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이란 무엇인가

표제/저자사항계몽이란 무엇인가 / 지은이: 이마누엘 칸트, 요한 카를 빌헬름 뫼젠, 모제스 멘델스존,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카를 프리드리히 바르트, 요한 게오르크 하만, 에른스트 페르디난트 클라인, 프리드리히 카를 폰 모저, 요한 고트프리트 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안드레아스 림, 요한 하인리히 티프트룽크, 요한 벤야민 에르하르트, 요한 아담 베르크 ; 옮긴이: 임홍배
 Kant, Immanuel[1724-1804]  Möhsen, Johann Karl Wilhelm  Mendelssohn, Moses  Wieland, Christoph Martin[1733-1813]  Bahrdt, Carl Friedrich  Hamann, Johann Georg[1730-1788]  Klein, Ernst Ferdinand  Moser, Friedrich Karl von  Pahl, Johann Gottfried  Fichte, Johann Gottlieb[1762-1814]  Riem, Andreas  Tieftrunk, Johann Heinrich  Erhard, Johann Benjamin  Bergk, Johann Adam  임홍배[1959-]

발행사항서울 : 길, 2020
 

형태사항276 p. ; 23 cm

주기사항원저자명: Immanuel Kant, Johann Karl Wilhelm Möhsen, Moses Mendelssohn, Christoph Martin Wieland, Carl Friedrich Bahrdt, Johann Georg Hamann, Ernst Ferdinand Klein, Friedrich Karl von Moser, Johann Gottfried Pahl, Johann Gottlieb Fichte, Andreas Riem, Johann Heinrich Tieftrunk, Johann Benjamin Erhard, Johann Adam Bergk
참고문헌 수록
2016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학 총서 출간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음
독일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

표준번호/부호ISBN 9788964452288 93100: ₩25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165.21 듀이십진분류법-> 193

주제명계몽[啓蒙]    서양 철학[西洋哲學]    인문 과학[人文科學]

<목차>
재1부 계몽이란 무엇인가?

뫼젠: 시민들의 계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1783)
멘델스존: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1784)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1784)
빌란트: 계몽에 관한 여섯 가지 질문(1789)
바르트: 계몽의 다양한 개념(1789)
하만: 크리스티안 야코프 크라우스에게 보낸 편지(1784)

제2부 사상과 언론의 자유

클라인: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하여: 군주와 위정자와 문필가들을 위하여(1784)
바르트: 언론의 자유와 그 한계: 통치자와 검열자와 작가를 위한 고려사항(1787)
모저: 언론(1792)
팔: 새로 도입된 언론 자유 제한조치에 대하여(1792)
피히테: 유럽 군주들에게 사상의 자유를 회복할 것을 촉구함(1793)

제3부 계몽과 혁명

림: 계몽은 인간 이성의 요청이다(1788)
모저: 진정한 정치적 계몽과 거짓된 정치적 계몽(1792)
티프트룽크: 계몽이 혁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1794)
에르하르트: 민중의 혁명권에 대하여(1795)
베르크: 계몽은 혁명을 야기하는가?(1795)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_ 모제스 멘델스존

17

“어떤 민족의 사회적 여건이 예술과 근면한 활동을 통해 인간의 본분과 조화를 이룰수록 그 민족은 그만큼 더 많은 ‘교양’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교양은 ‘문화’와 ‘계몽’으로 나누어진다. 문화는 다분히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계몽은 이론적인 문제와 더 많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화와 계몽 양자를 두루 갖추었다. 그들은 교양을 갖춘 민족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가 교양을 갖춘 언어인 것과 같은 이치다.

실천적 영역에서 습득한 모든 완벽함은 오로지 사회생활과 관련해서만 가치가 있고, 따라서 오로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본분에 부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문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몽을 필요로 한다.

20

이러한 자질은 또한 모든 개개인에게 그의 지위와 직분이라는 기준에 따라 상이한 수준의 이론적 통찰을 요구하며, 이론적 통찰에 도달할 수 있는 상이한 수준의 숙달된 능력을, 요컨대 상이한 수준의 계몽을 요구한다.”

21

-계몽이 모든 신분의 사람들에게 고루 확산된다는 것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모든 국민이 이성적으로 각성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한 이성적 각성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로 표현될 때는 신분차별의 철폐 요구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곧 ‘국가체제 붕괴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멘델스존이 생각하는 ‘시민의 본질적 직분’은 자유와 평등의 요구보다는 국가체제 수호를 우선시하는 보수적 입장에 서 있다.

22

-탈무드의 일부인 ‘유대교 교리집’ “타락의 정도는 명망 수준에 비례한다.”

23

교양을 쌓은 민족에겐 그 민족의 행복이 과도하게 넘치는 것만이 유일한 위험이다.

교양을 통해 민족적 행복의 최고조에 도달한 민족은 더 이상 높이 오를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는 너무 동떨어진 기우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_ 이마누엘 칸트

25

‘칸트는 계몽을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한다. 타인의 후견과 감독과 지도에 의존하는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율적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26

‘계몽적 공론장의 형성 문제를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개념으로 논의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과 대비되는 ‘사적 사용’이란 한 사회의 구성원이 ‘자신에게 맡겨진 시민적 직책 또는 관직의 범위 안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칸트 : 프리드리히 대왕 치하의 인물

28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적 연령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타인의 지도에서 해방된 (즉 자연인으로서는 성년이 된) 이후에도 평생토록 기꺼이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는 이유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주 쉽사리 주제넘게 그들의 후견인으로 자처하는 이유도 그들의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미성년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너무나 편안한 것이다.

-‘미성년’은 로마법 이래 부모 또는 친권자의 보호를 받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는데, 여기서 칸트는 자율적 사고와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9

개인의 타고난 재능을 이성적으로 사용하게 한답시고 오히려 잘못 사용하게 만드는 교의와 규정들, 이런 기계적 도구들은 미성년 상태를 온존시키는 족쇄들이다.

30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작동시켜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 확고한 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하다.

여기서 특별히 유념할 사항이 있다. 한때는 후견인들에 의해 굴레에 얽매였던 공중이 나중에는 스스로 전혀 계몽할 능력이 없는 일부 후견인들의 사주를 받아 그 후견인들 자신이 굴레에 얽매이도록 강제한단느 것이다. 편견을 심는 것은 그만큼 해로운 일이다. 편견은 결국 편견을 퍼뜨린 장본인이라 할 후견인들 또는 그들의 선임자들 자신에게 복수를 가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복종을 강요받아 온 대중이 후견인들(즉 권력자들) 사이의 권력투쟁에 동원되어 특정 세력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도구로 이용당한다는 뜻이다.

31

사고방식의 진정한 개혁을 가져오는 계몽을 위해서는 다름 아닌 자유가 요구된다.

어떤 일에서든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요구된다.

세상에서 단 한 명의 군주(프리드리히 대왕)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에 관해서든 따져라! 하지만 복종하라!”

32

그러므로 상관의 명령을 받는 장교가 직무수행 중에 그 명령의 합당함이나 유익함에 관해 공공연히 따지려 든다면 심각한 해악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지만 학자의 입장에서 병역 의무의 결함에 대해 논평하고 독자층에게 판단을 호소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금지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같은 사람이 학자의 입장에서 과세의 부적절함이나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표명한다면 그것은 시민의 의무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성의 사적 사용은 특정한 집단에 봉사하는 제한된 역할에 국한되고, 이성의 공적 사용은 독자들이 참여하는 공론장에 개방되어 있다.

34

인간 본성의 본래적 소명은 바로 계몽의 진전에 있다.

38

시민적 자유의 증대는 국민의 정신적 자유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한다.

<계몽에 관한 여섯 가지 질문>_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40

첫째, 빛이 충분해야 하고, 둘째 빛 속에서 뭔가를 보려는 사람은 눈이 멀지 않고 시력이 흐리지 않아야 하며, 그 밖의 다른 원인에 의해 볼 수 있는 능력 또는 보려는 의지가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44

선의로든 악의로든 그럴 마음만 내키면 각자 능력껏 인류를 계몽할 자격이 있다.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고찰하든 간에 사람들의 머리와 행동가저를 깨우치는 일이 누군가의 독점이 되거나 배타적 소수집단의 특권이 되는 경우보다는 누구에게나 그런 자유를 허용하는 편이 훨씬 덜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반드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집정관은 나라에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지극히 순수한 동기에서라면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45

모든 문제를 전반적으로 명확하게 해명할 수 있으면 계몽이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46

진짜 나이팅게일은 밤이 되어야 울지만, 가짜 나이팅게일은 햇빛이 눈부실 때 가장 요란스럽게 우는 법이다.

<계몽의 다양한 개념>_카를 프리드리히 바르트

47

‘바르트는 계몽이 일정한 수준의 지적 능력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진리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는 소신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51

계몽의 본질이 지식의 양이나 수준 또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보유한 지식의 속성을 뜻한다면, 계몽은 개별적인 명제들이 진리로 인식되는 방시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관계 개념일 뿐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자신이 참이라고 여기는 어떤 명제에 관해 명확한 개념과 검증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명제와 관련하여 계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계몽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계몽된 인간 전체 또는 그의 지식 전체를 다룰 것이 아니라 단지 개별적인 지식만을 다루어야 한다.

52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의 속성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불가결하다고 확신한다면 모든 지식에서 그러한 속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도덕성을 인식하고 사랑하며 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 단호하게 도덕성을 부여하는 데 익숙한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타인의 행복을 염두에 두는 사람, 비록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지는 못할지언정 방해하지는 않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사람이 비록 자신의 모든 행위에서 자신의 소망대로만 행동하지는 못한다 해도 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도덕성을 구현하고자 정직하게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마저 제외하면 지상에서 도덕적인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계몽된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계몽을 추구하고 자신의 모든 인식에 도덕성을 부여하려 힘쓴다.

55

계몽이 첫째, 엄청난 사고력을 요구하지 않고, 둘째, 인간의 모든 지식에 적용되지 않고 도더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으로 요구되며, 셋째, 명확한 개념과 스스로 생각한 이성적 검증을 요구하고, 넷째, 특히 성경의 권위와 같은 권위를 배척하지 않고 이전까지 자신이 품어온 신념에 부응한다면, 이러한 요건에 맞는 계몽은 모든 사람이 추구할 수 잇는 인류 공동의 자산이다.

<크리스티안 야코프 크라우스에게 보낸 편지>_요한 게오르크 하만

57

하만에 따르면, 칸트가 계몽적 각성에 도달하지 못한 ‘미성년’과 스스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 -따라서 ‘미성년’을 이끌어줄 능력을 갖춘-‘후견인’을 구별하는 것은 철학자가 ‘후견인’의 역할을 자임하려는 지적 오만이다.

58

결국 대중이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대중에게 이러한 모순된 역할을 강조하는 ‘후견인’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마카로니풍은 중세 라틴문학에서 여러 언어와 문체가 뒤섞인 풍자적, 해학적 스타일을 가리킨다.

59

-칸트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후견인의 인도에 의존하는 것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의 부족 때문이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잘못(책임)이라고 했다. 칸트가 ‘이성’을 강조한 것과 달리 하만은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60

저는 계몽이 논리학적 관점보다는 미학적인 관점에서 해명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미성년 상태를 초래한 원인이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고약한 단서를 붙이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라고 – ‘근본적인 오류’라는 그리스어는 정확하게 독일어로 옮기기 힘든 중요한 용어입니다만-생각합니다.

 무능력은 본래 잘못이 아닙니다.

61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할 때 여기서 불특정한 ‘다른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들’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 글의 필자가 염두에 두면서도 분명히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 또 다른 게으름뱅이 또는 인도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다름 아니라 미성년자와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성가신 후견인이지요. 그런 후견인은 죽어 마땅합니다. 미성년 상태가 잘못이 아니라, 후견인 역할을 맡은 사람 자신의 잘못이지요.

62

미성년 상태라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의 무능력 내지 잘못은 무엇일까요? 게으름과 비겁함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후견인의 맹목성이 잘못입니다. 후견인은 스스로 혜안이 있다고 자처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잘못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구약성서, 양과 소를 많이 키우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어린 양을 빼앗아 손님을 접대하자 다윗이 화를 내며 그 부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63

결국 결론은 뻔합니다. 악마한테 잡혀가지 않으려면 무조건 믿어라! 행군하라! 세금을 내라! 이건 삼중의 어리석음이 아닌가요?

64

따라서 우리 세기의 계몽이라는 것은 그저 북극광처럼 희미해서 그 빛으로 예언하는 세계시민의 천년왕국은 한가로운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모든 답변은 한낮에 걸어 다니는 모든 미성년에겐 깜깜이 조명일 뿐입니다.

‘한낮에 걸어 다니는’이라는 구절은 스핑크스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 ‘한낮에 걸어 다니는’인간은 ‘성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만이 ‘한낮에 걸어 다니는 모든 미성년’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인으로서는 이미 ‘성인’이지만 사회에서는 권력자 또는 후견인에 의해 ‘미성년’취급을 받고 성인의 권리를 박탈당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멀쩡한 성인을 미성년 취급하는 ‘불모의 차가운 달빛’같은 계몽은 이들을 밝혀주는(깨우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멀게 하는 현혹이라는 의미에서 ‘깜깜이 조명’이라고 한 것이다.

65

제가 계몽에 관한 칸트의 설명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결국 진정한 계몽은 미성년 상태의 인간이 전적으로 스스로의 잘못으로 떠맡은 후견인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후견인들의 통제와 간섭으로 인해 ‘불모의 차가운 달빛’과 ‘어둠’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그만큼 온전한 계몽에 도달하기 어렵지만, 그럴수록 ‘신성하고 아름다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66

그럴수록 같은 미성년 처지에 있는 동료들에게 더욱 온정을 베풀어야 하고, 불멸의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일에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별하는 것은 플뢰겔이 다룬 코믹 문학만큼이나 우스꽝스럽고 황당하지요. 미성년의 역할과 후견인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 두 가지 기질을 합치시키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결국 양쪽 모두를 자기모순적인 위선자로 만든다는 것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지요. 바로 이것이 계몽으로 포장된 정치적 과업의 요체입니다.

-이 구절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 나오는 일화이다. 허영심이 많아서 우스갯소리로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은 어떤사람이 진짜 철학자의 덕을 갖추었는지 시험을 받는데, 모욕을 끝까지 참고 침묵하면 철학자로 인정받기로 한다. 상대방이 온갖 욕을 해도 꾹 참고 침묵한 그가 마침내 득의양양해서 “이제 내가 철학자라는 걸 알겠지?”라고 하자 상대방이 “끝까지 침묵을 지켰더라면 철학자로 인정했을 텐데”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

<사상과 출판의 자유에 대하여>_에른스트 페르디난트 클라인

74

단지 두려움을 주어서 통치하는 군주는 그의 신민들을 미천한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런 노예들에게서 고결한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그들의 저급한 성격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군주가 위대한 행동으로 존경받기를 바라는 것도 헛된 일이다.

75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이며, 나 또한 힘이 닿는 한 그것을 나의 의무로 삼고자 한다.

77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천성을 억압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85

문필가들이여! 그대들이 인류의 스승이 되고자 한다면 이 명예로운 칭호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입중하라.

86

모든 종류의 편견에 맞서 과감히 투쟁하라.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칼로 덤비지 말고 미네르바의 창으로 싸우라.

<언론의 자유와 그 한계>_카를 프리드리히 바르트

87

‘바르트에 따르면, 계몽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신은 모든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했기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며, 군주의 권리보다 더 신성하다. 표현의 자유 역시 생각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므로 생각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신성한 권리다.’

‘바르트는 이처럼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적극 옹호하지만 다른 한 편 경우에 따라 그런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가 국가의 이익이나 여타의 인권과 충돌할 때, 그리고 무고하게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때는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

89

  1. 계몽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2. 계몽은 스스로 진리의 원천과 기준을 인식하고 상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판단이 과연 옳은지 그 근거를 충분히 생각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오래도록, 자주, 집요하게) 검토한다는 것을 뜻한다.

96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만인에게 말할 능력을 주셨으니 말을 하고 자신이 찾은 진리를 전파하는 것은 만인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자신이 습득한 지식과 통찰을 자유롭게 전파할 수 없다면 지식을 쌓은 목표가 실종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해 지식을 쌓은 꼴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많은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고, 경험과 관찰과 독서를 통해 나의 통찰을 교정하고 확장하고 완성해 가는 까닭은 오로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98

이러한 욕구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그 무엇도 혼자서만 즐기면 온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라인 포도주도 나 홀로 테이블에 앉아서 마시면 친구와 더불어 마실 때보다 맛이 반감되는 것이다. 더불어 나누는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이 누리는 모든 즐거움의 핵심이다. 서로 공유하고 나누어 갖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1. 나아가, 표현의 권리 자체는 생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방편이다. 모든 사람이 혼자서만 자신의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라. 묵묵히 혼자서만 즐길 행복을 위해 관찰하고, 숙고하고, 지식을 모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럴 때는 정년 야만이 득세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99

인간의 모든 지식이 표현의 자유에 의존하고 있다는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 판단과 지식에 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수단은 두 가지뿔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1. 첫 번째 수단은 자기검증이다.
  2. 그렇지만 자기검증이 분명한 확신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은 아니다. 특히 도덕의 문제에서 우리의 판단이 만족할 만한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권위의 역할이 불가결하다.

101.

  1. 권위라는 것은 진리를 판가름하는 기준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자신의 성찰과 검증에 바탕을 둔 확신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식능력이 있다고 간주되는 모든 사람이 어떤 것이 진리라고 합의하고 나의 견해에도 동의할 때 비로소 권위가 생겨난다.

103.

어떤 분야를 탐구할 때는 반드시 그전에 이미 숙고하고 관찰하고 생각을 교류한 선행 연구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을 진전시키고, 새로운 관찰을 하고, 그 분야를 확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05.

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를 과감히 평가하는 나의 적이 최고의 스승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나는 나의 친구에게 배우지 배우지 못한 것을 나의 적에게 배웠다.

106

그런 군주 밑의 국민들은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임을 느끼고,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115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말이나 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 경우에는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중의 악의적 어조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비판적인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이름을 언전히 숨길 권리는 없다.

마지막으로, 비판적인 글을 쓴 사람이 자기 이름을 완전히 숨길 권리는 없다.

116

출판업자가 필자를 확인하지 않은 글은 인쇄하지 못하도록 서약하게 해야 한다.

‘부적절한 비난’ 출판되는 글에서 (a) 이미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행위를 다시 비난하는 경우, 또는 (b)처벌 대상이 아닌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비난하는 경우 또는 (c)익명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부적절한 비난’이라 할 수 있다.

120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 때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빛을 가리려고해도 너무 늦었다. 이제는 그 빛이 단지 환하게 비추는 빛만 발할 것인지 아니면 불을 일으켜 태워버릴 것인지가 관건이다.

123

“글을 읽는 독자층은 일반 대중과는 전혀 다르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쌍방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특히 이 말은 때로는 군주를 깨우치고 경고하며 또 일반 대중을 진정시키고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발표되는 글들이 과연 어떤 정신과 계획과 목적에 따라 집필되는가 하는 차이를 따질 때도 타당하다.

124

저자가 세상과 인간에 대해 생생한 지식을 갖고 있고 하층민의 애로사항을 자신의 경험으로 깨우치면 그런 효과가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마련이다.

글들은 쉽게 이해되고 대중성과 진솔함을 특징으로 하는 짧은 글이다. 이런 유형의 글은 원래 이른바 ‘보통 사람’을 깨우치거나 마음을 다독이고 바로잡아 주기 위해 쓴 것으로, 가능하면 저렴한 값으로 일반대중에게 전파하고 가능하면 무상으로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글은 짧고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좋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가 설교자들에게 요구했듯이 이런 글은 무지렁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읽혀야 한다.

128

그리고 언론 자유의 제한이 초래하는 결과는 필연적이지만 언론 자유의 확대가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는 어쩌다 생겨나는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132

언론 자유가 남용된다고 해도 겁먹을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오랜 원칙에 따라 판단하건대 어떤 사안의 긍정적 활용이 남용으로 인한 해악을 막을 수 있으므로 남용이 긍정적 활용을 제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결투에서 서로 다치지 않게 한답시고 병사의 칼을 무디게 하면 정작 전투에서는 칼이 쓸모가 없어지는 법이다.

<유럽 군주들에게 사상의 자유를 회복할 것을 촉구함>_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36

이 글에서 피히테는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제한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이며, 검열은 양도 불가능한 권리에 대한 침해이므로 이에 맞서 싸우며 진리 탐구에 매진하는 것이 곧 계몽의 과제임을 역설하고 있다. 군주는 사회계약에 의해 부여된 임무를 이행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철저히 공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40

계몽을 촉진하여 국가체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진보가 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진보는 진행하는 동안에는 눈에 덜 띄게 마련이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억누르는 것은 오직 두 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첫 번째 경우는 우리 자신이 현재 상태에 안주하고, 불행을 줄이고 행복을 고무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하고, 우리가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억눌렸던 본성이 일거에 폭발해서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억압자들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혁명의 길이다.

141

국민들이여, 다른 모든 것을 다 내주더라도 사상의 자유만은 절대로 내주지 마라!

147

인간은 바로 자기 자신의 소유이고, 항상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 불꽃은 바로 인간의 양심이다.

149

시민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특정인과 계약을 맺거나 특정인이 다른 모든 구성원과 계약을 맺는 기초 위에 성립

154

우리의 배움과 교육을 위해 가장 풍요로운 원천 중 하나는 정신과 정신의 교류이다. 우리는 이 샘에서 물을 길어 올릴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활동과 자유와 인격을 포기하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적 계몽과 거짓된 정치적 계몽>_프리드리히 카를 폰 모저

195

모저는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영향을 의식하면서 쓴 이 글에서, 부적절한 곳에 너무 많은 계몽의 빛을 투여할 경우 실제로 해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앙이 없는 계몽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안식과 위안을 없애버려 위험할 수 있따. 지금 통용되는 자연법 이론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모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전쟁을 야기하고 사회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말한다.

모저가 발간한 저널 <신 애국논총>이 “빛을 비추되 불을 지르지는 마라”라는 모토를 표방한 것은 그의 절충적 중도노선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198

진리와 자유의 명분을 앞세워서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파헤쳐도 무방하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믿음이 횡행한다면 세상에 어떤 왕의 권좌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며, 어느 가정의 가장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200

신앙에 기반을 두지 않은 모든 계몽,

계몽은 인간을 독단과 오만과 격정에 사로잡히게 하고, 타락한 천사 루시퍼의 자만을 부추긴다.

201

진리는 중용에 있다. 이 중용의 길을 찾는 사람, 이 중용의 길을 올바르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을 것이다.

<계몽이 혁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_요한 하인리히 티프트릉크

212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인류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이성적인 활동을 통해 점점 더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건히 서 있다고 자만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214

진정한 계몽은 폭력적인 혁명을 조장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히려 반대로 폭력혁명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이다.

옮긴이 해제

칸트의 계몽 개념에 대하여_ 임홍배

244

계몽은 미셸 푸코가 말하듯 ‘우리 자신의 역사적 현존재에 대한 부단한 비판’을 통해 ‘자율적 주체 형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에토스’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계몽은 단지 ‘지식’과 ‘앎’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어가는 항구적 실험의 성격을 띤다.

246

스스로 사고하려는 모험은 결단과 용기를 구한다.

칸트에 따르면 심지어 아무리 풍부한 지식을 갖춘 사람도 지식의 활용 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계몽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247

칸트, “만약 나의 지성을 대신하는 책이 있고, 나를 대신해서 양심을 지켜주는 성직자가 있고, 나를 대신해서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가 있다면 나는 굳이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나는 비용을 지불할 능력만 있으면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신해서 성가신 일을 도맡아 줄 것이다.”

248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는 ‘게으름’에 못지않게 그런 비주체적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도록 조장하는 사회체계에도 문제가 있다.

252

칸트는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계몽의 필수적 요건으로 설정하고 있다.

공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공중에게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253

인용문의 두 번째 문장은 국가권력이 생각의 자유는 존중하면서 표현의 자유는 제한해도 무방하다는 통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맞서 칸트는 공개적으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표현의 자유야말로 올바른 생각에 도달할 수 있는 전제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258

공론장은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동시에 다양한 견해를 향해 열려 있는 자유로운 토론공간이다.

263

하만이 이처럼 공중을 불신하는 것은 아직 계몽되지 않은 공중의 집단의지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표출될지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64

집단대중에 대한 하만의 근본적 불신은 공동체적 사고를 결여한 맹점이라 할 수 있다.

269

그런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계몽적 자각은 곧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혁명”이다.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주관만 앞세우는 자의적 생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되 자신의 생각이 이성의 보편타당한 원칙에 부합하는가를 부단히 되묻는 비판적 자기성찰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계몽은 “성찰적 계몽” 을 지향한다.

칸트의 계몽사상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 개념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와 직결된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근대의 주체 중심 철학과 주객 이원론의 배타성을 극복하기 위해 상호주관성에 입각하여 의사소통 이론을 구축하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후기 철학과 상통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270

풍부한 지식을 쌓은 사람이 오히려 지식의 활용 면에서는 계몽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지적은 지식을 부와 권력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당연시하는 시류에 경종을 울리는 고언이라 하겠다.

게시자: Phronesis.ysb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삶

댓글 남기기

워드프레스닷컴으로 이처럼 사이트 디자인
시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