 규모가 작은 리야드 주식 시장에서 기업공개와 함께 상장이 결정되었다. 상장된 사우디 아람코 지분은 전체의 1.5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상장 당일 294억 달러로 거래가 마감되며 중국 알리바바의 기록을 뛰어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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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문제가 되는 건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다. 석유도 아니고, 또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나 지리도 아무 상관없다. 진짜 문제는 ‘누가 메카와 메디나를 손에 넣고 있는가’다. 전 세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그 두 성지니 말이다.”
5장 또 다른 지도들
37. 내연차 대 전기차 = 458
459
전기자동차는 세계 자동차 산업에 있어 실존적 문제가 되었다.
자동차 전체는 전 세계 석유 수요의 35퍼센트를, 일반 승용차는 20퍼센트를 담당한다. 앞으로 사람들은 석유의 힘으로 이동하게 될까, 아니면 전기의 힘으로 이동하게 될까? 그 답에 따라 수십억 명의 이동 방식은 물론 지정학적 문제, 일자리, 국가 경제 및 세계 경제도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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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배터리로 움직이는 전기자동차를 지지하는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1900년 무렵만 해도 뉴욕 거리에는 휘발유 자동차보다 전기자동차의 수가 더 많았고, 무엇보다 위대한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같은 막강한 영향력의 후원자가 전기자동차의 미래를 확신하고 지지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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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전기자동차가 다시 등장하게 된 건 199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부터다. 그 이유는 매연과 공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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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과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북부 캘리포니아의 괴짜들이 모여 전기자동차를 다시 한 번 세상에 선보이려 애쓰게 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회사 이름을 전기 기술의 선구자였던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에서 가져와 테슬라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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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테슬라는 마침내 시범용으로 2인승 스포츠카 두 대를 제작해 세상에 선보였다.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멋진 모습의 테슬라 로드스터 1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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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 방식의 한계 때문에 전기자동차는 때로 EV가 아닌 ‘EEV(Emissions Elsewhere Vehicles)’, 즉 ‘다른 곳에서 탄소 가스를 배출하는 자동차’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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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중국은 자동차 시장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규모 시장으로 올라섰으며 양국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중국 당국은 2025년부터 자국에서 새로 팔리는 자동차의 20퍼센트는 모두 ‘신에너지 자동차’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주요 전기자동차 개발 계획’의 책임자가 된 데 이어 과학기술부 장관에 오른 완광은 중국의 전기자동차 혁명을 이끌게 된다. “전기자동차 개발을 위한 전략적 창구가 마련될 테니 이제 행동에 들어가야 할 때다.”
중국의 목표
- 대기오염 수준 낮추기
- 에너지 안보 확립
-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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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중국의 입장에서 기존의 내연기관 자동차로는 시장에서 유명 대기업들을 따라잡기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전기자동차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이며 아직 이 분야에서 뚜렷이 앞서나가는 경쟁자는 하나도 없다.
중국은 이미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리튬 배터리의 4분의 3을 생산하고 있으며 전기자동차는 중국이 추진 중인, 전기 교통망이라는 더 커다란 계획에 딱 들어맞는 출발 지점이다.
신에너지 자동차 계획은 중국의 정부 주도 산업 전략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다. 중국은 구매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소비자 중심형’ 모형을 제조 업체들의 생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방식의 ‘생산자 중심형’ 모형으로 바꿔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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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거대 도시에서는 주민이 추첨을 통해 오직 한 대의 차량만을 소유할 수 있어서, 예컨대 베이징의 경우엔 성공 확률이 907대 1에 불과할 뿐 아니라 추첨에서 뽑혀도 자동차 가격 외에 1만 3000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있으니, 바로 전기자동차 구매자는 추첨을 거칠 필요가 없는 데다 별도 수수료 없이 자동차를 구매하는 대로 바로 등록해 정식 소유주가 될 수 있다는 게 그것이다.
2019년 중국에서는 거의 100만 대에 달하는 전기자동차가 판매되었다. 이는 새로 판매되는 전체 차량의 4퍼센트에 해당함과 동시에 전 세계에서 판매된 전기자동차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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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의 대중화를 좌우할 또 다른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배터리다. “현재 전기자동차 사업의 확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배터리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테슬라의 스트라우벨이 한 말이다.
그저 운행거리로만 계산을 하면 전기자동차의 유지비가 내연기관 자동차의 유지비보다 적게 나오지만, 전기자동차는 사실 연료에 드는 비용보다 전력 보관에 드는 비용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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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수단과 관련된 MIT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2030년은 지나야 전기자동차와 내연기관 자동차가 비용 면에서 어느 정도 경쟁이 가능해질 것이라 한다.
38. 무인자동차 시대를 위한 경쟁 =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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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치열했고 경쟁자들의 목표 또한 각기 달랐으나 자율주행 자동차의 개념과 관련해서는 그래도 최소한 몇 가지 합의된 기준들이 있었다. 미국 자동차 기술자 협회에서는 몇 가지 단계를 두어 자동화의 수준을 정했다. 0~3단계.
39. 미래를 호출하라 =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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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유의 자가용을 가져와 돈을 버는’ 사업 모델이 구체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버 운전기사들 중 60퍼센트는 이미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며 이들의 이런 근로 형태는 이른바 ‘긱 경제’ 혹은 ‘임시직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우버와 리프트 모두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비슷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현대적 방식의 차량 공유 사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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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장은 이러한 자동차 관련 사업을 하기에 적격인 곳이다. 인구 1000명당 자동차가 미국은 867대인 반면 중국은 160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개인이 차를 소유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 상하이의 경우 교통체증 때문에 자동차 한 대를 소유하고 정식 등록하는 비용이 차 가격보다 비쌀 때가 많다. 어렵사리 차를 갖고 나면 그 다음에는 주차장이 충분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합쳐진 덕에 차량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의 차를 이용하는 사업이 중국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디디추싱, 서양-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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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사업 모델은 완전히 새로운 사업과 새로운 생활 방식, 즉 ‘서비스로서의 이동 수단’에게 그 자리를 완전히 내줄 것이다. 차를 구입하고 차고에 넣어두었다가 출근을 하고, 다시 주차장에 세워둔 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루 24시간 중 5 혹은 10퍼센트밖에 차를 활용하지 못하는 방식이다. 이제 사람들은 차를 전혀 소유하지 않고 그 대신 필요할 때마다 돈을 내고 이동 수단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40. 새로운 자동차 관련 기술을 기다리며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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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전기자동차와 빌려 쓰고 공유하는 서비스로서의 이동 수단인 자동차, 그리고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자동차라는 새로운 ‘삼총사’가 정말 말 그대로 하나로 뭉칠지는 지금으로서 전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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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 자동차 기술과 차량 공유 사업이 하나로 합쳐지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제적 문제다. 차량 임대나 공유에서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부분은 운전기사다.
6장 기후 지도
41. 에너지 전환과 기후 변화 문제 = 528
528
저탄소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고 지도를 만드는 건 향후 수십 년간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인간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 변화 문제는 지난 40여 년간 심각한 연구 주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기후문제에 대해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좀 더 최근의 일로, 대형 삼림화재나 가뭄, 집중 호우, 해안 침수, 혹서, 빙하 감소, 그리고 태풍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재해들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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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전환은 새로운 개념이 아닐 뿐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 진행되어왔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에너지 전환은 주로 기술과 경제, 환경 문제에 대한 고려, 그리고 편이성과 용이성 문제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현재는 정치와 정책, 그리고 시민 활동 등이 더 많이 뒤섞여 있다.
최초의 에너지 전환은 13세기 영국에서 나무 대신 석탄을 때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첫 번째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기억해둘 만한 때가 있다면, 1709년 1월일 것이다. 석탄이 나무 장작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산업용 원료가 된 때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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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체코 출신의 과학자 바츨라프 스밀의 지적처럼, “심지어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증기기관도 등장했지만 19세기의 주요 연료는 석탄이 아니라 여전히 장작과 숯, 그리고 농작물 찌꺼기였다.” 1900년까지도 석탄은 전 세계 에너지 수요의 절반 정도밖에 채워주지 못했다. 석유의 경우 1859년에 펜실베이니아 북서부에서 처음 발견되었지만, 거의 한 세기 이상이 지난 196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전 세계 에너지 자원 중에서 석탄을 대신하는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석탄은 소비가 계속 늘어나면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천연가스의 소비량은 전 세계적으로 2000년 이후 60퍼센트 가량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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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기후 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국제연합 산하 기관인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보고서 덕분이었다.
2007년 IPCC는 네 번째 보고서를 통해 이전보다 훨씬 더 단정적인 결론, 즉 기후 변화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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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발표된 IPCC의 다섯 번째 보고서에는 가장 냉정하고 단정적인 내용이 실렸다. “인간이 기후 체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현재 배출되는 온실 가스의 규모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다. 최근 발생하는 기후 변화는 인간과 생태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 온난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으며 1950년대 이후 관찰되어온 여러 변화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현상들이다.”
2015년 11월 말 파리 북쪽의 르 부르제에서는 파리 기후 회의, 혹은 국제연합 COP 21로 알려지게 된느 회의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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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채택한 건 단순한 조약이 아니라 이번 세기안에 지구의 기온이 산업화 시대 이전과 비교해 섭씨 2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그리고 가능하다면 1.5도 미만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서로의 약속에 가까웠다.
42. 파리 협정 이후의 세계를 위하여 = 543
543
이제 기후 문제는 여러 국가에서 최우선 정책 과제로 부상했다. G20국가들 중 14개국은 탄소 가격제 혹은 탄소세와 비슷한 정책의 시행을 발표했거나 또 할 예정에 있다. 영국은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합법적으로 이룩하겠다고 천명했으며 20여 개에 이르는 다른 국가들도 비록 구체적인 방법은 대개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와 유사한 약속을 했다.
유럽은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파리 협정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나갈 길을 모색 중이고, 이런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는 데 있어 역시 어떤 지역보다 더욱 정부 정책의 힘을 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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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원 연구소의 설명에 따르면 ‘탄소 순배출 제로’는 ‘탄소 배출 제로’와 조금 다르다. 탄소 순배출은 ‘인간이 원인이 되는 배출량’을 최소화해서 ‘가능한 한 제로에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 외에 남아 있는’ 탄소 가스는 삼림 복구 혹은 탄소 포집 등을 통해 ‘제거’한다. 다시 말해 탄소 가스가 배출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배출된 가스는 어떤 방법을 써서든 다시 포집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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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현 시점에서 ‘탄소 순배출 제로’에 들어갈 비용이 얼마나 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피터슨 국제경제학 연구소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후 중립 경제로의 전환이 경제성장에 도움을 줄지 아니면 피해를 줄지는 그 규모에 달려 있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닥쳐올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적다.” 장기적으로 보면 탈탄소 경제로의 전환에 우리의 미래와 번영이 달려 있다면서도, 향후 5년에서 10년 동안은 “탈탄소 경제로의 전환은 결국 경제적 성장 가능성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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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하느라 수조 달러나 파운드, 혹은 유로에 달하는 부채가 생겨난 이후에도 과연 각국 정부에는 에너지 전환을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남게 될까?
43. 대체 에너지에서 주류 에너지로 =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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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볼 때 전 세계적으로 태양광 발전량이 늘어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태양광 전지를 만드는 중국 업체들의 생산과잉으로 재생가능 에너지 연구 조직인 REN이 “깜짝 놀랄 만한 가격”이라 할 만큼 가격이 폭락하여 이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재생가능에너지를 통한 전력 생산을 위해 각 국가의 중앙 정부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 지급하는 보조금 및 지원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46. 다양한 에너지 자원의 시대 =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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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몇 년 동안 이산화탄소와 온실 가스 문제는 에너지의 생산과 운송, 소비, 전략과 투자, 기술과 시반 시설, 그리고 각 국가 간 관계의 방식에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기존 기업들은 적응력을 시험받을 테고 신생 업체들은 자신들의 사업 모델을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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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 현재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 발전소는 더 이상 건설되지 않으며 기존의 화력 발전소 가동도 줄여가고 있다. 그런데 눈을 전 세계로 돌리면 상황은 조금 다르다.
아시아는 효율이 좀 더 좋은 화력 발전소 건설과 함께 석탄 소비를 크게 늘리는 방향으로 들어섰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석탄의 사용이 줄어들고 있는지는 몰라도 규모 면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중국과 인도에선 석탄이 에너지 자우너으로서뿐 아니라 일자리 창출과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부에서는 “석유 생산의 정점” 이후 “석유의 종말”이 가까워질 테고 세계는 “석유 고갈”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이제 논점은 “수요의 정점”이 다가오는 시기로 넘어갔다. 과연 석유 소비는 언제쯤 최고점에 도달한 뒤 다시 줄어들기 시작할까?
579
그렇지만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는 사실 선진국과 큰 관련이 없다.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의 경우 미국에서 흘러나오는 건 전체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않는다. 90퍼센트 이상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열개 대형 강줄기를 따라 무분별하게 버려져 바다까지 흘러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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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나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은 현대 사회에서 없어선 안 되는 소재다.
“석유화학 제품은 현대 의료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미국 보건학회지>에 실린 글의 일부다.
“제약용 원료와 시약의 99퍼센트가 석유를 이용한 일종의 석유화학 제품이다.” 코로나19의 유행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보건용 마스크 또한 그렇다.
584
지난 10년간 성장세를 이어온 셰일오일이나 천연가스 산업은 미국 경제 전체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제조업 입장에서도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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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천연가스는 계속해서 충분한 생산량을 과시하겠지만 그간 정신없이 성장해온 셰일오일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계속해서 주요 석유 생산국으로 남을 테고 코로나19 위기로 줄어든 생산량도 다시 회복하겠지만, 그 밖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하루 1300만 배럴에 달했떤 2002년 2월의 최고 생산량을 다시 기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들은 더 높은 에너지 가격과 직면할 것이며, 보다 친환경적인 에너지라는 목표는 자본의 가치라는 목표와 상출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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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수출국들에게 있어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장은 늘 순환할 것이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왔고, 석유 수출국들은 비록 2020년 같은 사태는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늘 변동성에 직면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적은 수익을 올리는 시대를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더 큰 혼란 및 정치적 불안정함 속에서 긴축과 더 낮은 경제성장이 계속될 것이란 뜻인데, 그렇게 되면 석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진다.
587
태양광과 풍력 발전, 전기자동차는 시장의 규모가 커질수록 필요로 하는 토지는 물론 광물도 늘어나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대규모 개발’이 따라줘야 한다.
588
전력 문제를 둘러싼 경쟁과 세계화 개념의 세분화, 그리고 생산 및 공급 과정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지정학적 문제는 지금까지 에너지 문제와 관련해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새로운 에너지 문제의 일부가 될 것이다.
결론 : 불안한 미래 = 589
589
세계 경제는 인터넷과 그 어느 때보다도 비용이 적게 드는 상호 교류, 진보한 운송 수단, 자본과 기술, 지식, 그리고 인간의 흐름에 의해 점점 더 하나로 연결되었고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하는, 보다 협력적인 세계 질서를 향해 더 힘차게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모든 상황은 ‘세계화’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설명되었고, 이 세계화의 과정을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은 에너지 자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움직임이 지금은 오히려 역행 중이다. 민족주의와 선동, 불신, 국가 간의 경쟁이 부활하고 의심과 분노의 정치가 부상하면서 세계는 점점 더 분열하고 있다. 세계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더 분열되고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이미 어려움에 봉착한 경제성장의 진로에 또 다른 문제들을 더해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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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세계 질서가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는 두 나라 사이에선 앞서 언급했던 갈등과 충돌이 장차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며 각자의 차이점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광범위한 연결 고리는 둘을 계속해서 하나로 엮어주고 있다. 성장하고 있는 세계 경제, 분쟁 회피 등에서 공동의 이해관계와 공통점을 가짐에도 양국의 불화는 점점 커져간다. 두 나라 사이의 연결 고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압박을 받고 있으며 갈등의 골도 깊어져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결과는 덩샤오핑이 했던 일국양제라는 말을 살짝 비튼 ‘하나의 지구, 두 개의 체제’쯤이 되지 않을까. 기술과 인터넷, 금융, 상업적 관계에서는 특히 그렇게 될 것이다. ‘WTO 합의’는 늘어만 가는 불신과 ‘각국의 경쟁’, 최첨단 기술 전쟁 및 ‘전략적 경쟁 관계’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 모든 상황들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