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너무 많다고 한다는 것은, 머릿 속에서 부유하는 비문들이 많다는 것일까. 그렇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생각이라고 재 정의한다면, 나는 지금 생각이 너무 많기는 커녕 그저 외부 환경을 통해 오는 반응 잔재들의 축적일 뿐이다. 그러한 상태를 나는 스트레스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 색채들의 중첩이 너무 많은 그 순간은 결과적으로 쾌락의 순간으로 발산되지만, 그 과정에서는 두 가지로 나뉜다. 이는 스트레스 상태의 각성에서 무기력으로 이행할 때, 즉 신체적 피로와 강화될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반응을 조화롭게 관계망을 맺어 ‘생각’으로 만들어 냈을 때이다. 그 두 과정이 무엇이 되었든 결과가 동일하다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의 고통과 환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의미없는 이 글과 같이 손가락을 마구 놀리는 것은 그 정도를 조화롭게 조절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합리화를 해 본다. 반응이 많은 하루의 연속, 정리와 출력의 에너지를 전 방향으로 하기에는 전자의 과정, 즉 무기력한 불행이라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는 불만족이요 다시 욕망의 재생성이다. 욕구의 적절한 해소를 통해 욕망을 최소화 해야 하고, 이 실천적 행위는 정리와 출력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수 밖에 -아직 나는 알지 못한다.- 없다. 문단을 나누지 않고, 문맥의 흐름의 방향은 사방으로, 각각의 강도는 약해진다. 그렇게 이 글을 적는 목적은 이 글이 끝나는 동시에 달성 된다. 문장의 함축성은 사라지고, 어느 새 가벼운 글로 돌아간다. 그렇게 스트레스의 각성 상태에서, 상실을 이 연속되는 글로 하여금 진행시켜, 내가 무엇을 하는지, 흐려지는, 흩어지는, 무기력으로 이행되면서 쾌락의 순간은 결국 쾌락의 과다로 이는 고통으로 연장된다. 더 크게 생성되는 욕망은 잠에 들면서 사라지게끔, 이만 이 과정을 그만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