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저자사항건축 생산 역사 / 박인석 지음 ; 일러스트: 임지수
박인석[1959-] 임지수
발행사항서울 : 마티, 2022
형태사항3책 : 삽화(일부천연색), 지도, 초상 ; 23 cm
주기사항참고문헌과 색인 수록 내용:
1. 고대-중세 고대의 단절과 고딕 전통의 형성 — 2. 르네상스-혁명기 만들어진 전통: 고전주의의 성립과 붕괴 — 3. 19세기 말-오늘 더 나은 세상을 향하여: 모더니즘 건축의 항로
표준번호/부호ISBN 9791190853323 (1) 94540: ₩24000
ISBN 9791190853330 (2) 94540: ₩26000
ISBN 9791190853347 (3) 94540: ₩28000
ISBN 9791190853316 (set)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540.09 듀이십진분류법-> 720.9
주제명건축사(역사)[建築史]
목차차
10 제국의 시대와 근대 건축의 태동 (1875~1914)
2차 산업혁명: 생산기술의 발전과 유토피아 전망 / 독점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퇴조 / 사회민주주의 전망의 확산 / 제국의 시대 / 대중산업사회와 예술 생산 /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딜레마 / 주관적 형식주의 미학 / 구체제 양식의 성행과 철 구조물의 약진 / 아방가르드 건축 운동의 태동 / 미술공예 운동과 아르누보 / 미학적 원리로서의 실용성 / 독일공작연맹과 즉물주의 / 미국 건축의 공예주의와 기능주의 / 아돌프 로스: 산업시대 양식으로서의 순수 형태 / 수공예에서 기계 미학으로: 사회 개혁적 실천에서 ‘예술 상품 생산’으로 / 건축 역사학의 성립 / 철근콘크리트의 등장 / 하우징, 도시계획, 유토피아
11 양차 대전과 근대 건축의 확산 (1914~1945)
제1차 세계대전과 구체제의 몰락 /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에서 주류로 / 유럽의 표현주의와 러시아 구축주의 / 조형사회주의로서의 구축주의 / 산업주의 진보 이념과 모더니즘 건축 / 바우하우스 / 역사주의 건축의 지속과 모더니즘 건축의 양적 성장 / 노동자를 위한 집합주택과 유토피아 / 미국에서의 주거 건축과 근린주구론 / 경제공황, 수정자본주의, 전체주의 / 전체주의의 모더니즘 비판과 억압 / 미국으로 간 모더니즘 / 사회적 실천과 유리된 근대 건축
12 황금시대, 그리고 근대 건축의 시대 (1945~1972)
자본주의의 황금기 / 포드주의 유토피아 / 도시공간의 변용 / 포드주의 건축 생산과 국제주의 양식 / 공공임대주택 건축 / 공공 건축 전성시대 / 모더니즘 예술에서 아방가르드의 소멸 / 모더니즘 예술과 건축의 딜레마 / 건축 담론의 진전: 건축 형태에서 도시공간의 형태로 / 복지국가와 개인 기반 시민사회 / 근대 체계의 동요 / 새로운 건축·도시 담론들 / 퇴행적 유토피아
13 1973년 이후의 건축 생산
황금시대의 종언과 신자유주의 / 세계화와 정보화 / 포스트포드주의와 탈산업사회 / 후기구조주의와 신사회 운동 /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의 예술과 문화 / 포스트모더니즘과 ‘더 나은 사회’ / 도시공간 생산으로서의 건축 생산 / 주거 건축에서 도시공간 대응 태도 변화 / 새로운 형태 미학의 도발과 모더니즘 건축 형태의 지속
보론 현대 건축과 사회적 실천
맺음말 건축 생산 역사의 변곡점들
머리말
왜 ‘건축 생산 역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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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역사화하라!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구대로, 어떤 텍스트나 담론을 읽는 일에는 ‘역사적’ 관점이 필수적이다. 그것을 독립된 사실이나 명제가 아니라 당시 여건 속에서, 지배관계를 포함한 정치-경제적 혹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상대적이고 조건 의존적인 ‘역사적 구성물’로 읽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사료적 기술이든 이를 둘러싼 담론이든 누군가 사료를 ‘선택’하고 ‘해석’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 역시 특정한 정치-경제적 계급과 관계 속에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건축의 작동 요인을 해석하고 실천 논리를 탐색하는 데에는 서양 건축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불가결하다. 그리고 이때의 ‘이해’는 당대 서양 사회 상황 속에서의 이해, 즉 ‘역사적인’ 이해이어야 함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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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건축 상황에 대해 논구하는 작업도 있다. 그러나 그 작업들 대부분에는 서양의 건축 역사-담론을 당연히 수용해야 할 교본으로 전제하는 태도가 깔려있다.
서양의 건축 역사학은 18~19세기에 성립한 근대 역사학의 한 줄기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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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은 서양 건축 역사- 담론 자체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의적이고 편파적이라는 사실까지를 포함하여 그것이 생산되고 성립된 경위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역사적인’ 관점은 자못 구조주의적인 궁지를 극복하려는 각성과 실천까지를 포함한다. 어떤 상황을 ‘역사적으로 인식하겠다’는 언명 자체가 자신이 이미-항상 상황 종속적 상태에 있다는 ‘각성’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남는 것은 구조주의적 결정론뿐이고 구조 자체를 벗어나려는 힘과 실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각성과 실천이 바로 이 책이 딛고 서 있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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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서양 건축의 형태적 특징이나 그것들에 부여되어온 ‘의미’가 아니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그들의 건축 역사-담론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위로 성립하였는가, 다시 말해서 누가, 어떤 건축을, 어떤 담론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생산’하였는가를 이해하는 일이다.
근대 역사학은, 세계 역사는 유럽 근대 부르주아 세계를 정점으로 발전해왔다는 역사 발전 이념을 전제로 한다. 이를 예술 역사에 기계적으로 대응시켜서 예술 역시 자신들의 시대와 체제를 정점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 근대 예술사학이고 그 분파로 성립한 것이 근대 건축사학이다. 서양 건축 역사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역사 서술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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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건축 지식인들이 놓지 못하고 연연해 마지않는 소위 ‘건축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시대마다 사회마다 건축에 부여되어온 ‘매번 다른’ 의미체계일 것이다.
서양 건축 담론에서 ‘건축의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양 거론되곤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지배 세력이 그것을 ‘본질’인 양 권력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양 건축 역사-담론을 건축의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체계’를 담고 있거나 표상하는 것으로 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요컨대 서양 건축 역사 속에 등장하는 건축 담론이나 이론은 절대적 진리도 아니고 지고한 이론도 아니다. 당시 건축 생산 여건 속에서, 지배관계를 포함한 사회관계 속에서, 생산-성립된 담론일 뿐이다. 예를 들어, 고전주의 건축 규범은 재료(석재) 조건 아래 ‘크기-비례-재료 강도’ 관계 속에서 생산-성립된 규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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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서양 건축 담론을 살피는 것은, 그것을 따르기 위함이 아니라, 서양 건축 담론이 물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성립하고 변화해왔는가를 살피고 이를 우리 상황과 견주어 참조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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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역사나 이론 등 건축계 내부의 지식이나 내향적 담론을 겨냥한 작업은 별로 없었다. 이는 나의 ‘전공 분야’가 대중의 삶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루된 주거 건축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0 제국의 시대와 근대 건축의 태동 (1875~1914)
2차 산업혁명: 생산기술의 발전과 유토피아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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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관리 기법에 의한 생산 합리화와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이 가세했다. 흔히 2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생산 방식의 혁신은 생산량을 엄청나게 증대시켰고,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국한된 얘기지만, 시민들의 생활 양식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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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자동차가 보여준 기술의 위력은 1945년 이후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상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는 포드주의로 이념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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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기술과 기계의 발전이 불러올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이 만연했다. 자유주의자에게든 사회주의자에게든 생산력의 발전은 역사의 필연이었고, 그것이 가져올 이익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에 대한 입장은 달랐지만 그 효과에 대한 기대는 같았다.
독점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퇴조
성장 가도를 달리던 서구는 1873년부터 10여 년간 장기불황을 겪는다.
…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시장 확보를 위한 식민지 쟁탈에 박차를 가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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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쯤부터는 서구 경제는 다시 호황으로 들어섰다. … 남북전쟁 이후 상공업 발전 정책을 본격화한 미국과 1871년 통일한 독일제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약진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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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선거제도를 필두로 한 민주주의의 진전 역시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딜레마에 빠트렸다.
이제까지 진보하는 역사의 주체임을 표방하며 자유와 평등을 주장해온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는 자유, 평등 이념의 확산을 거부할 명분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 대중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져갔다.
진보 진영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가운데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의 일부는 방어적 보수주의와 우파적 민족주의, 애국주의로 갈라지며 변질되어갔다. 이들은 당시 만연했던 인종차별주의와 맥을 같이하며 폭력과 본능, 급기야 전쟁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사회민주주의 전망의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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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빈 체제에 항의)을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이끈 사회주의 세력은 혁명 후 정치체제 구성에서 배척된 이후 대중적 노동운동을 이끌며 세를 확장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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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에서 노동자 계급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1824년 영국에서 처음 합법화된 노동조합은 …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노동자 계급과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에 대응하여 복지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독일제국 정부의 의료보험(1883), 산재보험(1884), 노령연금(1889) 등의 사회보장 입법이 대표적이다.
복지 정책이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혁명주의에서 개량주의로 온건화하는 경향이 뚜렸해졌다.
혁명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정부와 고용주들로부터 당장 긴급한 개선, 개혁 과제들을 쟁취해내는 것을 목표로 하자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다수를 차지했다. Ex.영국의 페이비언협회 -> 노동당
제2당 독일사회민주당 -> 수정주의, 1차 세계대전 이후 즉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의 선회를 공식화함.
제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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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당을 기원으로 하는 보수당(1834년 창당)과 휘그당이 주축이 된 자유당(1850년 창당)의 양당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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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쟁탈 등 제국주의적 발전의 절정기로서 경제적 번영과 평화 속에 초등교육 무상화 및 공립학교 제도화, 정교분리, 노동자 단결권 및 결사의 자유 보장 등 강력한 사회 개혁이 진행된 시기였다.
… 낙관주의가 주조였으나, 세기말 염세주의도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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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왕국은 … 1850년대부터 급속한 산업 발전과 … 이어 1870년에는 독일 통일에 걸림돌이었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1871년에는 남부 독일을 포함한 통일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 강력한 자유주의 개혁과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고, … 1900년경에는 영국을 제치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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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진보의 전망이 어두워지는 듯한 정치, 경제 환경에서 생성된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19세기 말 빈에서는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문화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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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예술 운동의 주요한 줄기 중 하나인 빈 분리파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7년 결성되었다.
신생 부르주아 공화국 미합중국은, 북부의 상공업세력과 남부의 기업농 세력 간 내전인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난 후 공업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양대 자유주의 정당인 공화당과 민주당이 사회주의 정치 세력의 부재 속에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1900년쯤에는 영국과 독일을 앞지르며 세계 최대 공업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뉴욕과 시카고에서 일었던 초고층 건축 붐은 이러한 미국의 경제력이 표출된 것이었다.
대중산업사회와 예술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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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 20세기 초는 서구 사회가 철학, 건축, 음악, 문학 등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생산적이 창조적인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이 시대 예술의 번영을 뒷받침한 것은 무엇보다도 팽창하는 경제와 더불어 탄생한 ‘대중’이었다.
중류 계급의 성장
문화예술 수요의 판도를 앞시대와 전혀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은 경제, 사회, 정치적 지위가 크게 향상된 노동자 계급이었다.
임금, 여가시간, 의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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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 현상들 등장.
신문 잡지 발행 부수 기하급수적 증가
백화점 등장
대중시장이 출현.
저렴한 가격과 대량공급이 필요.
-> 대중 소설과 복제 회화의 유행, 광고 포스터의 범람
-> 음악에서는 대규모 오페라와 더 대중적인 오페라티가 성행.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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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상인들은 대중의 탄생에 환호했지만 정치철학자들과 엘리트 부르주아들은 근심이 깊어져갔다. … 우민정치populism에 대한 우려. 민주주의 이념에 비춘다면 대중 민주주의는 지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치철학과 거시, 미시 경제이론에 입각해야 하는 국가 운영이 무지한 대중에 의한 선거에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은 당장의 근심거리를 넘어 미래에 대한 비관을 낳을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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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예술은 딜레마에 빠졌다. 복제 가능성이 낮고 서사적 표현에서도 한계가 명확했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개인 소장품으로서의 예술품’이었던 회화예술은 대중의 시대와는 본질적으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였다.
… 1888년 창립한 미국 코닥의 자동사진기
대중의 수요에 다가갈 수 없는 예술은 필연적으로 엘리트 집단 주변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대중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자위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져들기 십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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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파, 미래주의, 추상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회화 아방가르드는 주관주의와 엘리트주의 속에서 표현 형식을 탐구하고 실험한 과정이었다.
이들에게는 … 문화 상징이 필요,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 여기에 적격이었던 것.
대중사회의 출현으로 회화예술의 생산 수용체계가 변화한 것도 주관주의를 가능케 한 토대였다. … 예술가 입장에서는 예술품 구입자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사라지고 ‘익명의 다수 구매자’를 상대로 작품을미리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부 엘리트 예술가
… 대중과 괴리되었고 점점 자의식에 파묻힌 엘리트주의의 길을 걸었다.
주관적 형식주의 미학
그것이 새로운 표현 양식으로까지 성립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사정이 작용했다…
‘객관적 진리체계 개념의 변화’
르네상스시대 이래 전통적인 고전주의 예술은 절대적 진리이자 질서의 구현체인 자연을 모방, 제현하는 것을 예술의 원리이자 규범으로 삼아왔다.
물론… 이데아였지만, 인간의 눈에 비춰진, 즉 ‘지각된’ 형태를 이상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은 ‘지각된 세계’에 기반한 진리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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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라고 해도 가시적 세계를 재현의 대상으로 삼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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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의 능력과 이에 의한 역사의 진보를 신뢰하는 ‘근대적’ 예술가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곤경이었을 뿐 아니라 회화예술 자체의 위기라고도 할 만한 상황이었다.
우선적인 딜레마는 ‘객관적 실체를 눈으로 볼 수 없다면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응답은 본질적 구조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예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는 예술 의욕을 ‘감정이업 충동’과 ‘추상 충동’으로 구분하고, 추상 충동을 “사물의 절대적 가치에 다가가려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추상예술의 논리적 근거를제시했다. 이 테제가 “예술의 과제는 ‘무질서하고 다양해 보이는 자연세계의 모습에서 본질적 특성과 구조를 추출해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논리로 연결된 것이다.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
-그는 추상을 부정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하려는, 그것의 절대적 가치에 가까이 가려는 충동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20세기 초 유럽 추상미술을 정당화하는 유력한 논리로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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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딜레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 구조를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
칸토어의 무한집한론(1869~79)은 수학이라는 엄밀한 과학에서조차 새로운 발상에 의해 새로운 진리가 구축됨을 보였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과학자의 직관에 의해 ‘발명’된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에드문트 후설, 논리연구 – “세상의 사물을 (기존 이념에 따라 구성하려 하지 말고) 현상 그대로 포착하고, 그 본질을 선험적 순수의식, 즉 직관에 의하여 파악, 기술한다” 고 씀으로써 ‘직관’을 철학적 사유 방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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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객체의 본질적 구조를 예술가의 직관(주관)으로 포착한다’는 주관주의 미학의 명제가 가능해진 것은 이렇듯 과학과 철학에서 제기된 새로운 패러다임에 힘입은 것이었다.
주관적 탐색의 종착역은 ‘재현 대사인 객체의 제거’였다. … 순수한 회화적 요소에 대한 천착이었다.
소통이 곤란하다는 문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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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진보를 선취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처했다. “다가올 세상의 본질적 표현”은 아직 대중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 칸딘스키의 정신의 삼각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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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진리’를 전제로 성립했던 진보 개념이 ‘주관적 표현’의 합리화에 인용된 아이러니한 사태였다.
-> 헤겔이 제시한 변증법적 발전론이 전제하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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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고급예술 시장에서 새로운 예술 작품들이 큰 어려움 없이 팔렸다는 것이 모든 문제를 무마했다. 이러한 허술한 엘리트주의는 20세기 후반에 가서야 전복된다.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동시대 건축 예술가들과도 공유했다.
건축은 회화예술과 달리 애초부터 ‘지각된 세계’와 재현이 아니라 ‘건축의 본질적 질서’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건축은 산업 자체가 커지고 있었고, 도시 대중으로부터 이전에 없던 과제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사회적 필요에 따라 철이라는 강한 재료를 수용함으로써 그에 맞는 건축 형식을 찾느라 씨름하던 중이었다.
… 현실 경제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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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건축물 … 사회적 권위를 갖는 건축 규범은 약화되고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아카데미 건축가들의 사변적 기율은 민간 시장이 커지면서 영향력을 잃어갔고,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시류에 영합하는 절충주의적 분위기가 강해졌다.
… 절충주의 양식의 유행화
한편에서는 새로운 건축 재료(철)와 새로운 건축기술에 의한 새로운 건축물 생산이 약진했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파리 박람회 기념탑으로 건설된 기계관과 에펠탑은 1851년 런던 박람회 수정궁에 이어 새로운 건축 생산의 시대를 알리는 기념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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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철 건축이 고층 건축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일구고 있었다. 엘리샤 그레이브스 오티스는 1857년 뉴욕 하우어트 빌딩에서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처음 실용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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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시카고를 중심으로 발전한 고층 건축은 철 구조와 결합하면서 경제성장을 상징하듯 들불처럼 확산되었다.
건축과 장식의 형태에서는 진보하는 사회에 걸맞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구체제 양식이 묻어났다. 밀려드는 공학기술의 성과 앞에서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더욱 보수적으로 과거 양식을 고수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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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용도와 공간과 기술에 걸맞은 건축 형태와 그것을 지지하는 원리를 찾는 일은, 고급 예술 분야에서도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의해 한 귀퉁이에서 진행되고 있었을 뿐이다.
아방가르드 건축 운동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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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양적인 번영에도 불구하고 복고적 장식 취미에 영합한 절충주의를 버리지 못한 채 ‘개인의 자유로운 이성적 능력을 기초로 진보하는 사회’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찾지 못했다.
중세주의와 연결된 고딕주의가 비판적 실마리를 제시했지만, 이 역시 복고주의로서 ‘이성과 진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이 전적으로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회화에서는 이러한 고민 속에서 인상주의와 점묘화라는 새로운 표현을 찾아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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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노선이 고전주의 규범의 권위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새로운 재료와 기술의 활용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열였다면, 중세주의 및 수공예 운동은 현실 비판과 사회 변혁을 이끌 실천 담론을 형성하는 한편 수공예를 기반으로 한 표현 원리를 구체화했다.
미술공예 운동과 아르누보
윌리엄 모리스가 이끈 중세주의적 공예 운동 … 노동 소외, 현실을 비판하고 반자본주의적 사회 변혁을 지향했다.
하지만 수공예품은 가격이 비쌌고, 공예 운동은 부자들의 기호품을 조달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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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더비, 프라이어 등 노먼 쇼 사무실 출신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예술 노동자 길드’가 결성되었다. 이들의 설계는 재료에서 도출된 형태, 이론에 따른 대칭 구성이 아니라 기능에 따른 평면 구성, 지역 재료의 정직한 사용, 외부 환경과 연결된 건물, 중요한 부분에만 절제된 장식 사용, 상징성보다는 기능에 맞는 역사적 양식 요소 채택 등 당시 대다수 건축가와 중류 계급 건축주들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따랐다.
미술공예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눈에 띄는 공통된 흐름은 역사적 형태요소의 배제와 기성 예술 규범의 탈피였다.
‘윌리엄 모리스 평전’을 쓴 박홍규는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위기에 선 인간의 손, 또는 단순한 숙련 노동이나 기교적 노동과 구별되는, 감정을 담은 일의 가치에 대한 집착”이 이 운동의 동기였다고 지적하면서, 이 운동이 단순히 조형예술 분야에 국한된 활동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을 사회나 환경 전체와 관련시키려 했던 거대한 디자인 운동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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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로 생산된 상품의 질이 낮았다는 것도 미술공예 운동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유기적인 형태 … 돌과 달리 구부리고 휘어 형태를 만들기 쉬운 재료인 철은 이러한 형태 표현에 적합한 것이기도 했다. 자연, 젊음, 성장, 운동의 은유라고 일컬어지는 식물 형태와 곡선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나라별로 전개된 예술 운동이었던 만큼 그 명칭도 다양했다. 프랑스에서는 1895년 새로운 예술품 판매점인 메종 드 아르누보가 문을 열면서 ‘아르누보’라는 이름이 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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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예술가들의 탐구는 대부분 부자들을 위한 예술품과 건축물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미학적 원리로서의 실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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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의 예술적 표현은 식물 형태나 곡선 등에 기초하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당시 기계로 생산할 수 없는 형태를 통해 ‘예술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훼손하는 기계 생산 상품 세계에 저항’한다는 의도를 갖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설득력 있는 ‘형태 원리’가 필요했고, 아르누보가 찾은 답은 ‘실용성’과 ‘기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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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 운동은 ‘기능’과 ‘재료 물성의 표현’을 형태 표현의 준거로 삼는 모더니즘의 시작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수공예운동과 마찬가지로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예술과 노동, 예술과 생활의 관계 복원을 지향했다.
중세주의-고딕주의-수공예주의 예술가들이 앞서서 일군 윤리적 형태 규범, 즉 ‘재료와 구조의 솔직한 표현’이라는 중요한 이념적 자산이 더해져서 작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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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젬퍼의 “예술은 필요에 의해서만 지배된다”는 경구를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 바그너에게 ‘필요’란 효율성, 경제성, 기업활동의 촉진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대 건축>(1896)
“실용적이지 않은 것은 아름다울 수 없다.” “건축가는 항상 실제 시공으로부터 예술-형태를 도출해야 한다”로 진전되었다.
아르누보 예술가 모임(1897년)
-빈 분리파 <- 바그너도 참여.
분리파는 1897년에 빈 미술가협회 부속 미술관인 퀸스틀러하우스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발해 결성되었다. 1898년에 열린 분리파 첫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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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격한 기하학과 추상적인 장식을 지향했다. 바그너, 올브러히, 호프만의 건축 역시 그러했다.
점차 그들 건축의 특징이었던 아르누보적 장식이 줄어들었다.
독일공작연맹과 즉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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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작소가 다분히 모리스의 공방과 유사한 수공예적 생산을 지향했다면, 1907년 뮌헨에서 설립된 독일공작연맹은 새로운 디자인을 산업 생산과 연결시키려 했다. 건축가 및 디자이너 12명과 12개 기업으로 이루어진 독일공작연맹 … 국가 지원 아래 결성된 조직이었다. 즉, 대량생산기술에 공예를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 ‘소파 쿠션에서 도시 건설까지’라는 슬로건이 이를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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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기능, 단순, 절제, 그리고 재료에의 정직함을 발견했다. 그(무테지우스)는 저서 ‘양식적 건축과 건축의 예술’에서 이를 ‘과학적 즉물성’이라고 지칭했다.
그에게 즉물성이란 “일체의 피상적, 장식적 형태 없이 작업이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엄격히 따르는 디자인”이었다. 즉, 모든 관습적인 것을 배제하고 … 건축물 자체가 갖는 기능과 그것을 만드는 데 사용된 재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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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작연맹에서 활동했던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은 이후에도 ‘신즉물성’을 기치로 실용성과 목적성을 건축의 주요 목표로 내세우기도 했다.
-독일공작연맹은 1938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미국 건축의 공예주의와 기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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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홉슨 리처드슨(1836~86)은 미국에서 미술공예주의적 건축을 일군 선구자였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리처드슨의 단독주택 설계를 진전시켜서 … 중류 계급 교외 주택을 대상으로 자유로운 평면과 미국의 자연에 결합한 설계를 보여주었다.
리처드슨을 수공예주의 맥락으로 진전시킨 이가 라이트라면, 실용성과 기능주의로 나아가게 한 이는 단크마어 아들러와 루이스 설리번으로 대표되는 고층건물 건축가들이었다.
시카고. 1871년 대화재. -> ‘시카고파’ 건축 그룹. 고층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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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기능과 구조의 솔직한 표현이 아름다운 설계의 조건이라고 주장한 설리번의 경구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에 동조하는 기능주의 건축이라 할 만한 것들이었다.
아돌프 로스: 산업시대 양식으로서의 순수 형태
아돌프 로스(1870~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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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는 미술공예 운동의 실용적 형태에 공감하고 장식을 철저히 배제한 건축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빈 분리파나 독일공작연맹과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또한 이를 기계 생산과 연결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독일공작연맹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빈 분리파와 독일공작연맹의 이념과 작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로스는 예술가가 상징적 의미를 더해 형태를 빚은 ‘예술품’과 기능적인 사용이 목적인 ‘제품(그리고 건물)’을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이 아닌 제품과 건물은 그 시대의 기술과 재료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양식을 갖게 된다. ‘이 시대에 적합한 양식을 만들어내겠다’거나 ‘예술의 개입을 통해 제품 디자인의 질을 높이겠다’고 선언한 분리파와 독일공작연맹은 문제가 있었다.
결국 상징과 장식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산업의 발전과 이성의 진보를 방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로스는 강하게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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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식을 제거하고 기술적, 경제적 합리성만이 지고의 가치인 순수 형태를 지향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로스의 태도는 당대 건축 담론계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수공예에서 기계 미학으로: 사회 개혁적 실천에서 ‘예술 상품 생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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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 역사주의 장식이 유행했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첫째는 ‘새로운 예술 형식의 확립’
‘제품 생산에서의 정신적 가치 회복’, ‘창조적 노동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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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미술공예 운동은 수공예 생산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진짜 과제는 따로 있었다. 두 과제를 해결하면서 제품의 대량생산을 배격하는 것은 곤란했다.
중심에 기계에 대한 대량생산이 자리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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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성 미학에 대한 공감대는 있었으나 표준화-대량생산을 위해 개인적 창조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머뭇거렸다. 그들은 결국 기계로는 생산할 수 없는 ‘예술적 상품’을 고수했던 것이다.
독일공작연맹 <-> 무테지우스, 아돌프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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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 제품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다시 기계 미학, 즉 ‘기계는 아름답다’는 사고로까지 진전되었다.
로스는 <유리와 점토>(1898)
& <문화의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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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기술-형태 합치 가능성에 주목했던 구조합리주의자들이 봉착했고 끝내 넘어서지 못했던 딜레마도 바로 그것이었다. 구조합리주의를 밀고 나가면 철 건축 자체의 비례와 형태를 아름답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고전주의적 예술성 개념을 버릴 수 없었고 공학기술자들의 산업용 건축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20세기 기계 미학은 그 선을 넘어섰다.
결국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 ‘기계는 아름답다(아름다워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그러나 두 번째 과제, 창조적 노동의 회복 문제는 여전히 딜레마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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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딜레마에 무테지우스는 불철저하게 대처한다. 그는 창조적 노동 테제를 ‘대중이 질 높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향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테제로 대체했다. ‘노동 과정’의 문제를 ‘노동 결과물의 향유’ 문제로 대체한 것이다.
로스는 … 즉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것들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스는 ‘아름다움’은 별도의 원리에 따라 정해지는 형태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대적 생산 방식과 기술에 따라 자연히 형성된다고 주장한 셈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예술과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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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승자는 로스보다는 무테지우스 쪽이었다. 이후 바우하우스에서 보듯이 예술가들의 창조적 디자인 직능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었다.
무테지우스류의 엘리트주의적 타협으로는 두번째 과제인 ‘창조적 노동의 회복’을 해결할 수 없었다. 추상회화가 그랬듯이 이는 모더니즘 미학과 예술 일반의 행로이기도 했다.
결국 ‘수공예에서 기계 미학으로’ 진행된 아방가르드는 예술에 의한 진보적 사회 개혁 논리가 예술가에 의한 상품의 부가가치 제고 논리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건축 역사학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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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적 이념에서는 헤겔을, 과학적 역사 기술 방법에서는 랑케를 정점으로 19세기에 성립한 근대 역사학의 패러다임은 이내 독자적 분야로 분기한 예술사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때의 예술사(history of architecture)가 미술사에서 다시 분기하여 독자적인 영역이 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건축사>(1856~75) 의 저자인 프란츠 테어도어 쿠글러와 야콥 부르크하르트, 빌헬름 륄케는 모두 예술사학자였다.
근대 역사학과 예술사를 모태로 한 것인만큼 건축 역사는 근대 역사학이 정초한 역사 발전 이념을 기반으로 기술되었다.
<비교연구법에 의한 건축 역사>의 저자 배니스터 플레처의 -건축 나무-
… 당시 서양 역사학이 공유하던 발전사관을 건축적 판본으로 요약한 것.
-> 2019년 21차 개정판 <베니스터 플레처경의 세계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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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건축을 원류로 한 몸통 줄기만이 로마 건축과 로마네스크를 거쳐 유럽 각국의 건축으로 분기하며 전개된다. .. 건축 나무 꼭대기에 미국 근대 건축 줄기가 추가됨으로써 세계 건축 역사가 미국 근대 건축을 향해 발전해간 것으로 그려졌다.
1899년 <건축사> 저술한 프랑스의 오귀스트 슈아지
-> 건축 역사를 구축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며, 건축 양식의 발전은 태동-성숙-쇠퇴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역사 결정주의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 미국에서는 러셀 스터지스 <유럽 건축: 역사적 연구>
… 이들 19세기 말 건축사 저술들에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로마-초기 기독교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의 시대 구분 역시 이때 이루어졌다.
철근콘크리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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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건축 생산의 판도는 다시 한번 뒤집혔다. 더 강한 건축 재료인 철근콘크리트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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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에 석회 모르타르나 천연 시멘트에 비해 균질하고 강도가 높은 포틀랜드 시멘트가 개발 … 1890년대에 사용 원칙이 체계화되었다.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은 빠르게 철에서 철근콘크리트로 넘어갔다. 오귀스트 페레(1874~1954)는 철근콘크리트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대표적 건축가였다.
페레의 건축이 골조 거푸집의 반복 사용에 의한 경제성과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구축 주제로 삼는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였다면, 로베르 마야르가 아치 구조로 지은 슈타우파허 다리 … 철근콘크리트의 가소성과 형태 표현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사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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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에서는 수많은 대형 공공건물이 노출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졌다. 르 코르뷔지에가 주택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한 표준적 모듈 구조체로 제안한 도미노 주택 역시 철근콘크리트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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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건축은 고전주의 건축과 고딕 건축의 전통적 비례감을 대체할 수 없었기에 ‘예술성 표현에 부적절한’ 것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제 어떤 형태이든 철근콘크리트로 빚어낼 수 있게 되었다. 서양 건축 형태 규범의 물적 기반이었던 조적조(석조, 벽돌조)가 철근콘크리트로 바뀐 것이다.
남아 있던 구축 기술-형태의 일관성이라는 실체마저 잃은 채 순전히 정신적인 표상으로만 남을 운명이었다.
하우징, 도시계획, 유토피아
19세기 초 로버트 오언 … 노동자 임대주택 건설이 … 정부 정책으로 채택..
정부가 직접 임대주택을 건설하여 공급하는 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대에 가서야 보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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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C 건축가들이 건설한 첫 번째 사업인 바운더리 주거지(1893~1900), 밀 뱅크 주거지, …
LCC 건축가들은 미술공예 운동의 어휘를 사용하여 건축과 기예의 통합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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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환경의 개혁은 비단 노동자 계급을 위해서만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늘어나는 중류 계급 역시 공업기지가 되어버린 도심에서 벗어난 쾌적한 주거환경을 찾고 있었고 이는 민간 개발업자들에 의한 도시외곽 주거지 개발로 이어졌다.
당시 대도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도시의 무질서한 확장(sprawl)의 한 단면이었다.
도시는 팽창하는 인구와 산업 활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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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니저 하워드(1850~1928)가 1898년 발표한 <내일, 진정한 개혁을 향한 평화로운 길>에서 발표한 전원도시론(Garden City)
사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개진했던 내용으로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정부 예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실제로 전원도시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투자계획을 상술했으며, 직접 전원도시 개발에 나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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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치워스 건설 -> 성공
이의 성공은 영국은 물론 유럽 및 세계 각국에 전원도시 운동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이렇게 개발된 전원도시 대부분은 주택 가격과 임대료가 비싸서 저소득 노동자 계급보다는 중류 계급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토니 가르니에가 1901년 제안한 공업도시모델
사유재산 폐지를 통한 유토피아 건설을 주장한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이론을 채용하여,
중정을 공유하는 공동주택
…
아르누보 등 예술 운동과는 달리 국가나 지방정부 차원의 경제 정책과 도시 정책이 전제되어야 실현될 수 있었다. 도시는 이제 가장 중요한 경제기구가 되었으며 도시공간은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재편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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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워드나 가르니에 등의 작업은 지배 계급(부르주아)의 선의(사회 개혁 이념)에 의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도시 형성을 꿈꾼 유토피아적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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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중위생법(1848) … 주거의 질적 수준을 규제하는 것으로 시작한 국가의 대응은 점차 도시의 팽창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계획 시스템의 제도화로 진전되었다.
1891년 프랑크푸르트 시정부는 Zoning제도를 최초로 입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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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리버풀대학에 최초로 도시계획 과정이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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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국에서는 건축-도시적 차원의 사회 개혁이 도시미화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질 높고 아름다운 도시공간이 시민의 도덕과 이성 능력을 고취하는 토대이며 이를 통해 사회 질서와 삶의 질을 고양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유럽의 이전 구상이 사회 자원의 배분과 연결된 기획이었던 반면에, 미국의 도시미화 운동은 … 형태주의적 기획이었다.
발단은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 대니얼 버넘이 이끈 시카고 건축가들은 절충적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들로 백색 도시를 조성.
1902년 워싱턴 D.C. 맥밀란 계획 등
기념비적 공공 건축 및 도시공간 조성 계획이 추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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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미화 운동의 확산은 미국의 상업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상업자본은 도시공간의 미화를 통한 도시 경쟁력 강화와 부동산 가치 상승을 기대하면서, 건설자본은 대규모 건축사업 기회를 기대하면서 이 흐름에 가담했다.
하지만 도시 토지 이용의 경제적 효율성이 점점 중요해지는 추세 속에서 형태주의가 주도하는 도시계획이 지속될 수는 없었다.
조닝에 의한 토지 이용의 체계적 관리, 합리적인 교통계획 등 기능주의적 도시계획 기법과 제도가 발전했다.
1909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1차 전국 도시계획회의에서 형태주의적 도시계획 비판 가세.
같은 해에 하버드대학 도시계획 과정 신설, 1917년 미국 도시계획학회가 설립.
11 양차 대전과 근대 건축의 확산 (1914~1945)
제1차 세계대전과 구체제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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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는 러시아혁명이 성공
사회주의 국가 탄생
사회주의 진영은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으로 차르체제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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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엄청난 살육과 파괴는 유럽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지난 2백 년간 그토록 신봉해왔던 인간 이성과 과학기술이 유토피아를 향한 진보보다는 인명살상 기술과 무기 개발을 위해 사용되었다는 참담함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럽 사회는 이성과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를 접지 않았고 산업 발전에 의한 진보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뢰와 열망이 옳다는 것을 예증하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참담했던 전쟁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발전한 과학기술과 생산력을 합리적으로 운용하지 못한 구체제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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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 군주제와 결합한 자유주의 자본주의는 몰락했고, 이를 의회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대체했다. …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가 시작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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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 바이마르헌법이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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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좌파 정권 아래 구체제에 뿌리를 둔 보수적인 정부, 관료 조직부터 급진좌파인 독일공산당까지 다양한 세력이 병존한 바이마르공화국은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러시아 구축주의가 유럽으로 확산되는 경유지가 되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각국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이 추진. 공공임대주택 건설 정책이 활발하게 추진됨.
한쪽에서는 사회주의 확산을 우려하는 보수파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결집함.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에서 주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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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1910년 쯤에는 이미 상당한 수요층을 갖는 유력한 예술사조의 하나로 성장해 있었다.
미술에서는 입체파, 표현주의, 미래파, 순수추상화 등이, 음악에서는 조성을 거부한 무조음악이, 문학에서는 전통적 줄거리 구성과 단절하고 독백과 의식의 흐름 등에 주목하는 글쓰기 방식이 탐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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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이것들은 아직 소수 엘리트 예술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 대중은 여전히 고전주의, 절충주의 등 과거의 양식을 더 선호하고 인정했다.
모더니즘 예술의 영향력은 종전 이후 급격히 확대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더욱 특별한 지위를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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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즉물주의와 기능주의가 복합된 것이 주류적 지위 확립. 신즉물주의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예술계를 둘러싼 주관적 표현주의에 반발하여 형성된 예술적 태도. 회화예술에서는 즉물적 대상 파악을 통한 실재감 회복을 추구. 오토 딕스 중심으로 한 비판과 연결. 문학에서는 사실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기법 유행.
기능주의란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실용적으로 활용
산업기술과 예술의 통일을 주창했던 무테지우스의 테제가 모더니즘 건축 규범 아래 구현될 참이었다.
유럽의 표현주의와 러시아 구축주의
서유럽 예술계에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우세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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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에 취리히의 망명자 집단 속에서 태동했던 다다이즘은 보다 직설적으로 세계대전을 초래한 사회를 빈정댔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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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진영은 구체제를 전복한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 형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역사주의 진영은 혁명 조국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
소련 정부는 1918년 모스크바 자유국가 예술 작업실을 설립. 1920년에는 브후테마스로 전환. 이는 “산업에 필요한 최고 수준의 예술가와 디자이너, 직업 기술 교육 관리자들을 양성”한다는 레닌의 강령에 따라 설립된 기관.
최초의 근대적 예술 디자인 교육기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1920년 예술 연구단체 인후크를 조직.(칸딘스키가 초대 대표자)
1920년대에 브후테마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러시아 구축주의 건축과 담론은 서유럽 모더니즘 건축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20년 12월 개최된 제8차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네셔널 기념탑 계획안이 전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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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후테마스와 인후크를 거점으로 전개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탐구는 새로운 사회에서의 예술의 역할과 표현 형식에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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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예술가 개별성’과 ‘표준화-대량생산’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면, 소비에트에스는 ‘합리적-체계적 조형 원리’의 중점을 ‘미학적 효과’에 두느냐 ‘물질 생산에서의 예술의 역할’ 두느냐를 두고 대립했다.
1921년 1~3월에 인후크 예술가들은 연이은 회의를 거치며 구성과 구축의 차이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구성을 지지하는 쪽에게 공간과 형태는 예술로서의 건축이 갖는 독자성과 정신적인 측면을 전제하고 탐구해야 할 작업이었다. 반면에 구축을 강조하는 쪽은 형태를 생산하는 좀 더 체계적인 방법, 즉 개인적 창작으로부터 탈피하여 합리적이고 구조적인 엄밀성을 갖는 구축의 논리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구축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과학과 기술로써 제작하는 합리적 활동인 반면에, 구성적인 예술은 사회적 필요와는 관계없는(예술 자체가 목적인) 예술가의 자의적이고 개별적인 취향일 뿐이라고 규정되었다.
구축의 비판 : ‘구성은 과잉과 낭비라는 부르주아적 향락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통해 ‘구축’ 노선을 지향한 ‘생산예술’ 진영이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들은 ‘예술의 모든 실험은 기술과 공학에 기초해 유기적인 조직과 구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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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주의는 조형사회주의라 할 만한 이념이었다.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다는 슬로건 아래 예술표현 형식의 기본 요소였던 색채, 선, 볼륨, 매스 등이 배제되었다.
대신에 그들은 세계를 이루는 물질 자체의 본성에 천착했다.
구축주의 제1작업그룹의 1922년 강령에서 ‘텍터닉, 팍투라, 구축’이라는 세 개념을 언급.
“구축주의자 그룹의 과제는 물질적 구조들의 공산주의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이다.”
조형사회주의로서의 구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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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주의 건축가들이 기계 미학적 양식화에 경도된 데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 긴즈부르크는 자신의 저서 ‘양식과 시대’에서 “건축가는 더 이상 삶을 장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조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썼다. .. 1925년 이들은 현대건축가동맹을 결성. -> 그러나 큰 차이를 보이진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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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주의자들)
그들은 건축을 ‘사회적 응축기’라고 불렀다. 사회적 응축기는 생활방식을 변형시키는 일종의 기계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인 예전의 인간을 사회주의적인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시키는 기계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구축주의 건축가들의 설계가 실제 건축으로 구현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구축주의 건축가들의 설계를 실현하기에 소비에트 산업 생산 수준이 너무 낮았고, 구축주의 건축이 소련 사회의 주류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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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과 대립하던 예술가 조직의 기세도 등등.
레온 트로츠키 등 주요 정부 관료들과 붉은 군대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던 혁명러시아예술협회가 대표적. 사실주의를 표방.
브후테마스는 존립했던 짧은 기간에 통일된 원칙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우하우스와는 대조적으로 이질적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교육 방법과 내용에 대한 합일점을 찾지 못했다. 브후테마스에서 건축을 가르치던 사람들 중 진정한 구축주의자들은 소수였다.
머지않아 구축주의 건축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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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과 예술의 결합을 목표로 삼기는 마찬가지였던 독일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19세기 후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독일의 산업과 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고, 산업체들 역시 예술의 유용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산업주의 진보 이념과 모더니즘 건축
142
1917년 잡지 <데 스테일>을 중심으로 네덜란드에서 테오 판 두스뷔르흐 주도로 결성된 비공식 예술 운동 그룹 데 스테일이 대표적이었다.
개인을 초월한 보편적 양식을 지향.
계급을 구별 짓는 접근이나 세련미를 내세우는 개인주의적 접근 일체를 반대.
143
조형예술에서 그것은 “순수한 예술적 표현”, 즉 순수 추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스스로는 주관성에 탐닉하면서 그 결과는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모순이 내재했다.
그러나 이 모순은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에 의한 진보’라는 유토피아 이념을 통해 무마되었다.
145
레이너 배넘 <제1기계사태의 이론과 디자인>에서 “1920년대 국제주의-기능주의 건축은 기술에 기초한 건축이 아니라 기계와 기술에 대한 상징과 이상을 표현한 아카데미즘 건축”
146
1923년쯤부터 독일 예술계에서는 전쟁 후 주류를 점했던 … 표현주의를 비판하며 … 신즉물주의가 확산. 회화예술에는 게오르게 그로스, 오토 딕스 등을 중심으로 구상적 회화, 사진에서는 사실 기록적 사진이, 연극에서는 개인적 표현주의를 반대하며 협력적 공동 창작을 지향하는 브레히트식 공동주의가 출현. 음악에서는 실용음악을 추구.
147
회화와 달리 본질적으로 비구상인 건축에서 신즉물주의는 당시의 표현주의 건축을 비판하며 기능주의 및 재료 기술의 솔직한 표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48
1920년대 서유럽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관심은 기술-산업주의와 기계 미학을 향한 흐름으로 합류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이 모든 흐름이 모여든 곳이 바우하우스였다.
149
그로피우스는 1923년 구축주의를 지지하며 … 바우하우스의 교육 과정 역시 합리적 디자인을 강조하며 실생활용 공업 제품을 디자인하는 쪽으로 재구성되었다. ‘대량생산되는 제품을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게 만들어, 대중이 질 높고 아름다운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독일공작연맹의 목표가 한편으로는 러시아 구축주의의 조형 원리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공업 발전에 자극 받는 산업주의적 진보 이념으로 재무장했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역사주의 건축의 지속과 모더니즘 건축의 양적 성장
152
바우하우스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1920년대에도 종래의 절충주의 건축은 여전히 많이 지어졌다.
미국의 초고층건물들 역시 시카고파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고딕 양식의 장식적 차용이 대세였다. 시카고파 기능주의 건축의 퇴조는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서 이미 확실해지고 있었다.
비평가 레이너 배넘이 기능주의 건축에 가한 혹평처럼, ‘미학의 혁신을 통해서가 상업적인 동기에서 비경제적인 것을 폐기하는 방식으로 우연히 얻어진 것’일 뿐임을 예증하는 에피소드였다.
1922년에 있었던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사옥 설계경기는 … 미국 건축에서의 승자는 역사주의 양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변화가 뚜렷해졌다.
1925년 파리에서 열린 장식미술 및 현대산업 박람회의 주제는 현대적 양식의 장식 미술과 건축이었다.
‘현대적’이고 ‘산업 생산과 연결된’ 예술을 지향하며 개최된 전시회에서 주인공은 단연 ‘현대적’ 장식 양식인 아르데코 양식이었다. 건축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멜리니코프의 소비에트관과 르 코르뷔지에의 레스프리누보관이 구축주의와 합리주의의 존재를 알렸다.
159
192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독일공작연맹 전시회 일환으로 조성된 바이센호프 주거지에서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베렌스, 오우트, 타우트 등 모더니즘 건축가 17명이 각자의 주거 건축을 선보였다.
건축가들의 서로 다른 작품들 속에서 일관되게 구현된 합리주의적 형태는 대중에게 모더니즘 건축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르데코 : 아르누보의 한 계열로 191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조형 양식이다.
164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공업이 발달해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카탈루냐 아르누보, 즉 모데르니스메에 반대하여 주로 복고적 고전주의를 지향하던 누센티스메의 보수적 분위기에 따라 박람회 주요 건물인 국립 궁전이 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는 등 역사주의가 박람회장을 장악했다.
이 와중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독일관이 바우하우스 합리주의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듬해인 1930년에 개최된 스톡홀름 전시회는 정반대로 합리주의가 지배한 전시회였다.
165
스톡홀름 전시회는 스웨덴에서 모더니즘 건축이 주류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를 위한 집합주택과 유토피아
165
모더니즘 건축의 확산과 지위 상승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노동자용 주거 건축이었다. 영국 런던시가 1890년대부터 노동자용 임대주택을 직접 건설하여 공급하는 정책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 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자선단체 등이 기획한 사회주택 건설 자금을 정부가 보조해주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며 정부가 직접 임대주택을 건설하여 공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적 이후 좌파가 정권을 잡은 유럽 주요 도시들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도시 정책이 추진되면서 노동자 계급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건설, 공급이 핵심 정책으로 부상했다.
166
반면, ‘사회 개혁’과 ‘새로운 건축’을 강령으로 삼고 있던 진보적 모더니즘 건축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과업이었다.
오우트가 설계한 슈팡엔 지역 주거 블록(1918~1920)
그들에게 공공임대주택 건설은 진보하는 역사가 도달할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적 실천이었다.
172
공공임대주택 건축은 구축주의적이고 신즉물주의적인 ‘새로운 건축물’을 위한 실천의 장이기도 했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대규모 주거단지 개발과 공공임대주택 건축은 사회 개혁과 건축 미학, 도시공간 구조의 변혁 면에서 그야말로 모더니즘 건축 이념이 만개한, 유토피아를 향한 대향연이었다.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개인적인 활동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현대적 기술을 사용한 건축을 연구하여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한 경제적인 주택 건축 시스템인 도미노(1914)를 제시했다.
1918~22년에 르 코르뷔지에는 순수주의 이론과 회화에 집중했다. 1920년에는 <새로운 정신>을 창간하여 순수주의 건축과 예술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175
기술 진보에 의한 생산성 증가의 성과를 노동자에게 배분하는 사회체제를 지지했다. 자동차 산업을 필두로 한 미국의 대량생산체제가 그 모델로 제시되었다.
<새로운 정신>에 게재했던 글들을 모아 1923년 발간한 <건축을 향하여>에서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가다듬어나갔다.
그만큼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제안이었지만 도시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기에는 충분했다.
이후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도시계획에 대한 발상을 정리하여 1935년에 <빛나는 도시>라는 이름으로 출판한다.
177
르 코르뷔지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관 설계경기(1927)에서 우여곡절 끝에 낙선한 후 진보적인 건축가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현대건축국제회의(CIAM)의 설립을 이끌었다. CIAM의 주된 의제는 도시와 주거 건축이었다.
건축 생산과 도시계획의 기본 방향에 대한 생각을 담은 ‘라사라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1956년 제10차 회의에 이르기까지 CIAM에서는 주거 건축과 도시 및 지역계획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라사라 선언 – “그들을 여기에 한데 모은 목적은 건축을 본질적인 차원, 즉 경제적이고 사회학적인 차원으로 되돌림으로써 수발되는 요소들의 필수적이고 긴급한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은 과거의 전통적인 방식을 보존하려는 아카데미의 무익한 통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로 마무리되는 서문 아래 경제, 도시계획, 건축을 망라한 2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에서의 주거 건축과 근린주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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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자동차 시대가 열렸다. 이는 자동차가 달리기에 적합한 도로 건설에 연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도록 명시한 연방보조도로법(1916), 연방보조고속도로법(1921)에 의한 도로망 확장과 맞물리며 교외 주거지 개발 확산으로 이어졌다.
1920년대에는 미국 중산층들의 교외 단독주택 거주가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80
자동차 사고 위험이 높고 공동체로서의 마을 환경을 갖추지 못한 주거지가 늘어나는 데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켜졌고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은 ‘안전한 공동체적 환경이 마련된 마을계획’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 뉴욕의 미국지역계획협회의 활동과 이들이 주도한 뉴욕 퀸스의 전원도시 서니사이드 가든 등의 개발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클래런스 페리가 1923년 제안하고 1929년 <이웃의 단위, 가족-생활공동체를 위한 배치계획안>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논문이었다. 근린주구론이라고 현재 번역됨.
182
도로 (쿨데삭)
182
입주민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으로 노동자 계급 주거 문제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새로운 계획 개념과 더불어 주민의 자치규약으로 마을 공간과 시설을 공동 관리, 운영토록 하는 등의 조치들이 더해진 이례적 주거지로 주목받았다. … 공동체적 삶을 보전하려 한 ’20세기형 마을-기계’라 할 만한 것이었다.
경제공황, 수정자본주의, 전체주의
184
수정자본주의 정책과 블록경제체제가 1930년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택했던 노선이었다면, 또 하나의 노선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전체주의 정치체제에서 진행된 군수산업 확장과 침략 전쟁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이었다.
전체주의의 모더니즘 비판과 억압
187
유럽을 뒤덮은 전체주의는 모더니즘 건축의 거점이던 바우하우스에도 이르렀다.
190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 진행된 전체주의의 공통점은 민족주의, 반공산주의, 반자유주의였다.
19세기 말 주류였던 역사주의에 저항하며 등장한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은 1930년대에 파시스트의 압박으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되면서, 다시금 ‘억압받고 저항하는 예술’이 되었다. 파시스트들은 모더니즘 대신에 역사주의 양식 예술을 다시 소환했다.
191
미래파 이후 테라니 등의 합리주의자들 역시 적어도 1930년대 초반까지는 파시즘의 이상에 동조했다.
파시즘을 – 부르주아의 사회 질서에서 받은 상처와 절망에서 비롯한 – 민족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로 파악하는 입장에 따르면, 이탈리아 합리주의자들이 초기에 무솔리니 파시스트당에 동조한 것이 이해될 수 있다. 파시즘 주창자들은 초기에는 민족공동체를 지향하며 반자본주의-반부르주아 정서를 표출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부르주아 보수주의 세력과 타협하고 반자본주의 강령도 폐기했다.
193
구축주의 예술가들의 입지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예술은 국가가 통제하는 선전 수단이 되었다.
건축 분야에서도 구축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194
브후테마스는 1926년 브후테인(고등예술기술협회)으로 바뀌었다가 1930년 해산되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모더니즘 예술이 억압받자 예술가들은 이주를 택했다. 독일에서는 그로피우스와 마르셀 브로이어가 런던(1934)을 거쳐 미국(1937)으로, 멘델존은 런던(1933)-팔레스타인(1934)-미국(1941)으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1937)으로 이주했다.
미국으로 간 모더니즘
195
1930년대 미국 사회는 유럽과 전혀 달랐다. 미국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조차 공산주의라고 비판받을 만큼 사회주의 세력이 약하고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미국에서는 1930년 무렵까지도 아방가르드 건축이 부재하다시피 했다. 역사주의 양식 건축이 주류인 가운데 유럽 미술공예 운동의 영향을 받은 리처드슨의 공예주의적 건축과 이를 이은 시카고 건축가들의 기능주의 건축,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등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197
윌리엄 로버트 웨어가 1865년 미국 최초의 대학 건축 프로그램으로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에 건축학과를 개설한 이래로 미국의 건축교육은 대부분 에콜 데 보자르를 모델로 삼았다.
1930년대 초에 건축된 초고층건물인 크라이슬러 빌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록펠러 센터는 모두 아르데코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미국 건축계의 분위기는 193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최초의 건축 전시였던 ‘현대 건축’전이 개최되면서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전시를 기획한 헨리 러셀 히치콕과 필립 존슨은 전시회와 함께 <국제주의 양식: 1922년 이래의 건축>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히치콕과 존슨은 이 책에서 … 건축을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명명했다.
199
미국 내 건축 생산이 국제주의 양식으로 일컬어지는 유럽발 근대 건축으로 크게 기울어진 또 하나의 결정적 계기는, …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촉발한 대규모 주거지 생산이었다.
199
교외 신도시로 개발된 그린벨트(1935~37), 그린데일(36~38), 그린힐스(36~38)는 전원도시-근린주구론-레드번으로 이어진 유토피아적 주거지 계획 원리를 저렴한 2~4층 공동주택 판본으로 번안한 것이었다. … 볼드윈 힐스 주거지(1938~1941)
… 윌리엄스버그 주거단지가 성공을 거둔 이후 미국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은 ‘공원 속 고층 주거’ 교리를 따라 건축되었다.
201
한편에서는 건축계의 경외 속에 모더니즘 건축 미학이 지고한 예술의 반열에 진입하고 있었고, … 미국 건축계는 유럽 근대 건축가들을 극진히 우대했다.
사회적 실천과 유리된 근대 건축
206
수공예주의에서 비롯한 ‘실용성’과 ‘재료와 구조의 솔직한 표현’을 중시한 모더니즘 건축은 대중적인 미적 윤리로 진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1900~30년대에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에 의한 유토피아’이념과 결합하여 장식의 제거와 기계 미학을 추구하며 대중의 이해와 멀어진 엘리트주의로 나아갔고, 노동자의 삶에서 소외된 생산물이 되어갔다. 이때까지도 모더니즘 건축은 사회의 진보를 향한 개혁과 실천에 연결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 ‘개혁과 실천’은 건축 생산 과정과 형태 미학 자체의 내용과 형식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까지도 지배적 담론으로 잔존하던 구체제 역사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얻은 효과일 뿐이었다.
미국의 자유주의적 산업주의가 주도하는 사회 분위기와 팽창하는 경제는 모더니즘 예술과 건축이 사회 현실에 대한 고민과 실천과는 무관한 개인의 작업으로 변모하는 토양이 되었다.
207
사회적 실천과 유리된 근대 건축은 온전히 형식 미학적 차원에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내세우고 확인받으려 했다. 이 과업은 발전사관의 신봉자이자 철저한 근대 건축 옹호자였던 기디온에 의해 수행되었다.
건축은 더 이상 재현적인 파사드와 기념비적인 형태와 관련되지 않고, 구조 논리에 기반을 둔 새로운 관계를 디자인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 <공간, 시간, 건축>(1941)
… 역사가 진보하듯이 건축 역시 진보한다는 전제 아래 근대 건축이 도달한 건축 형식 원리상의 발전 단계를 찬미했다.
12 황금시대, 그리고 근대 건축의 시대 (1945~1972)
자본주의의 황금기
212
이 시기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약진을 이끈 것은 대량생산기술의 혁신으로 인한 생산력의 폭발이었다.
포드주의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방법론이자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포드주의의 핵심은 ‘기계에 의한 반복 생산이 가능하도록 표준화된 생산품’과 ‘비숙련 노동자들에 의한 분업이 가능한 조립 라인(컨베이어벨트)’이지만, 빠트릴 수 없는 또 하나의 핵심은 ‘노동자들에 대한 높은 임금 지불’이었다.
213
이 대목에서 포드주의는 단순한 ‘생산기술’ 차원을 넘어 사회의 작동 방식에 관여하는 ‘체제 이념’으로 격상된다.
실제로 이 시기에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고용 증가와 소득 수준 향상으로 중산층이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 대량생산 주택에서 거주하는 생활 양식이 보편화했다.
포드주의 유토피아
214
‘모든 정책을 국가가 주도하는 체계’가 등장했다. 시장경제를 존속하면서 정부가 경제 정책을 이끄는 이 체제는 종래의 경제적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적 국가주의가 결합한 ‘수정된’ 자본주의였다.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것 역시 각국 정부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제도를 강화하게 된 요인이었다.
215
요컨대 이 시대는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산력 발전이 역사의 진보를 이끌며 사회 전체에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만연했다.
풍요로운 시대였지만 공공 서비스 부족으로 상대적 불평등이 심해진 현실을 비판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1958)는, 이제 적절치 않아진 주류 경제학과 경제 정책을 대신해 인류 역사가 성취해낸 풍요를 다룰 새로운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풍요 예찬’에 가까웠다.
… 이들이 예찬한 ‘모든 이의 풍요’는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을 전제로 그 성과의 일부를 배분한 결과였고, … ‘대중의 상품 수요는 무한한 것’임을 전제해야만 지속 가능한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인 포드주의 유토피아의 이면이었다.
도시공간의 변용
217
지방정부가 나서서 주거지와 신도시를 개발한 유럽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민간기업이 상업적 목적으로 개발한 대규모 교외 주거지들이 조성되었다.
218
신도시 조성과 더불어 도시공간을 변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도시 재개발이었다.
19세기 도시 재개발이 공업 발전으로 증가한 교통량을 소화하고 상징 가로를 조성하려는 것이었다면, 1940~70년대 도시 재개발은 산업구조 변동에 대응하려는 것이었다.
포드주의 경제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상업,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도시는 공업이 아니라 상업, 금융, 경영관리의 중심지였다. 대도시 중심부 토지 수요와 건축 생산의 주체 역시 공업에서 서비스 업종으로 급속히 바뀌어갔다.
도시 중심부에는 대규모 상업시설과 사무실이 집중되었고, 여기에 종사하는 사무직 노동자들과 다시 이들의 일상적 소비활동을 서비스하는 하위 서비스산업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219
급기야 도시들이 이어지며 한 덩어리가 되는 메가폴리스, 즉 광역도시권이 형성되면서 자본의 공간적 집적이 극대화했다.
포드주의 건축 생산과 국제주의 양식
223
상업, 금융업이 창출하는 막대한 이윤은 부동산 개발 붐을 일으켰다. 상업용 건축 경쟁으로 형성된 땅값에 따라 생산할 건축물의 종류와 자리가 정해졌고 도시 형태가 만들어졌다.
건축 생산기술과 생산조직 또한 고도화되었다.
228
수익 목적의 이들 상업용 건축물이 필요로 하는 고밀도 토지 이용과 기능적인 공간구성이야말로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국제주의 양식이 지향하는 미학적 형태에 걸맞는 것이었다.
231
미스가 설계한 시그램빌딩은 모더니즘 건축 미학이 도시공간에 베푸는 배려를 예시했다. 미스는 대지 중앙부에 고층 타워를 배치해 도로 사선 제한을 피함으로써 고층 건축물의 미학을 완성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도심 한복판에 귀중한 오픈스페이스를 제공하는 효과를 연출했다.
1960년대에도 경제성장은 계속되었고, 바야흐로 초고층 건축 전성시대였다.
- 시그램 빌딩의 영향으로 1916년 뉴욕시는 ‘사유 공공공간’을 설치하는 건축물에 혜택을 주는 것으로 규제 내용을 개정했다.
공공임대주택 건축
23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됨에 따라 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고, 이것이 경제성장과 맞물리면서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공공임대주택과 공공건물 건축 생산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1920~1930년대에 유럽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이념이었던 ‘기계 미학 – 기계 생산, 합리적 비용, 건강한 오픈스페이스와 햇빛’이 결합된 ‘공원 속 고층 주거’가 그야말로 ‘국제주의’적인 해법으로 세계 각국에서 구현되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238
건물 하나가 곧 사회 기본 단위로서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구상이었다.
공공 건축 전성시대
243
경제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주거 건축 말고도 공공 건축 생산이 사상 유례가 없는 활황을 맞았다. 도시마다 시민들의 문화활동과 여가생활을 위한 문화센터, 미술관, 공연장, 스포츠시설들이 앞다투어 건축되었다.
246
공공청사 건축은 대부분 관료적 격식과 기념비적 형태 표현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민주적인 설계를 지향하는 작업들이 일부 진전했다. 지역의 재료를 쓰고 시민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알바 알토(1898~1976)의 세이나찰로 시민 센터(1949~52)는 이러한 면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업이다.
247
교회 건축은 현대 건축가들에게 하나의 시험대였다. 기계적이고 차가운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비판을 받아온 모더니즘이 사람들에게 신성함과 경건함을 일깨우는 공간과 형태를 만드는 과제에 도전하는 장이었다.
보크세니스카 교회, 롱샹 성당, 라 투레트 수도원 등.
252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활동은 유럽과 미국 밖에서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들(인도 고등법원, 브라질 국회의사당,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등)은 제3세계 국가들이 서구 선진국의 자본주의-국민국가 체제를 뒤좇아야 한다는 강박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공공 건축에 대한 투자를 가장 극적으로 표출한 것은 예른 웃손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일 것이다.
259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풍요한 경제성장을 구가한 황금시대였으며 모더니즘 건축이 만개한 시기였다. 만국의 양식이 된 모더니즘 건축이 자신의 주특기인 막강한 생산 능력을 발휘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선취하는 듯했다.
모더니즘 예술에서 아방가르드의 소멸
260
고급예술 분야가 이러한 ‘풍요 속 빈곤’을 겪게 된 데에는, 경제성장으로 팽창한 중하위 계층이 대상인 대중예술 시장이 고급예술 시장을 압도하는 규모로 커지면서 개인과 사회의 창조력을 흡수해버린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예술에 재능이 있는 인재들은 규범화된 틀 속에서 교육, 훈련을 받고 기득권 예술계의 인정과 평판을 얻어야 하는 고전적인 고급예술 분야보다는, 개인의 재능과 노력이 보다 빠르게 예술적 성취와 경제적 성공으로 연결되는 대중예술 분야에 모여들었다.
261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 모더니즘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예술이 진보를 이끄는 역할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전통적으로 고급예술에 부여되었던 사회적 위신을 빌미로 ‘엘리트 예술가’를 자처했다.
난해한 개념의 향연을 ‘그들만의 리그’로 지켜나갔다. 20세기 초 추상주의가 ‘인류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야 하는 예술가들의 소명을 내건 엘리트주의였다면, 50~60년대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은 진보의 노정을 달리고 있는 사회가 물질적 욕망에 묻혀 잃어버린 지 오래인 ‘정신적 가치의 본질과 정수’를 일깨우려는 듯한 엘리트주의였다.
이 시대의 엘리트주의 예술은 표현 형식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형식주의가 더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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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예술이 고급예술과 다른 점은 예술 생산의 동기가 예술가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대부분 기업의 이윤 증식에 있다는 것이다. 즉, 대중예술은 기업이 산업적으로 생산하는 문화 상품이었다.
상품과 상업 이미지들로 채워진, 리처드 해밀턴, 앤디 워홀, 로이 릭턴스타인 등 팝아트 예술가들의 회화는 상업 이미지가 예술을 압도하게 된 현실을 비판한 것이라기보다는, 대량생산 상품이 이룬 성취를 부정할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예술이 탐구해야 할 대상이 바뀌었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프레드릭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에 따르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모더니즘을 후기모더니즘으로 규정. 후기모더니즘은 1920년대 모더니즘 실험을 유효성이 검증된 기법의 저장고로 바꿔버린 채 더 이상 미학적 총체성을, 혹은 형태에 대한 체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변형 작업을 추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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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50~1960년대 보리스 비앙, 피트 시거, 밥 딜런 등의 사회저항 음악이 확산하면서, 대중예술이 사회 개혁적 지향에서도 고급예술보다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화 운동 누벨바그 역시 정해진 서사 구조에 관객들을 순응시키는 전통적 영화 규범과 관념적 보편주의에 반대했다.
예술에서 이 모든 새로운 태도가 대중성을 표방하며 등장했다는 사실은 ‘예술이 담고 있는 가치’보다 ‘대중의 선호’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키웠다.
모더니즘 예술과 건축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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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대중예술산업의 성장으로 고급예술 분야의 창조적 동력이 제한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기술 발전이 고도화하면서 진보하는 세계의 미래를 예술이 선취하기는커녕 따라가기에 급급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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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건축에 가장 치명적인 변화는 이제까지 시장 원리에 맡겨졌던 경제 문제가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체제하에서 정부의 계획에 맡겨지면서 도시계획의 주도권이 국가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즉, 도시공간을 계획하는 일이 건축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렸다.
만프레도 타푸리의 <건축 이데올로기의 비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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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으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산업세계의 변화를 따라가기에 급급할 뿐 진보를 이끄는 일은 언감생심이 되어버린 상황에 더해 계획의 영역도 잃어버린 것이다.
건축 담론의 진전: 건축 형태에서 도시공간의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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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의 영역, 즉 도시계획적 구상력을 박탈당한 건축에 남은 길은 팽창하는 시장 속에서 부동산개발의 수단이 되거나, 다른 예술 장르처럼 난해한 관념적 미학 담론으로 무장하며 고급예술 상품으로 통용되는 것이었다.
-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건축물의 기능적 요구를 직접 건축물의 형태로 전환하는 설계 방법을 찾으려는 움직임을 들 수 있다. 과학적 생산-경영관리 기법의 원리를 디자인 분야에까지 적용하려 한 것. -> pattern language, 1960년쯤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시작됨.
270
모더니즘 건축은 포드주의 경제의 팽창과 함께 폭증하는 도시개발 수요 속에서 활황을 구가했다. 그리고 비록 유토피아를 향해 세상을 리드하는 일은 무색해졌지만, 건축을 통해 만들어지는 생활공간의 형태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목표를 내걸 만한 개별적 노력들이 새로운 건축 실천 담론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었다. 예컨대 상업 건축에서는 시그램 빌딩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기업의 이윤 추구’와 ‘시민의 공공환경 향상’ 사이의 갈등을, 공공 건축에서는 세이나찰로 시민 센터나 보스턴 시청사 등에서 나타난 ‘지배 권력의 표상으로서의 건축’과 ‘시민의 접근과 사용을 우선하는 민주적 건축’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주거 건축에서는 ‘공급 효율 우선’과 ‘대중의 거주환경 향상’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려는 탐구들이 진행되었다.
한편에서는 도시공간 형태의 설계 -계획이 아니라- 문제가 불거졌다. 사실 19세기 이래 도시공간의 형태를 결정하는 이가 누구여야 하는지 불분명해졌다. 이전에는 건축 직능에 맡겨졌던 도시계획이 19세기 후반부터 점차 국가 주도 게획 시스템으로 넘어왔다. 국가가 관심을 두는 계획은 ‘토지 자원과 개발 밀도의 배분, 그리고 개발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 새로운 전문가 집단이 된 도시계획 직능은 여기에 집중했다. ‘형태’는 그것이 도시의 형태든 건축의 형태든 설계의 영역인데, 건축 직능이 도시계획을 멈추고 순전히 건축물만을 다루는 업역으로 축소되면서 ‘도시의 형태를 결정하는’ 영역은 공백 상태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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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도시공간 형태의 무질서에 대한 논란과 비판이 커져갔다. … 즉 설계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져갔다.
토지를 용도에 따라 분리하고 기능에 따른 건축 형태를 설계하는 근대 도시계획-건축설계체제는 포드주의 생산체제의 공간적 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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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기버드의 <타운 디자인>, 케빈 린치의 <도시의 이미지>, 고든 컬런의 <타운스케이프> 등 도시를 계획이 아니라 ‘설계’ 대상으로 접근하고 도시의 기능이 아니라 형태를 분석적으로 고찰하는 직업들이 등장했다.
… 도시형태학이 지리학의 유망한 분과로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59년 미국 하버드대학에 도시설계 교육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 도시공간이 다시금 건축 실천의 장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각별한 것이었다.
복지국가와 개인 기반 시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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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에 대한 식견을 갖추었으나 사회 지도층 지위에 오르지 못한 보통 중산층 시민’의 수가 증가한 것이다. 경제 팽창이 불러온 산업 및 계층구조의 질적 변화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사회와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이 시기에 시민사회의 성격이 개인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드주의와 수정자본주의가 결합한 복지자본주의 국가 체제가 낳은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중산 계층의 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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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얻어내던 ‘집단적 주체’가 이제 각 개인이 국가 복지정책을 소비하는 ‘개인 주체’가 된 것이다.
여성, 흑인 등 사회적 소수자 인권 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러한 토양에서였다.
1945년 이후 복지자본주의 국가체제는 노동자와 농민을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의 혜택을 받는 개별 시민으로 해체했다.
1960년대까지 이러한 복지국가체제 속에서 개인화가 진행되었다. 생활세계는 개인화되어갔지만 사회체계, 즉 법률, 정책 등은 개인을 아직 ‘집단에 속한 여럿 중 하나’로만 인식하는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근대 건축 역시 집단 중심 패러다임에 기초한 제도였다.
개개인은 기성 질서를 의심하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키워갔다. 1968년 프랑스에서 촉발된 68혁명은 이 ‘새로운 관점’이 불러올 변화를 예증하는 것이었다.
-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프레더릭 제임슨이 지적한 후기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적 개인들의 경쟁과 상품화 논리만이 작동하는 가장 순수한 자본주의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체계의 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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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성능력에 의해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한다’는 보편적 인간관과 단선적 진보관은 새로운 사고체계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정치경제적 권력 관계나 무의식이라는 외적 요인에 좌우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인식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실존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주체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찾는 구조주의로 진전되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보다 새로운 태도로서 좀 더 다채롭게 전개된 것은 구조주의였다. 1950~60년대 프랑스에서 성립한 구조주의의 원류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의 언어학이었다. 소쉬르 언어학의 핵심은 ‘언어는 그 자체로 내재적 의미를 갖지 않는 기호체계일 뿐이며,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는 사회체계 속에서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찻잔 속 태풍에 그쳤던 소쉬르의 언어학은 1950년대에 들어 서구 인식론을 뒤흔드는 구조주의로 전개된다. …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 … “인간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사회에 내재하는 구조적 질서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의 발전이 절대 진리를 향해 과학적 지식을 연속적으로 축적하는 과정이 아니라 정상과학이 지배하는 진리체계이자 사고체계인 패러다임이 시대별로 단속적으로 바뀌는 과정으로 진행되었음을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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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진리’인 과학적 지식을 잣대로 엘리트 지도층과 일반 민중을 가르고 선진 사회와 후진 사회를 기르던 근대 가치체계 자체를 흔드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 … 역시 진리의 상대성과 다원성이라는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에 구조주의를 접목하여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개인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에 의해 기존 질서로 편입된다)”고 주장한 자크 라캉(1902~81)의 담론이나, … “모든 개인은 지배체제의 생산관계(착취관계)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들(교육, 종교, 가족, 정치, 노동조합, 커뮤니케이션, 문화기구 등) 속에서 주체로 구성된다.”는 루이 알튀세르(1918~90)의 명제는 모두 이러한 새로운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 행동 양식, 가치체계는 사회의 체계와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 요컨대 인간은 사회체계에 의해 구조 지어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을 ‘자신의 의지로 이성 능력을 발휘하고 발전시키는 자율적인 주체’로 간주하고 그중 서양인에게 이성능력의 우월적 지위를 부여해온 서구세계의 보편적 관념을 뒤엎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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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과 나란히 달린 또 하나의 새로운 틀은 비판이론이었다. 좌파 사회학자들이 제기한 비판이론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성적 합리성이 반동적으로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비판은 이제까지 ‘계급 착취로부터의 해방’에 집중해온 좌파의 자본주의 사회 비판과 변혁 이론을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테제로 확대하면서 문학, 예술 등으로 사회비판 운동의 전선을 다변화 하는데에 영향을 미쳤다.
… 신 사회 운동을 이끌고,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에서 정의했듯이 신사회 운동은 자본주의의 정치권력, 화폐경제 ‘체제’가 ‘생활세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야기되는 문제들을 생활세계의 맥락에서 저항한 움직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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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만과 저항은 1968년 5월 파리에서 대학생과 노동자 계층이 봉기한 68혁명으로 폭발했다.
당시가 서구 자본주의 경제의 황금시대였다는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불만은 경제 문제보다는 문화적인 것이었고 이를 떠받치는 정치에 대한 것이었다. 표준화된 대량생산-대량소비체제와 보편적 풍요를 지향하는 포드주의 아래 무시되고 억압되어온 개인적, 개별적 가치를 향한 대중의 욕망이 분출된 것이었다.
새로운 건축·도시 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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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도시 분야에서도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계획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담론들이 등장했다. … 유토피아 담론 대신에 개인의 삶을 둘러싼 현실세계에서 건축과 도시의 쟁점을 찾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체적인 매일의 삶 속에서 부딪는 도시적 사실들을 재발견하려는 탐구들이었다.
CIAM의 마지막 11차 회의(1959)를 주도한 건축가들의 모임인 팀 텐은 이미 CIAM 9차 회의(1953)에서부터 선배 건축가들과는 다른 가치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있었다.
이제 건축은 인간의 이동성을 증진시키고 복잡한 인간의 관계 및 모임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61년 영국에서 결성된 아키그램은 이미 변해버린 세계에 대응하지 못하고 관행적 교리를 반복하는 모더니즘 건축에 자극을 주려는 시도였다. 또한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에 대한 건축적 대응을 촉구하는 운동이기도 했다.
1960년 도쿄 세계디자인회의를 기점으로 일본에서 성립하여 구로카와 기쇼의 캡슐 타워(1972) 등의 작업을 낳은 유기체 건축 운동인 메타볼리즘 역시 아키그램과 유사하게 기술 발전에 대한 신뢰가 저변에 깔린 모더니즘적 미래 담론이었다.
미국 사회운동가 제인 제이콥스(1916~2006)의 담론과 활동은 미래보다는 도시적 현실에 직접 맞닿은 것이었고 그만큼 더 강하고 넓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1958년 기고한 글, <도심은 대중을 위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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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도시계획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중의 하나인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1961)을 출간했다.
건축, 도시설계 이론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1963년에 쓴 짧은 논문 <도시는 나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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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고 능력의 한계 때문에 복잡한 대상을 정리, 분석하는 데에는 나무구조가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도시공간구조를 나무구조로 설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적한 그의 논문은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계획에서는 만회가 불가능한 치명적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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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벤투리(1925~2018)의 <건축에서의 복잡성과 모순>은 ‘고귀한 순수주의’를 추구했던 모더니즘 건축의 교리와는 정반대로 건축은 도시적 경험에 가득 찬 모순과 복잡성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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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 로시 등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1960년대 중반에 시작한 신합리주의 건축 운동은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대안 모색인 동시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고 있던 벤투리류의 대중주의적 건축 담론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이는 역사적 공통 언어들이 축적되어 있는 도시적 사실들에 기반을 둔 작업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변화하고 존속해온 건축물과 장소들이 있는 유럽의 도시들은 모더니즘 건축이 무시해버렸던 건축의 장소성과 역사적 연속성을 동시에 복원시킬 무궁무진한 보고였다.
알도 로시 등은 이탈리아 도시들 속에서 지속적, 반복적으로 형성되어온 건축과 도시공간의 형태적 유형들을 발굴하고 원형화하는 유형학에 천착했다.
295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이러한 시도는 유럽 각지에서 도시의 역사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지역주의로 확산되었다. 웅거스(독일), 크리에(룩셈부르크), 퀼로(벨기에) 등이 로시 등의 접근 방법에 공감하며 건축유형화에 동조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대부분 고전주의적 건축 및 전통적 도시공간 형태의 복고였다.
건축비평가 만프레도 타푸리는 역사를 초월한 의미를 갖는 건축과 도시공간 형태들을 찾음으로써 건축 기율을 재건하려고 했던 로시의 시도가 오히려 기율의 해체로 나아갔으며, 건축의 근원적 존재를 찾으려고 했던 그의 탐구는 현실 존재의 한계만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퇴행적 유토피아
295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러한 ‘사실’을 직설적인 형태 표현 소재로 삼는 유치함, 기껏해야 고전주의 형태 요소로 돌아가는 복고주의, 혹은 도시의 공간구조를 결정하는 체계와는 유리된 채 획지 안에서 새로운 가치가 ‘생성’되는 건축공간을 창안하려는 자폐적 자기기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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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에서 타푸리가 모더니즘 건축에 가했던 통렬한 비평은 1960년대 모더니즘을 비판하며 등장한 새로운 담론들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는 모더니즘 건축이 지향한 유토피아를 “형태로만 남은 퇴행적 유토피아”라고 단언했다.
<건축 이데올로기 비판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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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푸리가 내리는 결론은 보다 근본주의적이다. “(결국 우리는) 순수한 건축, 유토피아 없는 형태, 숭고한 무용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건축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건축에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히려는 기만적 시도들보다는 그 조용하고 진부한 ‘순수성’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의 진정성을 언제나 더 좋아할 것이다.”
롤랑 바트르가 <글쓰기의 영도>에서 제시했던 부르주아 지배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글쓰기 방법, 즉 ‘아무런 스타일도 없는 중립적이고 비활성적인 무색의 글쓰기’의 건축적 판본이라고 할 만하다. 이는 건축이 현실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결론이며, 사회 개혁 실천에 관한 한 사실상 ‘건축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이며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에 서 있는 타푸리로서는 불가피한 결론이었다.
1960년대 만발한 모더니즘 비판들이 건축계에서 모더니즘 건축 담론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라면 1972년 프루이트아이고 공공임대아파트단지 폭파 철거는 대중적 차원에서 이를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300
건축 생산 역시 호황을 지속했고 온갖 비평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건축이 주류의 지위를 유지했다. 건축 담론에서 시작된 변화가 건축 생산의 판도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실물경제가 가라앉는 1973년 이후의 일이었다.
304
1940년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철학에서 출발하여 1960년대 밀턴 프리드먼 등의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이론화된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 복지국가 모델이 파국에 빠진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부각되었다.
305
1979년 영국 총선에서는 마거릿 대처(재임 1979~90)의 보수당이, 1980년 미국 대선에서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재임 1980~1988)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내걸고 승리했다. 대중적 동의를 얻어낸 신자유주의 이념은 이제 국가 경제정책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골간은 기업 활성화와 공공 부문 지출 축소였다.
1950~60년대의 ‘표준화-대량생산’체제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생산 방향을 전환했다.
13 1973년 이후의 건축 생산
세계화와 정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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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을 차지하려는 각국 자본의 경쟁이 격화하고 국제적인 차원에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중화학공업이 1980년대에 중국, 한국, 인도, 멕시코,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신흥공업국들로 이전했고,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은 금융업과 정보기술산업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세계가 단일한 시장체제로 통합된다는 뜻이다. … 1990년대에는 세계화라고 불리는 세계 단일시장체제로 진입했다. 1970년대까지 세계 시장의 확대 현상을 ‘국제화’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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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 발전은 세계화 시장을 가능케 한 기술적 기반이었다.
한편 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귀결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세계 시장 통합을 제약하던 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제거되었다.
308
1980~90년대의 신자유주의가 제조업 분야에서 노동생산성 향상과 기업 이윤율 상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1990년대 말부터는 신용 확대를 통한 금융 상품과 자산 팽창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309
결과적으로 실제 실물 자산 가치보다 훨씬 큰 명목 화폐량이 시장에 유통되면서 부의 총량은 계속 증가했고 경제활동 총량 역시 계속 커졌다. 정보기술의 혁명적 발전은 이러한 상황의 견인차이자 산물이었다.
포스트포드주의와 탈산업사회
310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보수 우파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더불어 본격화한 기업들의 새로운 시장 전략은 ‘수요 창출’을 목표로 한 ‘다품종 소량생산’이었다.
기존 소비 기호를 진부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는 한편, 소비자들의 기호 차이를 섬세하게 분석하여 대응하는 마케팅 전략이 추진되었다.
311
국제주의 양식에 맞서 지역적 전통과 특성을 주장하고, 공간보다는 장소에 대한 고려를 우선하는 문화예술과 건축의 경향 역시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세계지역화’라는 개념이 통용되었다.
후기구조주의와 신사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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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하는 개체들이 갖는 고유한 속성과 그들이 부딪히는 상황의 차이에 주목하는 이러한 사고와 태도는, 사회의 구조적 속성과 틀이 개인의 사고와 실천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는 구조주의와도 다른 것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요인 못지않게 개별성과 우발성이 하나하나의 상황을, 그리고 역사를 야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주목받았다. 흔히 후기구조주의라 부르는 이러한 사고가 개인들의 각자 처한 상황에서 발휘하는 자율적 실천 능력에 대한 기대로 연결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스피노자의 역능 개념에 대한 새삼스러운 천착, 앤서니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와 장 이론 등은 모두 구조적 억압 기제가 상황마다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 실존하는 개인의 자율적 실천 능력에 대한 기대를 토대로 개진된 담론들이었다.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 로티가 말하는 요지는 본래적 본성이나 불변의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것이 언어이든 자아이든 공동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에, 역사적 과정 속에서 우연의 중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성향, 즉 코나투스를 갖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활동력, 즉 역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신을 보존할 수 없는 유한자이므로, 즉 인간의 코나투스나 역능은 타자와의 관계를 향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든스의 <사회구성론>에서 구조화 이론을 제시. … 개인 행위자는 사회구조에 영향을 받지만 바로 그 사회구조 역시 개인들의 장기 지속적인 행위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조화된다는 것.
부르디외가 제시한 아비투스는 계층, 문화 등 구조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개인의 습관적 행동이나 사고양식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아비투스는 건축공간을 통한 사회적 실천에 주요한 함의를 갖는 개념으로 다가온다. … 한편 부르디외에 따르면 , 사회는 개인이나 집단의 무질서한 집합체이거나 위계화된 계급 피라미드이기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된 수많은 ‘장’이 접합된 다차원의 위치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 안에서 개인들은 자신이 점유한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행동 전략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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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에 따르면, “유토피아의 실현은, 그리고 더 나은 유토피아들을 그리는 것은 끝없는 과정이라고, 즉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향한 수렴의 과정이 아니라 ‘자유’의 실현이 끝없이 증대되는 과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회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여성 운동, 환경 운동,소수자 권리 운동 등 소위 생활 정치가 사회 비판과 변혁 운동의 주류가 되어갔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의 예술과 문화
317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설득력을 잃으며 퇴조하는 1970년대 이후의 건축, 회화, 문학, 철학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 등장한 담론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경향의 근저에는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아니면 적어도 ‘객관적 현실에 대한 합의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혹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마르크스주의와 형식>(1971)에서 말한 대로, “탈산업 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언론매체나 광고, 선전이 계급 구조를 점점 더 심하게 은폐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경험이 이제 전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개인적 삶의 관심사와 사회체제의 구조적 결과물 사이의 연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게 된”상황에서 사회와 세계의 향방과 본질적 가치를 문제시하고 논하는 일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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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기호와 경향이 얽힌 것이 현실임을 인정하는 태도는 새로운 유행 창출과 상품 기획에 집중하는 포스트포드주의 시장에 쉽사리 연결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더 나은 사회’
1980년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주제로 기획된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글 <모더니티:미완성의 기획>에서 하버마스는 세 유형의 보수주의를 비판했다. 반근대주의를 취하는 젋은 보수주의, 전근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늙은 보수주의, 그리고 학문, 정치, 예술을 생활세계와 분리시켜 자율적 영역으로 가두려는 신보수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더니즘의 이성주의 자체를, 혹은 생활세계의 모순 인식에 기초한 변혁의 기획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니체적 태도의, 비이성적 태도를 근거로 비판(이성적 태도)을 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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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가 봉착한 문제는 여전히 이성과 합리성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제임슨의 문화 비판은 보다 근본주의적이다. 하버마스가 포스트모더니즘을 현실세계와 격리된 자율성 담론으로 비판했다면, 제임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이 현실세계의 작동 기제인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에 대한 외면과 그 모순을 해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실천에 대한 불철저한 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외면과 불철저한 의식 속에 생산되는 문학과 예술의 이면에는 모순적인 현실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임슨 <단일한 근대성>(2013) …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담론은 자신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토대인 생산양식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는 자본주의와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빼놓고 근대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문학이건 예술이건 모든 사회적 담론은 이미 전 세계를 장악한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의 관련성 속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기든스가 주장하는 ‘제3의 길’이나 하버마스가 말하는 ‘미완의 근대성’은 결국 근대성 속에서 길을 찾고 근대성을 완성하자는 주장이다. 근대는 자본주의니 결국 자본주의 속에서 길을 찾고 자본주의를 완성시키자는 주장인 셈이다.
그는 근대, 곧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 필요한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요청한다.
도시공간 생산으로서의 건축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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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더니즘 건축이 표방했던 ‘새로운 도시와 생활공간의 창조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기존 도시로부터 부여된 조건들의 수용과 반응으로서의 건축’ / ‘창조적 주체로서의 건축가’보다는 ‘객관적 체계를 수용-해석하고 이것에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건축가’가 적절하다는 것이었다. 모더니즘 건축이 이미 잃어버린 ‘계획의 영역'(도시)을 ‘창조’하려는 순진함 속에 관념뿐인 도시론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새로운 태도는 어차피 잃어버린 계획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도시를 ‘객관적 체계’, 혹은 ‘주어진 조건’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세심하게 해석하고 이에 반응하는 건축을 지향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1944~), 앙투안 그륑바크(1942~), 롤랑 카스트로(1940~), 이브 리옹(1945~), 페르난도 몬테스(1939~) 등이 ‘상황 종속적’인 건축가라 할 만한 작업 방식을 진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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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7년 ‘비판적 재건축’과 ‘신중한 도시재개발’을 주제로 베를린에서 진행된 국제건축전(IBA)은 기존 도시공간의 생활적, 형태적 맥락을 존중하는 도시재개발 패러다임을 수십개 건축 프로젝트로 실현해 보인 경연장이었다.
-> 1983년 베를린 의회에서 공식적인 지침으로 채택되었다. 12개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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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등장하여 1990년대에 확산된 콤팩트 시티나 1980년대 말 미국과 캐나다에서 등장한 뉴어바니즘 담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접근이었다.
브룬틀란 보고서, 1992년 리우선언
등을 통해 지속가능성 담론과 새로운 도시개발 담론들이 연결되면서 정치적,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며 보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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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의 도시개발이 공간 확장을 통해 새로운 경제활동공간을 창출한 것이라면, 도시재생은 기존 공간의 밀도를 높이거나 새로운 활동으로의 갱신을 통해 부가가치 상승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과거에는 공공이 소유하고 관리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었던 공간과 서비스를 사유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제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낳는 공간을 만들려는 도시 내 울타리 치기, 이른바 도시 인클로저 현상이 확산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나 빗장공동체가 된 중상류 계층 주거단지가 대표적이다.
도시 곳곳에서 소매점포 및 보행인구 밀도가 높은 ‘매력 있고 활력 있는’ 가로공간들이 조성됐다.
… 이 모든 현상이 도시를 ‘계획’의 대상으로서뿐 아니라 중요한 ‘설계’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확산시켰다.
주거 건축에서 도시공간 대응 태도 변화
338
1972년 프루이트 아이고 공공임대아파트단지 폭파 철거는 모더니즘 주거 건축 이념의 종언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새로이 호출된 것은 19세기 도시주거 건축 형식이었던 중층 가구형 공동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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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가로가 주거 건축을 포함한 모든 도시 건축의 중심적 주제로 부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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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C, 캐나다 워터 주거지
이스트할렘 주거단지 설계경기 당선안, 2등안
런던 릴링턴 가든스(1961~71)
새로운 형태 미학의 도발과 모더니즘 건축 형태의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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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건축 미학에 대한 도전인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박공지붕, 반원형 창호 등 고전적 형태 요소들을 차용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찾는 로버트 벤투리의 건축이 선두주자였다. 그의 길드 하우스(1960~63)와 바나 벤투리 하우스(1962~64)는 모더니즘 건축의 형태 규범을 위반하려는 의도적 도발이었다.
도시가 역사적으로 축적하고 있는 형태들 속에서 도시공간과 건축 형태의 원형을 탐구하려 했던 1960~70년대 이탈리아 신합리주의 역시 모더니즘 건축의 규범과 다른 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흐름이었다.
불황기였던 1970년대까지 소규모 건축물 생산 일각에서 시도된 이러한 새로운 형태주의는 1970년대 말 찰스 젠크스 등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80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바야흐로 포스트모더니즘건축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352
보다 심각한 도전은 1980년대에 출현한 ‘해체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일단의 흐름이었다.
359
추미는 뒷날 인터뷰에서, 당시 참가 건축가들의 ‘해체주의적’ 작업은 어떤 ‘운동’이나 ‘양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합판으로 도리스식 신전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작업들에 반대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1990년대부터는 … 아시아 국가들과 남미 국가들에까지 대규모 개발사업과 건축 붐이 일었다. 건축 형태에 대한 태도와 경향도 정리되었다. 대세는 어떠한 역사적(혹은 반역사적), 사회적 상징이나 함의도 배제한 채 건축 생산의 자체 논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건축 작업의 시작은 특정한 관념이나 의미와 연결된(과거 건축 사례들의) ‘형태’가 아니라 건축공간의 용도, 즉 ‘프로그램’이라는 태도가 확산되었다.
359
선험적 가치와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건축 형태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경제성, 즉 건설 비용과 가용공간의 실용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기능에의 합치를 최우선 덕목으로 하는 모더니즘 건축의 형태가 단연 걸맞은 것이었다. 모더니즘 건축의 유토피아적 이념은 폐기되었지만 그 수단이었던 형태는 살아남았다.
361
19세기 말 아르누보 건축이 기계 생산을 비판하며 기계로 생산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한 것이라면, 비정형 건축은 컴퓨터 기술의 발전을 찬미하며 기계로 만들 수 있는 것의 극단을 추구했다.
364
한편에서는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논란을 넘어 건축을 형태 중심으로 다루는 전통 자체를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건축은 시각적 형태로서만이 아니라 총체적 지각을 통한 경험 대상이 될 때 그 본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으로, 메를로-퐁티의 몸과 정신이 나뉘지 않은 ‘원초적 지각'(primary experience)을 원용한 ‘건축 현상학’ 혹은 ‘실존주의 건축’이라 할 만한 태도였다.
‘장소의 정신적 본질’에 대한 천착(크리스티안 노르베르크-슐츠, <장소의 혼>), ‘외부 세계와 신체를 일체화하는 건축'(찰스 무어, <신체, 기억, 건축>,1977) 등이 이러한 흐름을 잇는 작업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실존주의 철학의 ‘타자와 함께 있음’이라는 테제와 사회적 관계를 둘러싼 실천 문제는 외면하였다.
… 그들은 시각적 형태를 넘어서려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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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사회 현실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은 설득력 있는 것으로는 ‘비판적 지역주의’를 꼽을 수 있다. 모더니즘 건축의 형태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여기에 지역적, 장소적 고유성을 보완하려는 건축적 태도와 활동들, 그리고 이를 통해 건축 생산의 경제적 합리성만을 좇는 가치체계에서 벗어나려는 활동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1980년대 초 출현했다.
…대표적인 것이 케네스 프램튼의 담론. 그는 보편 문명이 휩쓸고 있는 대도시화 상황에 저항하는 건축의 요건으로서 지형, 도시조직적 맥락, 지역의 기후와 일조, 텍토닉한 형태, 촉각적인 것 등을 제시했다.
장소적, 문화적, 재료적, 생태적 의미를 건축물에 담는 많은 건축가들의 작업이 비판적 지역주의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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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건축은 고전주의시대 이래 최초이자 유일하게 구속력 있는 양식을, 일상의 삶의 형태까지도 규정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양식을 남겨 놓았다”라는 하버마스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수 있다.
그는 <근대 그리고 탈근대 건축>(1981)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실패는 건축의 과오라기 보다는 근대 사회의 체계와 생활세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엄청나게 확장된 근대 사회에 합리적으로 대응한, 또는 대응하려 한 분야가 건축 이외에 또 있었는가? 그렇다면 근대 건축은 ‘실패’ 한 것이 아니다. 건축만이 근대 사회의 향방을 떠안으려 시도했을 뿐이다.
369
근대 건축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들의 실패는 도시 생활세계가 점점 ‘형태를 부여할 수 없는 체계의 관계들’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을 예증하는 것이다. … 도시는 우리가 심정적으로 갖고 있던 오래된 도시 개념을 넘어서버릴 정도로 커져버렸다. 그러니 이것은 근대 건축의 실패도 아니고 다른 어떤 건축의 실패도 아니다.
보론 현대 건축과 사회적 실천
사회적 실천이라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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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진보 이념을 기초로 성립한 근대성이 낳은 논란이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문화예술 분야에 어느 정도 공통된 것이었지만 한때 ‘사회 개혁과 유토피아 실현’이라는 이념을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일치시킨 바 있었던 건축에서는 특히 각별한 것이었다.
우선 건축을 텍스트로 이해하면서 사회적 맥락에 연결하려는 태도를 둘러싼 논란을 들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건축물의 형태적 표현을 하나의 의미체계로 이해하려는 담론이 증가했다.
-영국 건축사학자 존 서머슨은 <근대 건축 이론에 관한 연구>에서 근대 건축이 고대의 형태 규범을 파기하고 새로운 건축 원리로 ‘프로그램’을 채택했지만, 프로그램은 형태를 결정하는 원리가 아니므로 결국 근대 건축은 형태 결정을 위한 ‘건축언어를 상실’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비판
- 마리오 간델소나스의 바판(1979) “…전시대 건축가들에서 느끼는 통일감은 언어와 같은 개념적 통일성이라기보다는 재료와 구축기술의 통일성이 낳은 환영이다.”
375
19세기 말~20세기 초 아바가르드와 모더니즘 건축이 새로운 형태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표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형태적 혁신이 귀족 계급의 미학을 부르주아 계급의 미학으로 바꾸고 이를 통한 사회 계급 질서의 변화, 즉 사회체제의 변화와 연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형식과 내용이 합치하는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형태’가 아닌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376
Henri Lefebvre, The Production of Space
르페브르는 … 즉,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공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의 삶과 행위라는 것이다.
… 건축 형태에서 소위 ‘복잡성과 모순’을 찾는 벤투리류의 건축 담론은 ‘삶과 행위가 생성하는 의미’와 ‘기호가 표방하는 의미’의 불일치를 ‘복잡성과 모순’으로 여기고, 이러한 복잡성을 자유롭고 다원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읽히기 위해 만들어지는(생산되는) 공간들은 가장 기만적이고 꾸며낸 상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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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를 권력의 문제로 되돌려놓는 것이기도 하다. … 무엇보다 그것은 금지를 행한다.”
(사회적) 공간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렇게 생산된 공간은 사고와 행동의 도구로 작동한다. 또한 생산의 수단이 될 뿐 아니라 통제 수단, 즉 지배와 권력의 수단이 된다.
르페브르의 문제의식이 향하는 곳은 결국 공간의 생산 문제이다. 그는, 도시공간의 생산은 사회체제(지배체제) 재생산에 결정적인 부분으로서 지배 계급의 주도로 재생산되며, 사회와 삶의 방식의 변화에는 공간의 변화가 필수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사회 건설에 복무하려 했던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의 실패는, 그들이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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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페브르의 공간 담론은 사회적 공간이 생산되는 세 가지 국면, 즉 ‘공간적 실행’, ‘공간적 재현’, ‘재현적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되며 공간계획으로서 건축의 사회적 실천 가능성을 시사한다.
‘공간적 실행’은 일상생활, 즉 특정한 공간 형식들과 그 공간적 그물망 안에서 규범화되어 행해지는 일상적인 행위들을 말한다. 행위는 대부분 ‘규범화’되기 마련인데, 일상생활이 사회적으로 규범화(코드화)된 시설들(학교, 공장, 시장 등)과의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시설들과 관계망의 규범은 해당 사회의 문화(역사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반영으로서의)와 정치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공간의 재현’은 도시계획, 건축설계 등 사회적 제도 속에서 진행되는 공간 생산 행위를 말한다. 공간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나 이데올로기를 현실공간으로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을 일정 범주로 한정하려는 속성을 가지면서, 필연적으로 일상생활, 즉 ‘공간적 실행’과 충돌한다.
‘재현적 공간들’은 규범화된 ‘공간적 실행’을 벗어난, 또는 ‘공간의 재현’과 충돌한 ‘공간적 실행’이 행해지는 공간들이다. 주어진 길, 주어진 방식을 거스른다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탈주의 공간인 셈인데 바로 이것이 르페브르의 공간 생산론이 정치적 실천론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르페브르가 던진 실천의 실마리를 ‘헤게모니’ 담론과 연결하여 진전시켰다.
헤게모니 담론 – 그람시 <옥중수고>에서 역설했던 것. 요점은 유럽 부르주아 지배 사회체제를 국가기구와 시민사회로 구분하고 체제 변혁을 위해서는 시민사회 안에서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
그는 타푸리의 (토대가 변혁된 사회가 오기 전엔 건축이 할 역할은 없다는) 근본주의 내지는 환원주의와는 달리 헤게모니 투쟁, 즉 진지전으로서의 건축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공간에서 반주류적, 대안적인 개념의 공간을 생성하고 구체적으로 경험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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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적 자유주의
1970년대 이후 주요한 건축 담론들 속에서도 사회적 실천을 향한 입장과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1.실천으로서의 건축 형태
건축 형태로 사회 현실을 비판한다(혹은 할 수 있다)는 태도.
Ex) 로버트 벤투리의 태도
Ex) 찰스 젠크스
이들은 모더니즘 건축의 규범을 타파하려는 도발 자체를 ‘변화를 향한 실천’으로 간주했다.
2.박물관으로서의 도시
도시 자체를 현실세계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실체로 간주하는 태도
Ex) 콜린 로 – 콜라주 도시 <Collage City>
‘바람직한 사회’를 향한 실천 지향적 건축과 전통적인 조형 작업으로서의 건축이 공존하는(공존할 수밖에 없는)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자는 태도다. 이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 도시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며, 서로 다른 건축 작업들의 공존(콜라주)이야말로 유토피아와 전통 모두에 이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결국 현실체제에 우호적인 ,혹은 적어도 현실을 회피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회 변혁과 건축
개혁하고 ‘더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실천’을 모색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타푸리의 근본주의, 즉 경제적 하부구조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 요소이며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적 사회체제로의 변혁이 없는 상황에서 건축적 실천의 가능성을 비관하고 차단한다.
차라리 ‘어떠한 이념적 지향도 없는 순수한 건축(즉, 기능에 충실한 도구로서의 건축)’을 옹호할 것이라고도 했다.
현실 상품세계체제에 대한 순응으로 귀결되어버릴 ‘형태 자유주의’ 유의 천진난만한 저항(?)이 아니라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나 태도는 무엇일까?
- 점진적 사회공학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하는 실천 중 가장 소박한 태도는 건축의 형태와 공간구조를 통해 ‘바람직한’ 가치, 혹은 공동선을 확대해나가려는 것이었다. 예컨대 상업 건축에서는 ‘기업 이윤 추구’보다는 ‘시민 대중의 공공환경 향상’을, 공공 건축에서는 ‘권력의 권위와 위엄의 상징적 표현’보다는 ‘시민의 편리한 접근성과 사용’을 우선적 가치로 삼는 건축을 주장하고 실천하려는 태도다.
385
칼 포퍼(1902~94)의 ‘점진적 사회공학’적 입장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적절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포퍼는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최대의 궁극적 선을 추구하고 그 선을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사회 최대의 악과 가장 긴급한 악을 찾고 그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러한 태도는, 전체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사회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보다 적극적인 실천 논리로서의 입론도 가능하다.
“이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이미-항상 형성돼 있는 어떤 장 속에서 우발적으로 생겨나 그 장 전체의 의미구조를 변화시킨다”라는 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와도 연결하지 못할 것 없다.
<시뮬라크르의 시대>
- 비시장적 가치 지향
1980년대 이후 후기구조주의 사회철학을 참조하는 변혁 담론들이 지향하는 ‘현실체제 질서로부터의 탈주’ 담론과 궤를 같이하는 태도다.
베르나르 추미는 ‘건축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형태나 의미체계가 사회경제적 필요에 의해 생산되는 공간에 선행할 수 있는 것인가’를 고민한다.
<건축의 역설>
-> 그는 우선 “모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들을 초월하는 것으로서의 건축적인 본질은 존재하는가?”를 자문한다. 그 대답은 ‘아니오’다.
… 타푸리는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혁’을 위한 실천…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추미는 타푸리의 주장을 ‘피라미드’ 모델이라고 비판하며 실천의 가능성을 ‘미로’모델에서 찾는다. ‘피라미드’는 현실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고 목표를 설정한 후 실천 방안을 찾는 모델이다.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 모더니즘 건축이 전형적으로 이에 해당된다.
‘미로’는 전체 구조를 감지할 수 없으며 궁극적 목표 설정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모델이다.
…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자신이 직접 경험하는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일들뿐이다.
이러한 논리 전개 끝에 추미가 도달하는 결론은 필연적으로 무정부주의적 저항이다.
… 추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건축은 사회가 그것에 대해 기대하는 형태를 부정함으로써 그 본성을 지킬 때에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을 듯 하다. 건축의 필요성은 그것의 불필요성에 있다. 그 불필요성은 무용하되 급진적으로 무용하다. 그 급진성이야말로, 이익 추구가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건축이 갖는 진짜 힘이다. 모호한 예술적 보충물 혹은 재정 조작의 문화적 정당화 수단이 아니라, 사고팔 수 없고 교환가치도 없어서 생산 사이클에 통합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즉, 가치(필요성)를 갖지 않음으로써 가치가 지배하는 현실에 저항한다는 뜻이다.
이는 해체주의라 불리는 사회철학 담론들과 신사회 운동 진영의 실천 담론이 공통적으로 표방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건축에서도 이 전략이 유효할지는 불분명하다. -> 형태적인 영역을 넘어서 사회체제와 연결되는 지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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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판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기대하는 건축 형식을 부정’하는 것, 즉 ‘무용한, 혹은 기존 가치체계와는 다른 건축 형식, 공간 형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체제와 연결되어 갖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말이다.
추미는 건축 형태나 공간 형식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생산함으로써 개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실천 담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공간의 구성이 일시적으로 개인 또는 집단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겠지만 반동적인 사회의 사회경제적인 구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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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간의 소통을 촉진하는 공간구조’를 통해 ‘개인들의 자율성’과 ‘참여적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것과 같은 신사회 운동의 실천 전략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그것을 통해 어떤 삶의 방식, 어떤 사회체제에 도달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유토피아, 즉 더 나은 세상을 그리는 이른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향한 수렴의 과정이 아니라 ‘자유’의 실현이 끝없이 증식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추미와 같이 현실사회의 가치체계에서 벗어남으로써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쌓아가려는, 또 다른 전략은 케네스 프램튼의 담론이다. ‘기약 없는 저항’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좀 더 미시적이고 현실 타협적이다. 프램튼은, 추미와일견 유사하게, 타푸리의 근본주의적 비관을 벗어나 현실 속 실제 건축 안에서 변혁을 향한 실천 고리를 찾아내려 애쓴다.
프램튼의 해법은 생활세계보다 체계가 앞서고 목적보다 수단이 앞서는 현실의 우선순위를 뒤집는 것이다. 건축의 생태학적인, 구축적인(tectonic), 그리고 촉각적인(tactile)차원을 건축물 생산 합리성 체제에 균열을 낼 정도의 수준까지 추구한다.
케네스 프램튼, <The Status of Man and the Status of His Objects : A Reading of The Human Condition>
프램튼은 자본주의의 상품적 가치체계에 포섭되지 않은 생태적, 구축적, 촉각적 차원이 갖는 덕목을 제시하고 경험하게 함으로써 기존 자본주의 가치체계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모순 수용혹은 촉진
‘기약 없는 탈주’, 즉 대안적 체제에 대한 전망을 보류한 채 현실 사회체제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공간 형식과 가치를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방식이었다면, 또 다른 하나의 태도는 이와는 정반대다. 상품가치만을 좇는 현실체제의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공간 형식 요청에 철저하게 ‘창조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Ex) 렘 콜하스<대도시에서의 죽음과 삶>
불안정화를 통해서 ‘변화(=삶)를 흡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건물의 틀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끝없는 적응 과정을 통해 각각의 장(platform) 위에서 기능들을 계속 재배열함으로써 말이다.
,배형민 <감각의 단면>
… 파도의 힘과 방향은 조정할 수 없다. 파도가 치면 여기에 적응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화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멈추려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을 그 속에 새겨 넣어야 한다.
- 렘 콜하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