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저자사항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 지은이: 김광현
김광현[1953-]
형태사항430 p. : 삽화 ; 23 cm
주기사항공간서가는 월간「Space(공간)」의 편집부가 발행하는 건축예술분야 단행본 브랜드임
표준번호/부호ISBN 9788996671640 03610: ₩28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540.04 듀이십진분류법-> 720.2
주제명건축[建築]
책을 펴내며 = 8
추천의 글 = 12
1. 공동성의 건축
공동성을 생각한다 = 20
시간과 땅속의 공동성 = 29
건축은 근원을 아는 자의 큰 기술 = 37
인간 모두에게 속하는 바를 묻는 건축 = 44
건축이 되기 ‘이전’의 건축 = 54
내-공동-성의 깨달음 = 63
폐허는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 = 70
‘나의 건축가’ 속의 건축 = 76
건축하고자 하는 이들의 건축 = 83
질투와 우연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소 = 89
공동성을 일으키는 현재의 과거 = 97
한 칸 방의 공간적 원상 = 106
2. 오늘의 건축을 생각하는 눈
건축은 여전히 ‘건축’인가? = 114
거주가 불가능한 도시의 주거 = 132
놀이의 건축 = 147
‘풍경’은 뒤로 물러서는 것 = 154
재생은 건축의 근본이 새로 자라게 하는 것 = 166
유목형 사회의 도시한옥 = 171
주택의 미래, 미래의 주택 = 178
3. 의심해야 할 건축의 논점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건축을 사랑했거든요.” = 188
배제하는 건축 = 197
‘인문학적 건축’을 의심한다 = 203
건축의 과대망상증 = 207
건축하는 이들이 피해야 할 말, ‘비움’과 ‘침묵’과 ‘미학’ = 210
‘건축이 삶을 만든다’고 믿는 두 건축의 한계 = 221
건축의 자연, 한국 건축의 자연 = 224
4. 우리는 근대건축을 어떻게 물었는가?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 근대의 정신주의자 = 242
아돌프 로스의 묘를 찾아간 이유 = 254
한국 현대건축의 전통적 표현과 그 파생 개념 비판 = 262
주한 프랑스 대사관 : ‘근대’의 갈등을 잃은 한국 현대건축의 기점 = 274
규방의 건축을 벗어나기 위해 = 278
4ㆍ3 그룹을 곁에서 생각하며 = 289
공간그룹의 미래와 김수근 = 294
5. 건축의 공공성은 사회를 위한 것
한국 건축에서 공공을 말하다 = 310
건축제도와 건축의 공공성 = 322
왜 문화에 근거한 건축정책이 필요한가? = 330
건축설계산업의 방향 = 338
표류하는 건축설계 대가, 이대로 수수방관 할 수 있는가? = 347
좋은 공공건축물을 만드는 조건 = 354
6. 건축가가 자기 자리를 얻으려면
건축의 경계 바깥에서 가능한 모든 것 = 362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 367
‘만드는 자’와 ‘그리는 자’ = 371
건축가의 성명표시권 = 373
건축가의 자리를 없애는 사회 = 377
건축 단체의 통합은 사건이 아닌 의무 = 380
건축과 저널리즘, 또는 건축저널의 힘 = 385
건축하는 사람들의 숙제 = 390
7. 건축교육은 건축의 미래
건축이론은 따라가지 않기 위한 것 = 398
“학부 5년제 문제 있다”는 주장의 문제 = 405
그들은 왜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가? = 414
건축학과 지망생에게 해 준 말 속의 건축 현실 = 418
건축은 사람을 가르친다 = 422
<책을 펴내며>
-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이 있다. 이를 ‘공통감각’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건축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가치와 본질이 있다.
- 건축의 공동성이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건축을 만들고 모든 사람에게 건축을 나누어 주는 본래의 길을 달리 말한 것뿐이
- 지속적인 가치. 그런 것이 우리 모두에게 속해있다. 바로 건축이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갖는 역할이 있다면 이러한 공동성을 통해서다.
- 오늘의 건축가는 말로는 사회를 말하지만, 실은 사회에 복종한다는 의미인 경우가 너무 많다.
- 공동성의 건축은 때로는 사회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 건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교수professor인 나는 profess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공언하고 선언하며 고백하는 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런 나에게 공동성이란 건축이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의 지속적 가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공언하고 선언하며 고백하는 근거가 되었다.
- 직능으로서 학자인 교수는 정치와 경제를 넘어서는 사회이념의 정점에 선다. … 그러므로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하는 교수는 더 이상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 건축은 다양한 과정들이 겹쳐져 완성되는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건축의 동기를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며 향유하는 대중의 가치관이다.
- 건축을 생산하는 전문성과 건축을 소비하는 대중성 사이를 연결해 하나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도 또 하나 강조되어야 하는 학자들의 몫이다.
- …그러나 내가 공동성을 중시하는 이유는, 자신들 유지하기 위해 자꾸 닫혀 있으려 하고 한정된 ‘우리’라는 생각에 갇힌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 가라타니 고진 왈.
- 그러나 공동성은 공동체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러한 공동성을 평생토록 강조한 이는 다름 아닌 루이스 칸이었다. – 인간 속에 있는 영원성에 대한 그의 감각이다.
- 따라서 공동성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서있다.
- 이제 만들어 온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 공동체적이라면, 칸이 말하려는 바는 사회적인 것이다.
- 그는 도서관의 본성은 도서관이라는 건물과 다르다고 누차 강조했던 것이다.
- 공동성은 타자로 이동하기 위함이며, 공동체가 아닌 사회적인 관계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 내부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한 저장고와 같은 것이다.
- 그렇다면 공동성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건축만이 지니는 단독성을 얻기 위함이다.
-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음을 뜻할 때, 이를 단독성이라고 한다. 공동성은 어떤 건물에 단독성을 주는 근거다.
- 파주출판단지 구상의 가장 큰 개념으로 내세운 것이 ‘공동성’이었다.
- 건물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건축가의 존재 이유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실에 주목하면 건축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 건축가에게 건축이란 오히려 공간적 작품이기 이전에 시간적 존재이다.
- 아마도 주택처럼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운 건물은 없을 것이다.
- 주택을 설계하는 것은 건축주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 스미어 있는 잠재적인 무의식을 발견하여 생활을 물질로 담아내는 일이다.
- 건축이란 인간의 희망과 욕망, 주어진 땅의 포용력을 ‘번역’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번역이란 주어진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 이렇게 하여 인간의 희망이 땅 위에서 번역됨으로써 땅은 건축과 함께 ‘사회화’된 풍경을 만들어 낸다. … 답은 이미 인간과 시간과 땅속에 본질로서 주어져 있으며, 건축은 그것을 각종의 기술과 재료로 번역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 -> 번역으로서의 창조.
- 집을 짓기 전에는 건물이라는 형태가, 눈에 띄는 모양이 주인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지어지고 나면 땅과 하늘과 나무와 공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 건축은 공동의 선을 행하는 아주 평범한 방식의 하나다.
- “모든 인간은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건축가이기 때문입니다.”
- 건축과 건물이라는 배타적인 정의가 너무나도 우리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고 있고, 또 많은 건축가가 나서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건축가는 대세 최상의 건축만을 작품이라고 여기는 이들이다.
- 건물을 짓는 것은 하이데거가 지적하였듯이 거주하고 사고하는 것의 출발이며 근본이다. 짓는 것과 건물이 모두 building이다.
- 결국 건축은 승화된 정신이 되어 버린다.
- 콘셉트를 강조하게 되는 건축설계를 계속하다보면 무언가 계속 구별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건축설계를 열심히 해야 하는 자는 이런 ‘구별’에 열심이어야 하는가?
- 공동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가치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변하지 않는 가치는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근본주의자가 말하는 불변의 가치가 전혀 아니다. ‐> 시대’들’의 정신
- 철학자들에게 철학은 한마디로 생각을 ‘건축’하는 것이었고, 앎의 ‘건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크 데리다는 건축처럼 부분과 전체가 견고한 구조 속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서구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견고한 구조 속에서 질서를 이루고 있는 건축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였다.
- 건축은 이제 근원의 가치를 기술로 번역하는 ‘큰 기술’이다. 그러려면 작품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하고 건축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건축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건축으로 만드는가를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 사람들은 칸을 매우 철학적이고 고답적이며, 원칙만을 추구하는 고집스런 건축가로 잘못 보고 있다.
- 그는 건축은 외적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존재하는 것은 건축에 비쳐진 작품임을 강조하고 있다.
- 칸은 한편으로 철학적으로 보이고, 본성을 탐구하며, 형태와 오더에 대해 노자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하고 싶은 강한 주장은 단 한가지였다. …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를 비추는 해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시설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때라고 본다.”
- … 따라서 모든 인간의 시설이 근거한 무엇에 충실한 것이 시설의 본질이냐고 묻는 것이 이 질문의 요지이자, 그의 건축적 사상이다.
- 다만 이 공동성이라는 말은 최근 몇몇 건축가들이 서로 양보하며 나눈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공동성이라는 말과는 궤를 달리한다. 후자의 공동성은 차라리 공유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 건축에는 먼저 인간이 있다.
- 루이스 칸, 세상을 떠나기 한 반 년 전의 강연 중, “저는 이렇게 믿어요, 한 인간이 지니는 가장 커다란 가치란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줄 아는 데 있다고 말이지요. 제가 해 온 방법은 정말로 저만의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제 것을 흉내를 낸다면 여러분은 몇 번이고 수없이 죽는 짓을 하는 겁니다.”
- “이 사실이 정말 소중합니다.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속하지 않은 이것이 우리가 만든 작품 중에서 더욱 좋은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 리처드 로저스의 디테일은 재료와 재료가 공학적인 이유에서 이어지고 구축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아니라 공간을 발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디테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루이스 칸이 본질이며 시라고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이 건축의 ‘공동성’이라는 ‘사회적인 근거’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 칸의 건축은 그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축 그 자체가 건축의 힘과 오랜 시간을 획득하였다.
- 단편과 차이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건축과 그 이론을 관통하여 표면의 빛남에 눈을 뺏기지 않고, 근원을 사려 깊게 추구하는 것, 우리가 칸을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 새로운 것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 존재가 진실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읽을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며, 내가 얼마나 삶을 태우며 늘 새롭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 그는 말한다. “건축가는 조직 속에 들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건축가는 자유로이 사고하고 창작해야 한다.”
- 근대 공업 기술의 분업화와 전문화에 따라 이러한 전능의 건축가상은 붕괴되고, 형태만을 조작할 따름인 탈이데올로기적 디자이너로 변모하였다.
- 연결의 건축. Architecture of Connection.
- For Kahn, space equals spacing
- Volume Zero.
- 그는 Form을 모양은 없으나 명확한 건축의 의지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 칸이 본질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이유는 이미 정해져 있는 본질을 확인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의 건축적 현실을 바꾸어 놓으려는 데 있었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런 건축의 상태를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렇게 되기 위해 그는 본질을 물어야 했다. 이것이 똑같이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현재의 건축의 상태에 만족하며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원리주의자적 건축가, 근본주의자적인 건축가와 그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다.
- 내-공동-성은 일종의 초월성으로, 초월 속에서의 공동성이다. 그곳에서는 당신과 내가 모두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 건축물은 인간의 바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
- … 따라서 내-공동-성은 그렇게 ‘공동적이라는 것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 먼저 ‘초월적’이란 신과 같이 인간 밖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무언가와 같은 것이라면, ‘초월론적이란 이제까지 관습적으로 생각해오던 무언가의 공통의 규칙이나 관습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지닌다.
- 아르케는 시작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곧 소행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 폐허란 고고학자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낭만주의자에게는 감상적 대상이 되지만 건축가에게는 가장 건축적인 사실을 내포한 것이다.
- 폐허는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고, 확정된 용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과정이다. 폐허에는 건축이 시작하는 감각이 스며 있다.
- 오히려 폐허는 완성되기 이전의 상태, 막 구체적인 용도를 갖기 이전의 건축가의 의지, 곧 건축물의 구축 과정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건의 일부이다.
- 칸 “표현하려는 바람은 최초의 돌이 놓이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 이처럼 칸은 건축가의 의지를 보려 하였다.
- 칸 “이제 용도에서 해방된 조용한 폐허는 야생의 초목을 그 주위에서 즐겁게 뛰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옷소매에 매달리듣 아이를 즐겁게 바라보는 아버지와 같다.” ->가능성을 가진 장소.
- 출판은 건축을 일용품으로 흡수하고 그것을 물신화함으로써 초월성의 가능성을 파괴시킨다. 건축잡지는 도면이나 사진을 무기로 하여 건축을 소모품으로 변형시킨다. 잡지는 건축이 마치 갑작스레 매스와 볼륨을 잃은 것처럼 세계 주변으로 돌아다니게 하고 그런 방식으로 건축을 소모한다.
- 건축이 전해 주는 진정성.
- 바람직한 우아함과 매력은 억제와 기품에서 얻어진다.
- 미술관에서 빛은 현재라는 세계와 과거의 세계, 곧 예술 작품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 인간에게서 그리고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바람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열망하는 것이다.
- 연구자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치 자신의 주택에 있는 것과 같은 방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늗 발견이었다. -> 수도원의 개실에 비유.
- 소크 박사 “희망이란 꿈에 있고 상상력에 있으며, 꿈을 실현해 주는 것은 사람의 용기다.”
- 소크 연구소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생각의 원천을 방해함이 없이 받아들이는 건축.
- 건축은 예술기기 위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행위의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 성립하는 것이다.
- 건축은 익명적이다. 이 익명적이란 이름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농가처럼 사회의 여러 가지 문화의 힘들이 건축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건축의 보편성을 말한다.
- 하이데거 “건물은 사람이 사는 풍경인 땅을 제각기 인간에게 친근한 것으로 만든다.”
- 지금 분명한 사실은 종래의 건축에 대한 관념, 가치, 방식은 이미 사회와 연속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건축은 왜 이렇게 독립되고 고립된 존재로 지어지는 것일까?
- 만드는 방법인 architecture는 세계는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형이상학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만드는 것이란 무언가의 이미 정해져 있는 의미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 이런 도시의 조건 위에서 예술적인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의 사적인 욕망이 더해진 건축물은 도시 안에서 고립하여 설 수밖에 없다.
- 랜드스케이프 건축이란 도시에 건축을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것이고 경계가 상실되는 것에 대한 대응방식이다.
- 이렇게 되자 도시에서 공과 사의 경계가 희박해졌고, 공과 사 안에서 개인은 일시적으로 고립되게 되었다.
- 이제 공공공간은 사적인 공간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도시공간은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그 안에 포함한다. 이러한 공간을 집합공간이라 부른다. -> 개인 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을 담는 다수의 공간기 집합하여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 이제는 휴대전화가 다른 방식으로 건설된 강력한 도시의 인프라다.
- 현대 대도시의 장소를 편의점이나 창고와 같은 B급 건축물을 통해 생각한다면 도시에 대한 접근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 편의점은 이른바 지역성과 장소라는 개념을 따르지 않는 빌딩 타입의 출현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 장소는 곧 사건, 곧 사람들의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
- 지속가능성을 설명할 때 환경운동가 레스터 브라운의 다음 말을 자주 인용한다. “이 환경은 조상에게서 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에 살게 될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 만들어지는 과정이 건축의 본질이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 칸 “도시는 그 거리를 걷고 있는 조그만한 아이가 언젠가 이렇게 되어야지 하고 마음 깊이 알아차릴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
- 하이데거가 말하는 거주는 ‘살아가는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말한다. 주택이 주거가 아니듯이, 주거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만이 거주가 아닌 것이다.
- 준공된 주택은 주택으로 보는 주택이며, 준공 이후의 것을 보는 것은 주거로 보는 주택이다.
- 헤이넨이 대도시에서 거주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내가 보기에 사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집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짓는 것과 거주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 다만 거주하는 것과 짓는 것이 분리된 오늘 가능한 논의는 두 진영의 또 다른 관계를 찾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주택이 거주를 잃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주택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보는 데 있다.
- 지금의 도시주거는 도시에 있는 주거지, 도시를 만드는 주거가 아니다.
- 도시를 만드는 건축이 도시 건축이다.
- 우리나라 집합주택은 가족과 행정이 합친 행정-가족 중심형 주택이다.
- 이제는 가족과 행정의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
- 주거란 결국 내 몸 주변이다. 그것이 건축이든지 도시든지 종래의 집합주택에서 크게 부족한 것은 환경과 사람의 관계를 내 몸 주변으로 파악하고 연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 심지어는 모든 거주자가 자기 스스로 자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주자가 밖에서 도움을 찾는 주거를 생각한다.
- 본래 커뮤니티란 사람들이 스스로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다고 여길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법이다. 완전히 자립한 사람은 배타적이어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다.
- 표현주의 건축은 만드는 사람의 조형 의지와 관련하여 생각한 결과다.
-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 놀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결국 자유를 얻는 일이다.
- 여행을 놀이라 생각한다면 여행의 즐거움이란 가이드북에 없는 장소나 사람, 물건을 만나는 데 있다.
- 곧 건축에서 놀이는 자유로움이요, 인간의 관습에 묶인 틀 주변과 사이에 눈에 뜨이지 않게 존재하는 가능성을 도시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 놀이의 공간에 기대어 보면 제도 밖에 있는 공간의 가능성을 찾게 된다.
- 놀이의 건축에서는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듯이 사람의 행위가 장소를 차지한다.
- 이 풍경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아니라 현재의 도시와 건축의 조건에서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오늘날 풍경이라는 말은 주어진 도시의 현실에 일단 긍정하고 거기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입장에 서기 위한 것이다.
- 미래의 주택과 그 속에 사는 인간이 특별하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어두운 측면에 의해 왜곡되어 온 주거의 본질, 인간의 본질, 나아가 건축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의 주택이요 주택의 미래다.
- 이 말은 건축을 배신하기 시작하게 되는 근본적 배경이 되는 첫 번째 발언이다. -> 그런데도 건축학과 수험생은 “오늘날의 건축은 이런 것이 잘못되었으니 이렇게 고치고, 인간생활의 관계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태도에서 건축을 시작하지 못한다.
- 잘 모르는 학생이나 기성 건축가나 바탕은 둘 다 똑같아서 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 두 진영은 모두 건축을 개인적, 낭만적으로 이해하지 현실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 지금 우리의 건축이 허학이기 때문.
-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더욱 실체와 일치된 생각을 드러내고, 또 그 생각을 실체로 만드는 일을 분명히 해야 마땅하다.
- 건축이 허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유명 건축가들의 이런 허세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른 학과 교수는 몰라도 건축을 전공하는 교수는 논문 100편 쓰는 것보다 이에 못지않게 설계비 올리는 일에 나서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논문 100편보다, 국가를 상대로 한 계약법에 건축이라는 글자 두 자 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 그렇다면 침착하고 사려 깊은 당신이 해결해 보시라. 그리고 지금이라도 이 일에 제발 나서 보시라.
- 우리 건축의 현실은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이며, 분파적이고, 이기적이다. 밖에 대하여 이야기를 걸 줄 모르고, 심지어는 자신이 받아야 할 대가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못하는 지식집단.
- 그럼에도 더 슬픈 일은 이런 주장을 하는데도 “당신은 틀렸소!”라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는 사실이다.
- 그런데도 무슨 말을 하면 건축가는 언제나 그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거나 말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속을 보면 다 같은 말인데,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려고 애쓴다. 특히 도시설계 하는 사람들은 말을 참 잘 만들어낸다.
- 건축하는 사람, 특히 건축가는 말을 현란하게 잘하는 것 같은데, 글을 못 쓴다고.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줄 아는가? 글을 못 쓴다는 것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개념이 없다는 뜻이며, 무언가를 함께 나눈다는 공통의 개념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다.
- 우리는 건축응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배제하는 방법을 아름답게 가르치고 있다고 실토해야 한다.
- 작가인 건축가가 되려면 무슨 미학이라는 개념을 서너 개는 표방할 줄 알아야 한다고하여 숙성되지 못한 이야깃거리를 함부로 유포한다.
- 요즈음 건축가들이 말하는 공공성은 감성적이며 추론에서 나온 것이 많고, 계획적인 공공성 구현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참 많이 느낀다.
- …건축가는 공인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건축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첫 걸음이다. 물론 아이로니컬한 말이다.
- 건축 인문학, 인문학적 건축이라는 식의 포장술은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특수한 말이다.
- 진정한 건축 인문학이 되려면 건축학자가 아닌 인문학자가 철학, 역사, 심리학, 언어 등 자기의 고유한 인문학에서 건축을 연구해 줄 때 가능한 용어다.
- 하는 일을 잘 하고, 하는 일을 건축으로 다부지게 잘 설명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 미학에 근거하는 건축은 피하라.
- 침묵의 건축은 없다. 다만 침묵의 건축이기를 바라는 슬로건만 있을 따름이다. 어떤 사진은 침묵하는 건축을 찍은 것이 아니라, 건축을 침묵하는 듯이 보이도록 찍은 것일 뿐이다.
- ‘~미학’이라는 말은 말하고 싶은 바가 있기는 한데 정확하게 말할 줄 모를 때 적당히 뭉게 버릴 때 쓰는 말이고, 없는 내용을 있는 것처럼 달콤하게 덮는 당의정 같은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자신의 건축을 기계 미학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기계에 대하여 정면으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도 침묵의 미학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그는 침묵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무한성이고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그의 책을 이해한 사람은 침묵을 가지고 그렇게 건축을 말할 수 없다.
- 건축은 삶을 성실하게 담는다.
- 서구의 건축은 자연과 대립한 건축이요, 한국 건축은 자연과 순응한 건축이라는 시각은 지금도 유행하고 있다.
- 문화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다. 그러나 건축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가까워지려는 마음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같다.
- 자연에 순응하려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연에 거스르는 토착적 건축은 없었다. 그러니 내게 익숙한 마을의 장면을 떠올리며 한국 건축만이 자연에 순응했다고 판단하지 말라.
- 버나드 루도프스키는 저서 ‘건축가 없는 건축’에서 환경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 기하학적 조형은 자연을 거스른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자연과 풍토에 따라 다르다.
- 건축에 대하여 자연은 본래 건축의 적이다. -> 건축이란 이렇게 세워지는 것인데 ‘건축은 자연을 사랑하며 만들어진다’는 것은 건축을 만드는 사람 쪽에서 하는 말일 뿐.
- 오히려 건축으로 어떻게 자연을 사랑할까를 배우며 흐뭇해지기 전에, 자연과 대치할 수밖에 없는 건축의 한계를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 자연을 효율이나 공리적인 것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더 이상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을 갖는 것이 자연에 대한 건축가의 도리다.
- 르 코르뷔지에가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특히 ‘건축은 살기 위한 기’라는 저 유명한 정의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 오히려 그는 사물의 도구성을 시적으로 변화하려 한 전통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달리 말해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신정신이란 근대적 정신이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는 정신을 고양하는 것.
- 르 코르뷔제 “내 손이 지나가 버린 세기의 쓰레기로 더럽혀져 있다 해도, 나는 그 손을 잘라 버리지 않고 오히려 씻고 싶다. 과거의 세기가 반드시 내 손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풍부하게 해준다.”
- 그는 정신주의자다. 고원한 정신이야말로 근대인이 가져야 할 정신이라고 그는 보았다.
- 그가 말하는 주거기계는 단순히 물리적인 주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정신을 생산하는 기계였다.
- “건축은 전화기 속에도 있고 파르테논 속에도 있다.”
- 기술과 건축은 은유적인 관계 속에서 등가물이 된다.
- “모든 예술의 목적이 이제 분명해졌다. 그것은 시적인 것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 그는 건축과 기술을 양극에 놓고, 이 두 개를 변증법적으로 융합하거나 분리시켰기 때문.
- 건축은 그 자체가 자율적인 법칙을 갖는 내적 세계로서 시인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공학은 새로운 사회생활을 반영하는 외적인 세계로서 기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 그가 말하는 기하학과 백색은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미건조하고 획일적읻 형상을 대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특히 그에게 백색이란 “우리의 정신이 그 전방에 넓게 열려 있는 광대한 사막을 향하는 자유의 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응시였다.
- 르 코르뷔지에에게 기하학은 기술과 건축을 은유적으로 연결하는 가교였다.
- 흔히 르 코르뷔지에가 경직된 근대건축의 대표자로서 비판받는 것은 그의 도시계획에서였다. -> 그러나 사정은 다르다. 그가 이렇게 간단한 요소로 도시를 해석한 것은 당시의 열악한 도시 환경을 건축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그의 도시계획은 건축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열린 텍스트로서의 도시였지, 도시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작업이 결코 아니었다.
- 그의 건축에는 시학이 있다. 시학이란 비약이며 이 비약은 결코 연속될 수 없늗 두 가지 영역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 현실과 이상이 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현실과 이상이 만들어 내는 모순은 시와 은유를 통해 해소되어 있으며, 말레비치의 비대상성처럼 비어 있어야 할 근대건축의 순수형태는 이러한 이상으로 가득 차 있다.
- 기술이란 서정을 담는 그릇이므로, 그 서정의 폭만이 더 중요해지게 된 이상, 기술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정신은 근대적 정신이 아니라, 더욱 넓은 자연과 교감하고 태양의 풍경과 교감하는 정신으로 확대되어 갔다.
- 다시 말해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사정거리가 크다. 근대건축이면서도 현대건축의 시발점에 있고, 현대건축이면서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건축의 근원적인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 르 코르뷔지에의 위대함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며 건축의 정신을 중심에 두고 건축을 통해 인간과 예술울 접목시켜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진실을 말하였다.
- 아방가르드, 곧 전위의 선상에 서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그들은 극한의 선상에 서고자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무질서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이탈이란 정상적인 부분에서 빠져나온 것에 불과하다. 곧 정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이탈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계 자체가 단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 세계관에 따라 행동하는 바로 그 인간이 단편화를 불러 일으키고 또 그것을 증대시켜 나갈 따름이다.
- 우연을 절대시하고 혼성과 단편의 범람을 증폭하며 이를 즐기는 건축은 로스의 말을 빌리면 어떤 건물이나 죄다 큰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시끄러운 건축이다.
- 다시 말해 전위적 예술은 정열이며, 그 정열은 어떤 의미에서는 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광기는 연출하기 위한 광기이며, 작가의 작품을 세상에 유포하기 위한 과잉된 광기이다.
- 전통론이 대두되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립된 후진국이 다시금 문화적인 자주성을 획득하려고 할 때.
- 오래된 선행문화가 이질적인 외래문화에 종속되었을때.
- 그러나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점은 서양 문화에만 도취될 수 없다는 당시의 자각이 문화적 자신감의 결여라는 콤플렉스 위에 성립하였다는 사실이다.
- 전통의 문제를 외래문화와 구별 짓기 위한 수호적 전승의 의미로만 해석한다는 것이다. -> 구별이라는 안이한 방법 사용.
- 현대와 과거라는 서로 다른 시간 개념으로 표현되었을 뿐 최종적으로는 현대건축의 기능과 전통건축의 형태라고 하는 건축의 본질적인 과제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기념비의 어원은 remind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 루이스 멈포드같은 사람은 기념비 또는 그러한 성격을 지닌 건물을 “바람직하지 못한 은유 곧 무의미한 장대함, 의도적인 진열, 지나친 인상이라는 특성을 갖는 것”이라 비판한다.
-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나아가야 할 기념적인 건축물을 이와 같이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면 무언가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으리라는 애매한 기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 문제는 집단적으로 기억해야 할 사건을 어떻게 보고 이를 형상화하는가 하는 데 있다.
- 이 건물은 한국의 현대건축의 귀중한 출발점이 이데올로기를 삭제한 ‘시정’이라는 레벨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말한다.
- 다시 말해 긴장되고 대립할 만한 소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대립의 소재를 내부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이상, 건축은 외부의 요인에 의해 침식되어 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 한국 현대건축이 대립과 긴장의 소재를 찾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건축의 개인적 창작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문제를 건축가 개인의 감성으로 단순화해 버리거나, 주관적인 느슨한 관조를 건축에 투사해 보는 일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 건축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바로 이처럼 건축을 순수하게 외부의 산물로 여기겨나 아니면 작가의 내면적인 세계만으로 국한해 두려는 데 있다.
- 근대건축에 대한 생산적인 독해 없이는 현대건축의 어떠한 것도 새로워질 수 없다.
- 한국 현대건축 속에서는 이같이 철저한 테크놀로지관에 입각하여 자신의 건축을 전개해 가는 예를 보기 힘들다.
- 이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건축을 하나의 일관된 원리가 아니라 상황적이며 전략적인 차원애서만 파악한다.
- 그러나 과연 역사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에 연속되고 있는 것일까? … 역사도 현실과 함께 인간에 의해 구성됟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역사를 불연속의 역사로 인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노스텔지어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건축은 여전히 역사를 ‘장대한 내러티브’로 신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과 역사의 회복이 미로와도 같은 현대건축의 한국적 돌파구가 된다고 믿고 있다.
- 김수근은 건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찾던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건물은 깄어도 그의 건축적 사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유감스럽게도 선명하지 못하다.
- 그리고 엘리트 건축가가 지은 세운상가도 이제는 세월이 흘러 B급 건축이 되어 버렸다. ‘건축가 있는 건축’인 세운상가도 ‘건축가 없는 건축’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 한국 건축의 미래를 말하고 싶으면 지금 공부하는 학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집중하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 김수근이 예술을 포괄한 것은 인간적인 포용력, 인간적인 카리스마였지, 이론적인 포괄은 아니었다.
- 김수근 선생이 중요하게 여겼던 좁은 의미의 한국성이나 전통 등과는 거리를 두고, 현대의 조건에서 건축과 문화를 바라보는 것이 미래를 위해 할 일이다.
- 오늘날 세계건축을 이끄는 건축가는 무엇으로 자신의 건축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현대의 조건’을 성실하게 묻고 있는 바에 근거하고 있다.
- “공간사옥은 부동산이 아니다, 문화다.”라는 기자회견은 결국 내가 하는 건축은 문화고, 그렇지 않은 너희들이 하는 건축은 부동산이라는 주장으로 배타적인 엘리트적 자세를 보여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배타적인 자세로 건축 세상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이제 그만하라.
- 건축을 비판하고 쇄신하자면 전혀 다른 말로 말하라.
- …일하다가 떠나게 되는 건축계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과 글은 어디 한군데도 없었다. 건축계는 참 매정한 집단이다. 과연 이런 곳이 건축계라는 곳인가?
- Ex) 서울시청사. 말하는 시티, 홀.
- …그러나 이 완공을 앞둔 건물이 도마 위에 오르자 비판은 감정적, 인상적, 유추적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공공건물을 대하는 태도다.
- 혹자는 말할 것이다. 건축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천만에 수준이상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실천에 비해, 그리고 ‘~의 미학’이라며 뿌리도 없는 건축 슬로건을 언론에 몇 개 잘 유포시켜도 대단한 철학이 담겨 있는 줄 알고 융숭하게 대접해 주는 너그러운 사회가 바로 우리나라다.
- 세빛섬. 왜 만들며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없아 행정적인 성과를 올리려고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
- 건축의 공공성은 건축에 관계되는 사람으로는 과연 누가 있을까를 잘 인식하는 것이다.
- 그러니 건축가만 공공성을 실현하는 유일한 직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 건축이 공공성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건축이라는 일 자체가 아름다움을 전제로 하지 말고, 정말로 다양한 배제의 구조를 가진 것임을 반성하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 건축사가 스피로 코스토프는 공공건축의 시작을 스톤헨지라고 보고 있다.
- I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제도라는 뜻과 함께 시설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시설로 표현되는 건축이 얼마나 인간의 제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 건축제도는 건축 밖의 한 부분이 아니라 마땅히 건축을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다.
- 그런데 문제는 건축이 제도와 동등한 상호관계가 아니라 제도의 영향 아래에’만’ 있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제도는 행정으로 실현된다. 건축가란 본래 건축잡지에서는 강한 존재지만 건축행정기관에 대하여 약한 전문직업이다.
- 보통 건축가들도 자기 이름과는 무관하게 건축행정에 능통한 건축사무소를 서슴지 않고 ‘구청 앞 허가방’이라 낮추어 부른다.
- 학교에 오래 있었던 내가 아는 한 건축행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건축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는 학교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위촉한 마스터 아키텍트, 공공건축가의 필요.
- 특히 도시설계 및 토목공학과의 접점 분야 등은 건축사의 엽역에 적극 도입하거나 참여해야 할 부분이다. 예를 들어 인프라스트럭처를 건축과 통합하는 예는 이미 유럽과 일본에서도 주요한 이슈가 되어 있다.
- 문화가 사람들에 의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국가와 사회적 자산에 있어서 가장 최대공약수인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 사회에 대하여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구조물. 그것이 바로 건축이다.
- 기술을 하대하는 풍토에서는 건축은 문화 속에 여간해서 제자리를 잡기가 어려운 토대를 가지고 있다.
- 건축설계 커뮤니티.
- 원인은 다 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데 결집되지 못한다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 잘 설계된 학교는 매력적인 학교이기 이전에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 …이것은 공간과 규모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시간’을 설계하는 것이다.
-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 세상에는 낮에는 해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해는 사라지고 무수한 별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건축은 예술을 넘어 생활을 품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 해결책 없는 비판은 불평이다. 비전과 대응을 보여야 한다.
- 그러니 건축가는 건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건물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도록 ‘그렸을’ 뿐이다.
- 오히려 건축가들은 ‘그리는’ 행위 안에 갇혀 가고 있다. 건축가는 ‘만드는’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 건축이란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인 가치를 동시에 지닌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산물이다.
- 더구나 공공건물일수록 설계자를 존중하고 준공식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게 하는 것은 공공건축물을 짓는 이들의 책무다.
- …그런데도 이 사회는 건축가는 제쳐 두고 정치적, 행정적으로 윗분을 상석에 모시는 데만 열심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 건축계는 이와 같은 이분법의 연속이다.
- 최근 나는 건축과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그런데 차라리 문제가 밖에 있으면 답을 찾기가 쉬운데, 문제가 안에 있으니 찾기가 더 어렵다고까지 생각할 때가 많다. 참으로 유행어로 끝내서는 안 될 통섭의 실천이 요구되는 때이다.
- 최재천 이대 교수 : 통합은 물리적이고 융합은 화학적이며 통섭은 생물학적이라고 한다. 통섭의 특징은 개체가 뚜렷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건축계가 그 통섭을 말하고 싶으면 이 건축계의 구성 인자가 자기 존재를 뚜렷이 하면서도 생태적인 상호 관련을 맺는 지혜를 키워야 할 것이다.
- 21세기는 부분이 전체를 만드는 사회.
- 건축이론은 건축가 자신의 문제.
- 이론의 어원은 이미 그렇게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전체적으로 이해한다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건축에는 이론과 실천을 대립하여 바라볼 일이 아니다. 곧 이론읃 어떤 것을 경험한 이후에 다시 발견되는 바를 끝까지 모두 되돌아봄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건축이론은 건축비평과 목적이 다르다. 건축이론은 건축가가 다른 이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며, 건축비평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 어떤 건축가이던 간에 초등학생 30명 정도를 앞에 두고 가르쳐 보는 것이다. 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내가 얼마나 건축을 잘 모르는지 또는 내가 어떻게 해야 건축을 쉽게 생각하고 말하고 설명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기초건축교육의 필요. 건축을 통한 공공교육. Civic Education through Architecture.
- 건축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에 근거하지 않는다. 사람은 수학처럼 살 수는 없고 물리학처럼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건축은 단지 사람이 어떻게 거주하는 것이 더 ‘소중한’일인가에만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보고 배우며 중요하다고 듣는 장소, 물성, 지역성, 빛, 공동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인간에게 ‘소중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authenticity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진정성이 있는 삶이란 나의 내면적인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 실천하고 있는 소중한 삶을 말한다. 진정성이란 무언가를 나와 관련하여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 Walter Gropius “건축은 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