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 이 책에서는 건축의 공동성이라는 개념을 들어, 건축은 자연의 언어와 이성의 언어의 경계부에 있어야 한다고, 그렇다고 판단하며 자연의 언어(비판하는 점 : 실체, 근본), 이성의 언어(비판하는 점 : 허상, 본질 그 자체 ) 어느 한 곳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며 건축이란 정신의 언어로 그 그림자가 자연의 언어와 이성의 언어의 경계부에 드리워져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림자라는 건축의 정신의 단편을 느끼고 건축이라는 정신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신의 언어란 우리가 진정 깨닫지는 못하는 초월론적인 언어이다. 그렇다고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도 아닌, 그저 자연의 언어에서는 우리가 4차원 존재에 있는데, 그 존재성을 느끼게 하는 언어인 것이고, 이성의 언어에서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의미 부여를 하는 그 본질의 표현을 통해 존재성을 느끼게 하는 언어인 것이다. 두 언어의 공통점은 존재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이는 진정성으로 서술된다. 정신의 언어는 진정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진정성이 아니고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표제/저자사항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 사회와 인간에 지속하는 건축의 가치 / 지은이: 김광현
 김광현[1953-]

발행사항서울 : 공간서가 : CNB미디어, 2014
 

형태사항430 p. : 삽화 ; 23 cm

주기사항공간서가는 월간「Space(공간)」의 편집부가 발행하는 건축예술분야 단행본 브랜드임

표준번호/부호ISBN 9788996671640 03610: ₩28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540.04 듀이십진분류법-> 720.2

주제명건축[建築]

<책을 펴내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이 있다. 이를 ‘공통감각’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건축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가치와 본질이 있다.

– ‘모든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의 대다수의 사람’을 여기서는 ‘모든 사람’으로 일반화 한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은 확률이므로,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이 있다’라고 적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말은 과거를 포함한 인류로까지 가기 때문에 방대해지고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위 문장에 그래서 동의한다.

공통감각으로는 대표적으로 오감이 있다. 오감은 진정 몸과 뇌가 직접 소통하는 감각으로서 더없이 소중한, 우리 모두를 엮을 때 쉽고도 주요한 공통감각이다. 엮는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구별을 한다는 것인데, 오감같은 직접적인 1차원적인 감각은 진화라는 방대한 시간 속에서 우리 인류는 같은 언어로 경험되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구별을 하는 기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건축에도 공통 감각과 그에 따른 본질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건축에서의 공통 감각은 1차원 이상의 고차원적인 감각, 즉 생각일 것이고, 그 생각은 사상으로, 사상은 시대에 따라 반영되어 곧 시대라는 진화에 비하면 턱없이 짧기만 해서 그런지, 다양한 언어로 경험되고 이는 곧 구별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 가치도 사라진다. 건축에서의 그런 공통 감각을 논할 때면, 과연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가치와 본질을 그나마 포괄적으로 추구할 수 있으면서도, 결국 진정한 본질, 즉 근본주의자적인 진리는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도서의 저자인 김광현 교수는 그래서 진리가 아닌, 정신을 택하는데, 그 정신으로 공동성을 찾고자 한다. 공동성이 현 시대에 탐구되지 않았던 공통감각이고 그에 따라 현 사회에 필요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건축의 공동성이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건축을 만들고 모든 사람에게 건축을 나누어 주는 본래의 길을 달리 말한 것뿐이

다.

– ‘철학적’ : 그는 그저 인문학적 건축과 같이 건축에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먼저 틀을 벗기라고 말을 한다. 올바른 건축이라면 나는 그것이 건강한 건축으로 들리고, 건강하다는 것은 곧 살아있는 건축을 의미한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건축은 가능한 많은 사람하고 상호작용을 하여 이를 나누어 준다는, 봉사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본래의 길이라, 이 말을 들으니 지금은 가려져 있어서 사람들이 모든 곳을 길이라고 하고 저마다 다른 길을 갔다가 방향을 잃었다고 비판하는 것 같다.

지속적인 가치. 그런 것이 우리 모두에게 속해있다. 바로 건축이 사람과 사회에 대하여 갖는 역할이 있다면 이러한 공동성을 통해서다.

– 존재는 가치에 선행한다. 시간은 존재에 선행한다. 그래서 가치는 결국 시간에 종속적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속적인 가치라 함은, 결국 세대를 넘는, 시대를 넘는, 결국 이는 오감같은 공통감각이 되고자 하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 속해있다. 그러나 다음 문장에 사회에 대하여 라고 하니, 지속적인 가치는 결국 사회의 범위 주변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의 건축가는 말로는 사회를 말하지만, 실은 사회에 복종한다는 의미인 경우가 너무 많다.

– 그렇다. 결국 지속적인 가치를 말하는 ‘오늘의’ 건축가들은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관성에 이끌려 겨우 등속원운동하는, 복종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그런데, 건축계는 사익 집단이다. 건축주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들을 바라보자면 결국 복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암담한 현실이다. 진정 자유로움을 추구하려면 공익으로서, 이는 곧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터이다.

공동성의 건축은 때로는 사회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 건축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사회에 쉽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욕구, 의지가 있다는 것으로 보인다.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교수professor’인 나는 ‘profess’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공언하고 선언하며 고백하는 자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런 나에게 공동성이란 건축이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사회의 지속적 가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공언하고 선언하며 고백하는 근거가 되었다.

– 사회의 지속적 가치에 제일 기여를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곧 공동성이라고 선언한다. ‘교수는 공언하고 선언하며 고백하는 자여야 한다’라는 말에서 나는 의지가 꺾이는 듯한, 겸손이라 포장된 허무가 들어온다. 그러나 나는 이 코멘트라도 적는 글을 서술함으로서 나 또한 고백하고 있으므로 나 또한 건축가로서의 의지를 보이는 것 같아 허무를 이겨내고 있다.

직능으로서 학자인 교수는 정치와 경제를 넘어서는 사회이념의 정점에 선다. … 그러므로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하는 교수는 더 이상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 사회이념의 정점이라 하니 무의식적으로 나는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을 떠올렸지만, 이 생각부터 나는 허무로 복종하고 있었다.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자니… 그렇다, 나는 실천을 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고 나는 다시 느낀다.

건축은 다양한 과정들이 겹쳐져 완성되는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건축의 동기를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며 향유하는 대중의 가치관이다.

-즉 건축에서 결정적인 것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와 지휘자가 아닌, 관객의 언어가 제일 중요하다는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건축의 동기라 하면 곧 욕구고 이는 다시말해 의지다. 욕구를 실체로 구체화시키는 사명을 건축가는 지녀야 한다. 욕구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에 집중하는, 다시 말해 건축가는 초인같은 다리가 되어야 한다.

건축을 생산하는 전문성과 건축을 소비하는 대중성 사이를 연결해 하나의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도 또 하나 강조되어야 하는 학자들의 몫이다.

– 전문성과 대중성을 잇는 공통의 언어, 즉 언어의 기반으로 서술되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해야만 하는 사명도 건축가는 인지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전문가들하고 수많은 소통을 통해야 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진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진정성은 곧 신뢰요, 신뢰는 믿음이다. 우리 인류는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믿음은 사라지고 우리는 살아있음을 못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진정성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성을 생각하다>

건축공간의 경외, 성스러움, 근접하지 말아야 할 곳과 서 있어야 할 곳을 알게 해준 것은 지붕과 기단과 기둥이 아니라, 정작 땅과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 ‘정작’. 중요성을 땅과 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에 둔다는 말로 하여금 건축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고자 집중하는 것이 아닌, 그 이후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자는 말일까.

..그러나 내가 공동성을 중시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유지하기 위해 자꾸 닫혀 있으려 하고 한정된 ‘우리’라는 생각에 갇힌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 엥겔스는 가족이 제일 불평등한 조직이라고 한 것처럼, 그리고 범위에 따라 이타적인 것은 상대적이고 결론적으로 이기적으로도 다 치환이 가능하다는 사실로 보아 우리는 공동체를 재정의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고, 즉 속성에 따른 구별이 아니기도 한, 구별되어 버렸던 것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 왈.

“마르크스는 교역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을 ‘사회적’이라 부르고 있다. 규칙을 공유하는 자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공동체적’이다. 한편 ‘사회적인’관계는 우리가 의식하지는 않지만 관계 지어져 있는 듯한 타자와의 관계이다.”

-> 따라서 공동체는 닫힌 집단이 이제까지 자신을 유지해 온 규칙을 지켜 가기 위한 바탕이다.

– 이 정의로부터 이 도서의 공동성에 대한 엄밀한 선언은 시작된다. 결국 ‘사회적인’관계는 다리인 것이고, 뉴런이 아닌 시냅스인 것이며, 과정인 것이다. 게임의 플레이어가 아닌, 게임의 운영진으로, 고차원적인 사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건축가에게 이는 곧 고독이요, 리더이며, 숙명이지만, 그만큼 운명이다.

그러나 공동성은 공동체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러한 공동성을 평생토록 강조한 이는 다름 아닌 루이스 칸이었다. – 인간 속에 있는 영원성에 대한 그의 감각이다.

–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함이라, 인간은 영원함을 꿈을 꾸고 그러면서 속으로 담는다.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므로, 우리는 결국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에 대한, 감각을 원하는 것이다. 영원에는 시작이 없다. 그래서 초월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성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서있다.

-그렇다.

이제 만들어 온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 공동체적이라면, 칸이 말하려는 바는 사회적인 것이다.

->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체득하는 것.

–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은 다시 말해 그 공동체에서 논의 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이고, 그를 체득한다는 것은 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이는 일차원적인 공통 감각으로 느끼는 것인데, 이 공통 감각은 공동체 일원들도 다 같이 느끼므로 관성도 클 수 밖에 없다. 즉 사회적인 것은 규칙을 파괴하고 창조의 기회를 만드는 것인 것이다.

그는 도서관의 본성은 도서관이라는 건물과 다르다고 누차 강조했던 것이다.

– 후자의 도서관은 실체로 구체화된, 공동체로 존재하는 게임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도서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상 우리는 도서관이라는 언어의 선행으로 인지만 한 상태이지, 이해를 해야만 하고, 이해를 하려면 본질을 아는 것이 필수이다. 즉 이해를 하지 않은 응용 단계로 건너뛰어 생성된 도서관이라는 건물은 결국 죽은 것이다.

공동성은 타자로 이동하기 위함이며, 공동체가 아닌 사회적인 관계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 내부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한 저장고와 같은 것이다.

– 결국 우리는 내향적인 소통을 반전시키고자 공동성과 공동체, 그리고 사회적에 대한 개념들의 엄밀한 정의를 했다. 이질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 이는 곧 이벤트이며 사실상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놀라움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표현해낸 이는 창조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성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 건축만이 지니는 단독성을 얻기 위함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음을 뜻할 때, 이를 단독성이라고 한다. 공동성은 어떤 건물에 단독성을 주는 근거다.

파주출판단지 구상의 가장 큰 개념으로 내세운 것이 ‘공동성’이었다.

– 내향적인 소통은 결국 결속을 가져오고, 이는 질서로의 회귀를 뜻한다. 공동성은 다리의 역할로서, 회색 지대에 속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속해있다는 것을 시간에 대입해서 관철하면, 그것은 어디에도 속해 있지만, 다시 말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곧 건축의 정신이요 창조로 보여지는 것이다. 작년 가을 즈음에 파주출판단지를 간 적이 있다. 다름 아닌 승효상 건축가 분의 교보문고 본사 건물을 보러 갔는데, 건물들로 하여금 길이 생긴 것이 아닌, 길로 하여금 건물이 들어설 대지가 강조된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위의 건물들은 아쉽게도 여기서 말하는 공동성도, 공동체도 아닌, 그저 포트폴리오를 보는 듯한, 작품으로서 다가올 뿐이었다. 공동성에 어울리는 공명같은 살아있음을 느끼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이 오피스 건물로서 낮에 온 나에게는 쌀쌀한 가을바람을 버티고 걷고 있는 내 자신만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물론 미메시스 뮤지엄, 상업시설 같은 경우에는 확실히 사람들이 많아 그들과의 나는 그 건물 안에서 울림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끝이였다. 공동성에 대한 글을 읽으며 파주출판단지에서의 나의 기억을 계속 찾아본 결과, 그 정신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시간과 땅속의 공동성>

건물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건축가의 존재 이유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사실에 주목하면 건축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 즉 모든 과정에 건축가가 존재한다는 그런 권위주의적인 허상을 깨뜨려야 한다. 건축은 결국 나무를 기르는 것이 아닌,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일이다.

건축가에게 건축이란 오히려 공간적 작품이기 이전에 시간적 존재이다.

– 건축이란 시간적 존재. 그렇다. 어느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건축은 시간적 존재로서 우리 건축가는 밑의 글처럼 실천해야 한다.

->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는 사람, 사용하는 사람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시간이라 함은 사실 상 자연으로 보아 변화로, 상호작용으로 인지되고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가? 그렇다.

아마도 주택처럼 사람과의 거리가 가까운 건물은 없을 것이다.

주택을 설계하는 것은 건축주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 스미어 있는 잠재적인 무의식을 발견하여 생활을 물질로 담아내는 일이다.

–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내려면, 소통이 중요하다. 대화로서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건축이란 인간의 희망과 욕망, 주어진 땅의 포용력을 ‘번역’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번역이란 주어진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일이다. … 이렇게 하여 인간의 희망이 땅 위에서 번역됨으로써 땅은 건축과 함께 ‘사회화’된 풍경을 만들어 낸다. … 답은 이미 인간과 시간과 땅속에 본질로서 주어져 있으며, 건축은 그것을 각종의 기술과 재료로 번역하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 -> 번역으로서의 창조.

-인간과 시간과 공간. 곧 3간이다. 조직의 변화를 꾀하려면 3간 중 최소 한 가지를 바꾸어야 한다고 한다. 시간과 인간은 건축가가 바꿀 수 없는 존재다. 즉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려면 건축가는 공간을 바꾸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다. 다만, 각종 기술과 재료를 도구로서 공간의 본질을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집을 짓기 전에는 건물이라는 형태가, 눈에 띄는 모양이 주인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지어지고 나면 땅과 하늘과 나무와 공기,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 실상 자연으로 하여금 공간을 빌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건축은 공동의 선을 행하는 아주 평범한 방식의 하나다.

– 공동의 선의 실천의 방법은 매우 매우 많다. 사실 공동의 선은 우리 인류에게 필수적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소통과 협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건축가이기 때문입니다.”

<건축은 근원을 아는 자의 큰 기술>

건축과 건물이라는 배타적인 정의가 너무나도 우리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고 있고, 또 많은 건축가가 나서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건축가는 대세 최상의 건축만을 작품이라고 여기는 이들이다.

– 단편만을 보면 안 된다. 배타적인 정의로 하여금 가치의 구별까지 가버린 현재로서, 우리는 결국 언어의 정글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건물을 짓는 것은 하이데거가 지적하였듯이 거주하고 사고하는 것의 출발이며 근본이다. 짓는 것과 건물이 모두 building이다.

–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그 과정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접근하고, 건축과 기술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인간은 건축가라는 존재의 본질을 느끼고, 그 느낌을 토대로 거주하고 사고한다는 것인가.

결국 건축은 승화된 정신이 되어 버린다.

– 도시에서 사실상 우리는 방랑자가 되어 버렸고, 그저 과정으로서의 시간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단편에만 존재하여 변화를 못 느끼고 이는 곧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병에 걸리고 만다. 건축은 승화된 정신으로 보여지고, 우리는 결국 인지하지 못한 채, 그리고 발견하지 못한 채, 생각을 멈춘다.

콘셉트를 강조하게 되는 건축설계를 계속하다보면 무언가 계속 구별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건축설계를 열심히 해야 하는 자는 이런 ‘구별’에 열심이어야 하는가?

– 콘셉트를 강조하게 되는 건축설계에 구별을 되풀이하게 되어 버렸다는 책임을 묻기 보다는, 즉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또 아니라고 보는 .. 그저 콘셉트에 대한 엄밀한 정의가 나와야 할 것 같으면서도, 말장난이라고 보고 그 느낌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결정적으로 위 문장은 ‘구별’에 대한 비판에 집중해야 하는 글이다. 구별은 자연 법칙에만 해야 한다. 관념으로 하여금 자라난 인간은 구별하면 안 된다. 즉 인간에서 또 파생된 관념을 구별해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스스로 논리적으로 반박의 여지가 많다고 느낀다.

공동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가치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변하지 않는 가치는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근본주의자가 말하는 불변의 가치가 전혀 아니다. ‐> 시대’들’의 정신

-이데아와 시대정신의 차이는 시간의 범위에 있다고 본다. 즉 여기서 계속 말하고 싶은 것은 시대 정도의 시간 축으로 하는 변하지 않는 가치, 즉 공동의 가치를 필자는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건축에 있어서 공통감각의 범위를 시대에만 한정 짓는 것일까? 그 이상, 혹은 그 이내는 안 되는 것일까? 그 이내로는 공동체로 붕괴되고, 그 이상은 근본주의자들과 같이 승화된 건축이 될 터이다. 즉 지금 우리가 건축에 임해야 할 태도는, 한 단 한 단 계단을 차근히 올라가듯, 우리는 공간으로의 범위 확장이 아닌, 시간으로 존재하는 집단들의 범위를 한 단계씩 확장을 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선형으로 발전해야만 하는 우리는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이고 이는 곧 공동성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현대과학을 두고 거의 정상에 다 왔다고 봤다. 즉 이제 우리 인류는 시간문제라는 인과관계에 집중하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는 자세를 가지고 건축을 그가 유추한 과학의 단계와 비슷한 ‘정상 바로 밑’ 이라고 보고 탐구를 계속 해야 한다.

철학자들에게 철학은 한마디로 생각을 ‘건축’하는 것이었고, 앎의 ‘건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자크 데리다는 건축처럼 부분과 전체가 견고한 구조 속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서구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견고한 구조 속에서 질서를 이루고 있는 건축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였다.

-자크 데리다의 형이상학을 건축의 비유를 통해 비판한 것은 다름 아닌 내향적인 질서에 갇힌, 스스로 테두리를 긋기만 하고 그 안에서 겹겹이 파고들어간, 매듭을 묶고 있는 현실 아닐까. 모든 이들은 질서를 이루는 행위를 계속 해왔고, 그러길 원한다. 그러나, 그 질서란 복잡한 질서로 가고자 하는 목적인가 아님 단순한 질서로 가고자 하는 목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컴의 면도날의 방식으로 자연계를 서술하려는 것은 실제로 가능할 것만 같고, 우주의 공통 언어를 알아내고자 인류는 자신의 시간들을 쏟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자연계의 차원에서 초월하고자 가정을 이루는, 즉 상상을 하는 분야인 사람에 관련된 사고방식은 자연계를 탐구하는 방법론과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 지 상상이 되는가? 상상이 안 된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그것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경우고, 이는 상상에 그친 망상이라는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우리 인간은 시간 위에서 실체로서 존재하지, 그 정신이라는, 자아라는 것은 상상의 관념 위에서 구축된, 결국 탐구하고자 할 수록 심연으로 빠져드는, 권태와 불안의 굴레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관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건축’을 자연계의 인지가능한 대상으로 보지 않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만큼, 단순한 질서를 절대로 지향해서는 안 되며, 복잡한 질서로 가야 한다. 복잡한 질서는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 건축이라는 정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울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복잡한 시스템으로 넘어가 우리가 이해하게 될 수 없을 때, 그러면서 차츰 이해할 필요가 사라지고 우리는 진정 마술을 마법으로 보고, 환상에 빠지며, 비판을 멈추게 되고, 시간만이 평가하게 되는 진정한 공동성을 알리는 것이다.

건축은 이제 근원의 가치를 기술로 번역하는 ‘큰 기술’이다. 그러려면 작품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하고 건축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건축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건축으로 만드는가를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건축물은 작품으로 존재하고자 하면 안 되고, 그저 작품의 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건축은 그 틀의 본질을 살려야 한다. 루이스 칸이 말한 창의 본질처럼 말이다. 작품의 틀은 기술로 존재한다. 그 작품을 견고히 유지하고 지탱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결국 건축물이라는 틀 속의 작품은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같이 보고 같은 시간을 경험하고, 공동성을 느낀다. 물론 지엽적인 비유라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위의 ‘번역’ 의 말이 정말 와 닿는다. 건축을 해석의 태도로 받아들이면, 이는 곧 시간의 작품 대신 작가의 작품이 실리게 되고, 진정 공통 언어로 언어와 언어에 매끄러운 다리를 놓아주는, 즉 번역의 태도로 우리는 건축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해독-번역-해석 순으로 주관이 개입을 하고, 이는 다시 보아 현실-이상-환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 모두에게 속하는 바를 묻는 건축>

  • 사람들은 칸을 매우 철학적이고 고답적이며, 원칙만을 추구하는 고집스런 건축가로 잘못 보고 있다.

-당장 나 같아도 그렇다. 실은 그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며, 그와 나는 공동성을 못 느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 이 오해의 태도가 파괴되려면, 그와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다는 인지적인 수준의 경험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책과 영상으로 접하는 그의 모습은 살아 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간의 작품들을 보러 가야 겠다.

  • 그는 건축은 외적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존재하는 것은 건축에 비쳐진 작품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건축’ 이라는 것은 ‘하얀 빛’ 같은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의 목적론적 이론이 생각나고, 더 크게 보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떠오른다. 결국 이처럼 우리는 건축을 대할 때 건축의 존재가 아닌 존재의 건축으로 보는, 관점의 상대화가 필요하다. 

  • 칸은 한편으로 철학적으로 보이고, 본성을 탐구하며, 형태와 오더에 대해 노자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하고 싶은 강한 주장은 한가지였다. …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를 비추는 해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시설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때라고 본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도가도 비상도’ 라는 글이 있는데, 그 뜻은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다’ 라는 의미인데, 이처럼 우리는 그를 정의하는 순간 진정한 그가 아니라는 것이고, 그래서 실상 우리가 이렇게 글을 적고 읽는 행위 자체도 건축을 탐구한다고 말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확실히 루이스 칸의 어록들이 언뜻 노자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도덕경의 문구처럼 우리는 제 아무리 건축을 글로 표현해도 비유와 은유로서 존재하고, 본질을 탐구한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 루이스 칸의 말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데카르트의 잠언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한다 해서 본질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태여 말하지만 루이스 칸과 우리는 진리로서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 진정성으로서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 계속 글을 적는데 언어의 의미 범위를 설정해 나가는 말장난이다. 그러니, 건축을 언급하는 글들도 다 말장난이라는 일임을 인지해야만 한다. 허무하지 않는가? 이 모든 나의 사고를 적는 과정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작성을 계속 하고자 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나의 삶은 시대에 있어 너무나도 짧고,  글로서 간접적으로나마 나의 존재성을 기록으로 증명하여 진정성을 탐구하는 과정의 허식의 즐거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허식의 즐거움은 나에게만 그만 느껴야지, 건축에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 따라서 모든 인간의 시설이 근거한 무엇에 충실한 것이 시설의 본질이냐고 묻는 것이 질문의 요지이자, 그의 건축적 사상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 발췌를 해 놓았다. 인간의 시설의 본질이 곧 시설의 본질 아닌가? 그것을 질문하는 행위 자체가 그의 건축적 사상이라는 것인가?

  • 다만 공동성이라는 말은 최근 몇몇 건축가들이 서로 양보하며 나눈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공동성이라는 말과는 궤를 달리한다. 후자의 공동성은 차라리 공유성이라 해야 것이다.

-공동성은 다시 상기해 보면 다리의 역할이다. 니체의 ‘초인’ 같은 본질이고, 시냅스다.

  • 건축에는 먼저 인간이 있다.

-당연한 것. 그런데 시간의 축으로 인간 다음에 건축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것 같다. 건축이라는 본질에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 것인가?

  • 루이스 , 세상을 떠나기 전의 강연 , “저는 이렇게 믿어요, 인간이 지니는 가장 커다란 가치란 그것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아는 있다고 말이지요. 제가 방법은 정말로 저만의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것을 흉내를 낸다면 여러분은 번이고 수없이 죽는 짓을 하는 겁니다.”

-‘것’을 실체로서 이해를 한다면, 피상적으로 이해가 된다. 한 인간이 지니는 가장 커다란 가치라.. 성인이고 리더이며 초인을 아우르는 본질.. 정의할 수 없을 것 같고, 정의 해서도 안 된다. 이는 결국 나만의 개인적인 경우가 없기에 곧 수 없이 죽는 행위를 하는 것 아닌가?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줄 아는 데 있다고 말이지요’ 라고 말한 루이스 칸도 이 말을 하는 순간 회의감이 들었으려나? 그러나 그 말 속에 다시 그의 삶을 증명하는, 환원이 되어 그만의 언어로 다가오고, 개인적이라고 보여진다.

  • 사실이 정말 소중합니다. 우리가 내놓을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닌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만 속하지 않은 이것이 우리가 만든 작품 중에서 더욱 좋은 부분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루이스 칸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태도를 지니지 말라는 것이고, 자신을 발판으로 속하지 않는 영역으로의 다리를 뻗어 나가야만 한다는 진보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 리처드 로저스의 디테일은 재료와 재료가 공학적인 이유에서 이어지고 구축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디테일은 곧 번역에서의 조사같은 느낌이려나? 그리고 다리의 재료 같은 말.

  •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이 아니라 공간을 발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디테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질서 구축을 위해. 디테일을 위한 디테일을 추구하는 순간 진정성은 사라지고 거짓으로서의 진실을 만들어 결국 승화된 정신이 되어 버린다.

  • 루이스 칸이 본질이며 시라고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건축의공동성이라는사회적인 근거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말과 글의 최선은 결국 본질을 말하는 문학일 뿐이고, 그 주제는 ‘건축의 공동성이라는 사회적인 근거를 깊이 생각하는 것’ 이다. 

<건축이 되기 이전의 건축>

  • 칸의 건축은 자체로 자족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건축 자체가 건축의 힘과 오랜 시간을 획득하였다.

-자족이라, 자족이란 ‘스스로 만족함, 넉넉함을 느낌’ 이라고 정의된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만족함이 아닌, ‘스스로’ 였던 것 아닐까. 나는 자족의 건축은 결국 권태의 건축이며, 부정적으로 들려온다. 그러나,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온라인 공간과의 현재의 차별점으로 편안함을 뽑는 것으로 보아, 편안함을 주는 건축으로 하여금 권태는 시간은 제쳐 두고 불안으로 가득찬 현대인들에게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 현대인들의 권태와 불안의 평형을 이루게 하는 그런 저울같은 건축?

  • 단편과 차이만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건축과 이론을 관통하여 표면의 빛남에 눈을 뺏기지 않고, 근원을 사려 깊게 추구하는 , 우리가 칸을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때문이었다.

-마치 이 글을 적는 나는 장님인 것이다. 글로 간접적으로 건축을 추구하겠다니, 정말로 나도 결국엔 단편만을 보고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보아라! 이 재정의의 연속으로 된 언어게임을 즐기고 있는 나를!  (재정의도 아니다. 그저 정의의 확인 수준에 머무르는 그저 겉에서만 놀고 있다.) 너무 보아도 문제고, 너무 보지 않아도 문제다. 그 중간을 추구하기 위해, 나는 지어야만 한다. 짓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 새로운 것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곧 새로운 것이란 전위로서의 과학 같은 개념이 아니고, 측위로서 관점을 달리 보아 존재의 의미를 다시 느끼는 것이 새로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간에 따른 소중함을 느끼고자 그 새로움을 갈망해야 하는 것이다. 소중함, 편안함.

  • 존재가 진실의 시간을 가질 있다. 나는 말을 읽을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며, 내가 얼마나 삶을 태우며 새롭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진정성. 이는 곧 시간으로 증명되고, 존재도 시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느껴진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자, 나는 이러한 기록을 해 나가고, 새롭게 보려는, 소중함을 느끼고자 매번 다리를 건넌다.

  • 그는 말한다. “건축가는 조직 속에 들어가 있어서는 된다. 건축가는 자유로이 사고하고 창작해야 한다.”

-조직 속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한비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작은 충성은 큰 충성을 해친다.’ 즉 내향적으로 사고를 해 나가는 순간 데리다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건축가는 표현해 나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 근대 공업 기술의 분업화와 전문화에 따라 이러한 전능의 건축가상은 붕괴되고, 형태만을 조작할 따름인 탈이데올로기적 디자이너로 변모하였다.

-> 이에 대해 칸은평면이란 방들의 사회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그 시스템을 이해되지도, 할 목적도 못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전능의 건축가라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매 순간 고차원의 사유를 해야 한다. ‘평면이란 방들의 사회’ 임은 곧 4차원의 존재인 우리는 정작 2차원적으로 사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 연결의 건축. Architecture of Connection.
  • For Kahn, space equals spacing

-칸에게 공간이란 공간 두기와 같은 것이다. 즉 공간은 이미 존재하지만, 바둑과 같이 돌들이 놓이는 순간 우리는 그 집들이라는 존재를 느끼는 것처럼, 건축가는 공간을 볼 때 공간 두기로 치환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공간을 인지의 대상을 넘어 실천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런 가능성을 부여하는 의미의 공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일까?

  • Volume Zero.

-제 0권이라는 뜻이다. 1권으로 책은 시작하지만, 책의 본질과 같은, 우리는 항상 Volume Zero를 보아야 한다.

  • 그는 Form 모양은 없으나 명확한 건축의 의지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 Form : (무엇이 드러나는 특정한) 방식[형태], 네이버 사전.

그는 ‘무엇이 드러나는’ 에 집중하여 ‘Form’을 재해석한 것이다.

<공동성의 깨달음.>

  • 칸이 본질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이유는 이미 정해져 있는 본질을 확인하는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의 건축적 현실을 바꾸어 놓으려는 있었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런 건축의 상태를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렇게 되기 위해 그는 본질을 물어야 했다. 이것이 똑같이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현재의 건축의 상태에 만족하며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원리주의자적 건축가, 근본주의자적인 건축가와 그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그는 매번 새롭고 놀라운 것을 느끼고 싶어서, 그리고 그래야만 진정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울림이 일어나게 하고자 철학자의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이다.

  • 공동성은 일종의 초월성으로, 초월 속에서의 공동성이다. 그곳에서는 당신과 내가 모두 아니라우리 된다.

-너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저 우리라는 최소한의 개념만 존재할 뿐이다.

  • 건축물은 인간의 바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구와 의지는 같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들의 바람은 의지며 욕구고, 결국 건축가는 인간(건축주)의 욕구를 위해 건축물을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방향적인 욕구 맹목적인 태도를 따라가는 것 아닌, 건축주의 욕구와 자연의 섭리 간 중재를 맡아야 하는 것이다. 건축가는 진정 소통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다.

  • 따라서 공동성은 그렇게공동적이라는 안에서 발견할 있는 가능성정도로 번역할 있겠다.

-그 가능성이라 함은, 건축이라는 구축 작업으로 실체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일 것이다.

  • 먼저초월적이란 신과 같이 인간 밖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무언가와 같은 것이라면, ‘초월론적이란 이제까지 관습적으로 생각해오던 무언가의 공통의 규칙이나 관습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지닌다.

-‘론’은 ‘초월’의 권위를 낮추어 버려 누구나 고차원의 사유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 따라서 루이스 칸이일종의 초월성이라 했을 , 그것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절대가 아니라, ‘초월론적이라는 의미의 초월성이었다.

<폐허는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

  • 아르케는 시작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 소행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소행의 정의가 궁금해진다. 거슬러 올라간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 폐허란 고고학자에게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낭만주의자에게는 감상적 대상이 되지만 건축가에게는 가장 건축적인 사실을 내포한 것이다.

-건축 분야를 확고히 하려고 한다.

  • 폐허는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고, 확정된 용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과정이다. 폐허에는 건축이 시작하는 감각이 스며 있다.
  • 오히려 폐허는 완성되기 이전의 상태, 구체적인 용도를 갖기 이전의 건축가의 의지, 건축물의 구축 과정을 보여주는 위대한 사건의 일부이다.
  • 표현하려는 바람은 최초의 돌이 놓이기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욕구들을 잘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 이처럼 칸은 건축가의 의지를 보려 하였다.
  • 이제 용도에서 해방된 조용한 폐허는 야생의 초목을 주위에서 즐겁게 뛰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옷소매에 매달리는 아이를 즐겁게 바라보는 아버지와 같다.” ->가능성을 가진 장소.

– 용도에서 해방된 순간 그 폐허라는 건축물은 존재성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보는데, 건축가의 의지가 목적으로 표현되었건만 용도에서 해방되었다 하기 때문이다. 그 뜻은 자연으로 환원된다는 것인데, 비유에서 아이와 아버지는 각각 야생의 초목과 폐허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자연과 인간은 동일시 되어 사실상 자연이 가능성을 가진 장소로 보아 결국 그 가능성은 목적 없는 확률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나의 건축가 속의 건축>

  • 출판은 건축을 일용품으로 흡수하고 그것을 물신화함으로써 초월성의 가능성을 파괴시킨다. 건축잡지는 도면이나 사진을 무기로 하여 건축을 소모품으로 변형시킨다. 잡지는 건축이 마치 갑작스레 매스와 볼륨을 잃은 것처럼 세계 주변으로 돌아다니게 하고 그런 방식으로 건축을 소모한다.

사진은 사진에 찍힌 사진에서 사물을 박탈한다.”

-당장 당신이 나온 사진과 동영상을 비교해 보라. 무엇이 더 생생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지. 사진은 그저 한 순간을 촬영한 것으로, 시간을 포함하기는 커녕 무시한다. 건축 사진은 시간을 무시하는 사진이므로, 이는 공동성을 느끼지도 못하게 한다.

  • 건축이 전해 주는 진정성.

<건축하고자 하는 이들의 건축>

  • 바람직한 우아함과 매력은 억제와 기품에서 얻어진다.

-기품이라 함은, 계몽한 자들에게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포함하는 의미려나. 사람들은 실제로 진정성 있는 이들에게 우아함과 매력 등의 긍정적인 반응을 진정으로 보인다.

  • 미술관에서 빛은 현재라는 세계와 과거의 세계, 예술 작품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특수 목적 시설들 같은 경우에는 위 말처럼 언어를 분석해 언어의 본질을 실체화하고자 하는 연습도 한다면 -비록 단편적이지만- 더욱 깊은 울림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 인간에게서 그리고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바람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열망하는 것이다.

-의지와 욕망과 목적. 우리는 목적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목적을 최우선 가치로 놓아야 한다.

<질투와 우연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소>

  • 연구자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마치 자신의 주택에 있는 것과 같은 방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발견이었다. -> 수도원의 개실에 비유.
  • 소크 박사희망이란 꿈에 있고 상상력에 있으며, 꿈을 실현해 주는 것은 사람의 용기다.”
  • 소크 연구소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생각의 원천을 방해함이 없이 받아들이는 건축.

-생각으로 이 연구소는 존재한다.

<공동성을 일으키는 현재의 과거>

  • 건축은 예술이기 위해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행위의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 성립하는 것이다.

구체화란 곧 자연에 표현을 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예술로 정의되지 않고자 한다. 건축으로서 자연에 표현을 하고자 하는 목적이 예술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닌, 그보다 더 깊은 열망이 있는 것이다.

  • 건축은 익명적이다. 익명적이란 이름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만들었는지 없는 농가처럼 사회의 여러 가지 문화의 힘들이 건축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건축의 보편성을 말한다.

-건축의 보편성(모든 것에 두루 미치거나 통하는 성질. 일반성.). 즉 익명적의 부정적 면이 아닌, 보이지 않는다는 그 위대한 힘을 말하는 것이다.

< 방의 공간적 원상>

  • 하이데거건물은 사람이 사는 풍경인 땅을 제각기 인간에게 친근한 것으로 만든다.”

-‘친근하다’라는 것은 낯섬의 정 반대로서, 뿌리를 내리듯이 사람이 정주를 원하는 상태의 표현 중 하나이고, 이 그릇의 역할을 하는 것이 건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건축은 여전히 건축인가?>

  • 지금 분명한 사실은 종래의 건축에 대한 관념, 가치, 방식은 이미 사회와 연속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 중간에 끝겨 버렸다는 것인가. 종래의 건축에 대한 관념, 가치, 방식이라, 근대 건축의 정신은 현대로 와서 승화되었다는 것이고, 그 근거로 사회와의 불연결성을 말하는 것인가. 대표적인 예시는 무엇일까. 표현하려고 하는 욕구가 없다는 것인가? 마치 카탈로그 속에서 조합만을 하는 큐레이터로 변했다는 의미이려나.

  • 건축은 이렇게 독립되고 고립된 존재로 지어지는 것일까?

다. 정말로 왜 그런가. 지어진다는 것에는 사람의 노동이 참여된다는 것이고, 건축이란 다른 사람의 노동 중에서도 특히 비용이 많이 드는 부문이다. 건축은 지어지는 과정에 사람들이 제일 큰 울림을 느껴야 하는데, 그래야지 건축물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목적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건축물은 목적으의 목적으로서, 즉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다.

  • 만드는 방법인 architecture 세계는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형이상학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만드는 것이란 무언가의 이미 정해져 있는 의미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다. 의미의 재해석, 의미 부여, 문학, 언어, 관념, 이성, 표현.

  • 이런 도시의 조건 위에서 예술적인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의 사적인 욕망이 더해진 건축물은 도시 안에서 고립하여 수밖에 없다.

다. 기술적인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기술으로서의 기계도 아니고, 예술로서의 작품도 아닌, 그 중간으로서, 진정 사람을 위해 취합된 기술적인 작품. 입체적인 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랜드스케이프 건축이란 도시에 건축을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것이고 경계가 상실되는 것에 대한 대응방식이다.
  • 이렇게 되자 도시에서 공과 사의 경계가 희박해졌고, 공과 안에서 개인은 일시적으로 고립되게 되었다.

다. 고립이 된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의 존재성을 발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고, 이 힘이 듦은 애매모호할 수록 증폭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공과 사의 경계가 희박해져 그 안에서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자신은 공과 사에도 어느 곳에 속해있지 않은, 절대성의 관점에서 보면 고독으로 부정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상대성의 관점으로 어느 곳에도 속해 있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는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어느 곳에는 속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다 못해 지배를 당하고 있어 전자의 경우로 고립으로, 부정적 고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배를 하는 시스템이기도 한 이 사회와 국가, 세계는 회색 지대에 있는 인간들을 비정상으로 계속해서 구별해 나가고 속박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현대 사회에서의 정신병은 유행이라고도 말하면서 풍자를 하고 싶다. 자신이 비정상임을 모르는 이들도 정상이고, 비정상임을 아는 이들도 정상이다. 그저 모두는 정상일 뿐이지, 이제 우리는 비정상/정상이라는 언어 자체를 해체해서 권위를 바꿔놓는 것도 아닌, 권위 자체를 파괴시켜야 한다. 물론 정말로 안타깝지만은 소외될 확률이 특히 높을 (이 ‘확률이 높을’이라는 말도 편견이다. 나누지 않고 표현을 해야 한다면, ‘소외될 확률이 높다고 편견을 가질 만한’이라고 해야 겠다. 즉 우리들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다.)정상인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세계의 세계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게 우리가 봉사를 해야 한다. 그 봉사란 사회에서의 봉사가 전혀 아니고, 직접적으로 표현해주는 봉사같은, 단순하고도 제일 실천하기 어려운 봉사 말이다.

  • 이제 공공공간은 사적인 공간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도시공간은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안에 포함한다. 이러한 공간을 집합공간이라 부른다. -> 개인 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을 담는 다수의 공간이 집합하여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다. 공공 공간, 집합 공간, 사적인 공간이 공적인 공간에 포함된 예는 피시방부터 한국의 방 문화, 그리고 호텔 등이 있다. 공적인 공간이 사적인 공간에 포함된 예는 사실 공공의 정의부터가 모순적으로서 사실 상 전자의 집합 관계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공공(公共) 또는 공중(公衆)은 개인에 대한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회적으로 두루 관계되는 것을 말한다./ 출처 : 위키페디아)

-사적인 공간에 그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공적인 공간을 씌울 수 있다면, 그리고 더 큰 공적인, LAN에서 MAN으로, 그리고 WAN까지. 결국 공적인 공간은 네트워크에 비유되어야 하고, 사적인 공간은 그 속에서 오브제로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오브제와 백그라운드. 다시 당연한 듯이 들리는 말로 돌아온다.

  • 이제는 휴대전화가 다른 방식으로 건설된 강력한 도시의 인프라다.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 또는 인프라는, 소비재에 포함되지 않고 생산수단이 아니어서 생산 활동에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경제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말한다.

– 사실 그래서 건축의 권위는 이제 없다고도 선언을 할 정도로 시대라는 시간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공간은 이제 디지털 공간으로, 시대는 기술로 발전하고, 그 기술은 건축 기술에서 인터넷, 가상 기술까지, 시대의 흐름에서 건축이 다시 기술의 정의의 첫 머리로 가겠다는 것은 지극히 권위주의적 태도이다.

  • 현대 대도시의 장소를 편의점이나 창고와 같은 B 건축물을 통해 생각한다면 도시에 대한 접근 방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 편의점은 이른바 지역성과 장소라는 개념을 따르지 않는 빌딩 타입의 출현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는 그 빌딩 타입은 나는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적어도 국제주의 건축 양식은 디자인의 변화라도 있건만, 편의점이나, 그러한 상업 가게들, 즉 건물이 하드웨어라면 그 안의 소프트웨어가 있다고 치자. 그런데 서로 상호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소프트웨어를 위해 하드웨어가 있어야 하는, 즉 목적의 하위 목적으로서 건축물이 있어야 한다는, 건축의 권위를 높이지는 못해도 낮추는 것에 있어서는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나 서로를 권력 관계로 보고 경쟁하는 태도는 절대로 지양해야 하고, 결국 이 둘은 사람들이란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같은 곳, 즉 사람을 보고 바라봐야 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권위를 낮추는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 장소는 사건, 사람들의 행위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

는 사람들의 행위로 건축이 정의된다.

  • 지속가능성을 설명할 환경운동가 레스터 브라운의 다음 말을 자주 인용한다. “ 환경은 조상에게서 받은 유산이 아니라, 미래에 살게 아이들에게서 빌린 것이다.”

-> 우리 아이들이 지금 건물의 건축주가 된다는 생각이다.

-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본다가 아닌, 미래를 통해 미래를 봐야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만들어지는 과정이 건축의 본질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는 건축의 본질은 이미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본질이라 함은 시간을 초월해야 하고, 이는 다시 말해 사회가 다가온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 사회를 우리는 발견하고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 도시는 거리를 걷고 있는 조그만한 아이가 언젠가 이렇게 되어야지 하고 마음 깊이 알아차릴 있는 장소여야 한다.”

-> 최종적으로 미래에 환경을 소유하게 어린아이가 자신이 미래에 사회에서 무엇을 것인가 하는지속적 가치 알아차리는 장소여야 한다는 뜻이다.

-는 무엇을 할 것인가 = 목적, 목적을 가지는 순간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목적에 진정성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는 곧 시간에 따라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 가치라는 말은 가치의 유지라고 들려올 법 해, 이는 가치의 확장과는 뉘앙스를 달리 한다. 그래서 지속적 가치보다는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지.. 고찰해봐야 되겠다.

<거주가 불가능한 도시의 주거>

  • 하이데거가 말하는 거주는살아가는 삶의 전체적인 모습 말한다. 주택이 주거가 아니듯이, 주거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만이 거주가 아닌 것이다.

다. 전체적인 모습이면, 이는 초월론적으로 들린다. 거주란 시간과 공간만이 거주가 아닌 것이고, 사람이 그 시공간 속에서 의미를 부여해 나가야 드러난다는 것일까?

  • 준공된 주택은 주택으로 보는 주택이며, 준공 이후의 것을 보는 것은 주거로 보는 주택이다.
  • 헤이넨이 대도시에서 거주는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내가 보기에 사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 집을 짓지 못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짓는 것과 거주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 다만 거주하는 것과 짓는 것이 분리된 오늘 가능한 논의는 진영의 다른 관계를 찾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주택이 거주를 잃게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주택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보는 있다.
  • 지금의 도시주거는 도시에 있는 주거지, 도시를 만드는 주거가 아니다.

까? 그렇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있을까? 눈에 보이는 해결책 말이다. 이는 곧 건축주와의 건축가의 끊임없는 소통이다. 소통.

  1. 건설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모은 톡방을 개설 -> 건축가는 그 방의 리더로서 매일 매일 건축주에게 진행 사진, 영상을 보내야 한다.
  2. 매 주 한 번 건축주와 그 장소로 가서 실시간 토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설명만이 아닌 대화를 하며 건물도 참여 시키는 대화를 한다. 무슨 식 날에는 사람들과 함께 기념적으로 시간을 보낸다.(ex 완공일, 시공 시작일, 마감일 등)
  3. 소통을 하기 싫어하거나 힘들어하는 건축주는 처음부터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만일 진행 중이라면, 1번은 꾸준히 한다. 차단당하더라도. 
  4. 소통에서 건축주의 의견은 무조건 듣지는 않는다. 건축과 건축주의 의견을 동시에 들어 건축가는 그저 조합을 생각해야 한다.
  5.  멀티 프로필 활용. 건축주에게 보여지는 건축가의 프로필 사진이나 홈페이지 등, 사무실에는 그 건축주가 의뢰한 건물과 관련된 것들로 해서 표현해야 한다.
  6.  건축주가 의뢰를 할 때 건축가가 받아서 참고할 글의 형식을 건축주에게 주어 적어서 가져오게 한다. 건축주에게 생각을 해 보고 오라고 한다. 하기 싫다고, 작성을 안 하고 왔다면, 정중하게 처음부터 거절한다. 그리고, 작성을 했지만 너무 포괄적이어도, 그 때부터 그에게 건축의 세계로 인도하면서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

등등 말이다.

그러나, 소통을 너무 중시하다간, 서로 시간은 한정되어있어 사실상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건축가는 자신의 직원들에게는 평소에도 가족 그 이상의 소통을 해왔어야 한다. 그 말고도 건축주에게 공통 목적을 피력할 수 있는 직원 말이다. 즉 같은 목표를 봐야 하고 같은 목적을 표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 도시를 만드는 건축이 도시 건축이다.
  • 우리나라 집합주택은 가족과 행정이 합친 행정가족 중심형 주택이다.
  • 이제는 가족과 행정의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

중간 단계.. 시스템과 ..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다. 혹시 이런 의미 아닐까? 가족이란 경계가 확실한 개체의 느낌이고, 행정이란 경계가 없다시피 한 시스템의 느낌이다. 그 중간 단계라 함은 경계가 모호한, 개체와 시스템의 중간같은 뉘앙스인가?

  • 주거란 결국 주변이다. 그것이 건축이든지 도시든지 종래의 집합주택에서 크게 부족한 것은 환경과 사람의 관계를 주변으로 파악하고 연결하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 심지어는 모든 거주자가 자기 스스로 자립할 없다고 생각하고 거주자가 밖에서 도움을 찾는 주거를 생각한다.
  • 본래 커뮤니티란 사람들이 스스로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다고 여길 자연스럽게 생기는 법이다. 완전히 자립한 사람은 배타적이어서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다.

– 완전히 자립한 사람은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는 그만큼 공동체에 대해 고찰했다는 것이고, 그 중요성을 끊임없이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놀이의 건축>

  • 표현주의 건축은 만드는 사람의 조형 의지와 관련하여 생각한 결과다.
  •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 놀이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결국 자유를 얻는 일이다.
  • 여행을 놀이라 생각한다면 여행의 즐거움이란 가이드북에 없는 장소나 사람, 물건을 만나는 있다.
  • 건축에서 놀이는 자유로움이요, 인간의 관습에 묶인 주변과 사이에 눈에 뜨이지 않게 존재하는 가능성을 도시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 놀이의 공간에 기대어 보면 제도 밖에 있는 공간의 가능성을 찾게 된다.
  • 놀이의 건축에서는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듯이 사람의 행위가 장소를 차지한다.

– 그래서 사이트를 조사할 때, 대지의 특성이나 자연에 집중하는 것을 우선하기 보다는, 사람의 행위를 최우선으로 보아야 한다. Ex) 인구 수 조사, 밀도 조사, 교통량, 주변, 원인, 목적 등등을 조사한 다음에야 대지의 특성, 자연, 빛 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풍경은 뒤로 물러서는 >

  • 풍경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아니라 현재의 도시와 건축의 조건에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오늘날 풍경이라는 말은 주어진 도시의 현실에 일단 긍정하고 거기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입장에 서기 위한 것이다.

– 획일화된 아파트단지를 풍경으로서 바라보면 십중팔구는 비판을 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 해결책을 고찰 하지도 않을 것이면 비판도 하지 말고, 차라리 현실에 인정을 하는 긍정으로서의 자세를 보여 주고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주택의 미래, 미래의 주택>

  • 미래의 주택과 속에 사는 인간이 특별하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의 어두운 측면에 의해 왜곡되어 주거의 본질, 인간의 본질, 나아가 건축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의 주택이요 주택의 미래다.

그렇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건축을 사랑했거든요.>

  • 말은 건축을 배신하기 시작하게 되는 근본적 배경이 되는 번째 발언이다. -> 그런데도 건축학과 수험생은오늘날의 건축은 이런 것이 잘못되었으니 이렇게 고치고, 인간생활의 관계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겠다 태도에서 건축을 시작하지 못한다.
  • 모르는 학생이나 기성 건축가나 바탕은 똑같아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진영은 모두 건축을 개인적, 낭만적으로 이해하지 현실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 지금 우리의 건축이 허학이기 때문.

 허학 : 유교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

 -그러니까 허상에서 허상을 세우는 일이 건축이 아닌, 허상에서 자연으로 표현하는 일이 건축인 것이다.

  •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더욱 실체와 일치된 생각을 드러내고, 생각을 실체로 만드는 일을 분명히 해야 마땅하다.
  • 건축이 허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유명 건축가들의 이런 허세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른 학과 교수는 몰라도 건축을 전공하는 교수는 논문 100 쓰는 것보다 이에 못지않게 설계비 올리는 일에 나서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논문 100편보다, 국가를 상대로 계약법에 건축이라는 글자 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 그렇다면 침착하고 사려 깊은 당신이 해결해 보시라. 그리고 지금이라도 일에 제발 나서 보시라.
  • 우리 건축의 현실은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이며, 분파적이고, 이기적이다. 밖에 대하여 이야기를 모르고, 심지어는 자신이 받아야 대가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못하는 지식집단.

<배제하는 건축>

  • 그럼에도 슬픈 일은 이런 주장을 하는데도당신은 틀렸소!”라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명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틀렸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두 부류이다. 그 말이 맞는 말이어서, 그리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말이어서 그말이 맞다고는 말 못해서. 후자가 바로 우리 건축의 문제다.

  • 그런데도 무슨 말을 하면 건축가는 언제나 그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거나 말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속을 보면 같은 말인데,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려고 애쓴다. 특히 도시설계 하는 사람들은 말을 만들어낸다.

다른 말을 하거나 말을 만들어 내려는 것에는 비판을 하면 안 된다.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글이라는 언어만큼 전달을 효율적으로, 설득할 가능성이 높은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비판 점은, 속을 보면 다 같은 말이 있는데, 구지 언어게임에서 갇혀 있냐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속을 보면 같은 말을 드러낼 정도까지의 언어를 재정의는 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즉, 본질을 더 잘 표현하고자 언어들을 최대한 정리를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의 역할이요, 도구이다.

  • 건축하는 사람, 특히 건축가는 말을 현란하게 잘하는 같은데, 글을 쓴다고. 말이 무엇을 뜻하는 아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개념이 없다는 뜻이며, 무언가를 함께 나눈다는 공통의 개념을 이끌어 내는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다.

말을 현란하게 잘하는 이들을 보면 괜히 부럽기도 하다. CPU의 성능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글을 못 쓰는 건 둘째 치더라도 내가 글을 안 쓰는, 글을 천시하는, 즉 말 이외에 표현을 안하려는, 그 태도를 가진 이하고 대화를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딱 느낌이 온다. 아, 이는 암세포구나. 하고 말이다.

  • 우리는 건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배제하는 방법을 아름답게 가르치고 있다고 실토해야 한다.

배제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는 커녕, 더 비판하자면 가리키고만 있다고 해야 하나?

  • 작가인 건축가가 되려면 무슨 미학이라는 개념을 서너 개는 표방할 알아야 한다고 하여 숙성되지 못한 이야깃거리를 함부로 유포한다.

– 표방이 아닌 표현.

  • 요즈음 건축가들이 말하는 공공성은 감성적이며 추론에서 나온 것이 많고, 계획적인 공공성 구현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많이 느낀다.

나 또한 추론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반성스럽다. 감성과 추론은 문학 작품으로 넣어야 한다.

  • 건축가는 공인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건축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걸음이다. 물론 아이로니컬한 말이다.

–  페르소나를 벗기고 진실된 건축가, 현실적인 건축가를 드러내는 것이 진정성을 보이는 첫 번째 사명이다.

<인문학적 건축을 의심한다.>

  • 건축 인문학, 인문학적 건축이라는 식의 포장술은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특수한 말이다.
  • 진정한 건축 인문학이 되려면 건축학자가 아닌 인문학자가 철학, 역사, 심리학, 언어 자기의 고유한 인문학에서 건축을 연구해 가능한 용어다.

그래서 진정 건축가라면, 건축적 인문학, 건축적 철학이라는, 건축을 최우선순위로 여겨야 한다. 꼭 ~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성을 가리는 것이다. 건축은 건축이다.

  • 하는 일을 하고, 하는 일을 건축으로 다부지게 설명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 미학에 근거하는 건축은 피하라.

-미학이라 함은, 자연이나 인생 및 예술 따위에 담긴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자연·예술 등의 미(美)의 본질이나 모든 형태를 경험적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현재는 예술학 내지 예술 철학이 주(主)이지만, 원래는 감성적 인식을 논하는 철학의 한 분야였음. 심미학(審美學).)

 그런데, 미학의 사전적 정의로 보아, 이 정의 자체도 언어로 구축되어있는, 그저 구름일 뿐, 관념인 것이다. 그래서 관념에 근거하는 건축은 피하라라고 다시 봐야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뭐에 근거를 해야 하는가? 아, ‘해명’, ‘연구’, ‘논하는’에 근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번역’, ‘표현’, ‘체험하는’에 근거하는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언어로 처리하는 미학이 아닌, 언어를 자연으로 처리하는 것이 곧 건축인 것이다.

<건축하는 이들이 피해야 , 비움과 침묵과 미학>

  • 침묵의 건축은 없다. 다만 침묵의 건축이기를 바라는 슬로건만 있을 따름이다. 어떤 사진은 침묵하는 건축을 찍은 것이 아니라, 건축을 침묵하는 듯이 보이도록 찍은 것일 뿐이다.
  • ‘~미학이라는 말은 말하고 싶은 바가 있기는 한데 정확하게 말할 모를 적당히 뭉게 버릴 쓰는 말이고, 없는 내용을 있는 것처럼 달콤하게 덮는 당의정 같은 이다. 코르뷔지에가 자신의 건축을 기계 미학이라고 했을 , 그것은 코르뷔지에가 기계에 대하여 정면으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있다.

–   기계는 말로는 결코 정면으로 표현될 수 없다. 기계의 목적, 곧 본질을 보면, 이는 건축과 관련이 있다. 즉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건축을 기계 미학이라고 부른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이해가 된다.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라는 책도 침묵의 미학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그는 침묵은 인간이 도달할 없는 문자 그대로 무한성이고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그의 책을 이해한 사람은 침묵을 가지고 그렇게 건축을 말할 없다.
  • 건축은 삶을 성실하게 담는다.

<건축의 자연, 한국 건축의 자연>

  • 서구의 건축은 자연과 대립한 건축이요, 한국 건축은 자연과 순응한 건축이라는 시각은 지금도 유행하고 있다.

-> 그러나 이것은 허구다.

  • 문화가 다르면 생각도 다르다. 그러나 건축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 가까워지려는 마음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다.
  • 자연에 순응하려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연에 거스르는 토착적 건축은 없었다. 그러니 내게 익숙한 마을의 장면을 떠올리며 한국 건축만이 자연에 순응했다고 판단하지 말라.
  • 버나드 루도프스키는 저서건축가 없는 건축에서 환경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 건축의 여러 요소들은 모두 인간의 경험 속에 퇴적되어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근대 이후 오늘의 건축에 가장 중요한 책은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가 아니라 바로 건축가 없는 건축이다.

‘건축의 여러 요소들은 모두 인간의 경험 속에 퇴적되어 온 것’ 은 결국 공통 감각에 기반했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 기하학적 조형은 자연을 거스른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자연과 풍토에 따라 다르다.
  • 건축에 대하여 자연은 본래 건축의 적이다. -> 건축이란 이렇게 세워지는 것인데건축은 자연을 사랑하며 만들어진다 것은 건축을 만드는 사람 쪽에서 하는 말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369

“그대들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을 가질 뿐 경멸할 적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다 어울리는 적을 맞이하기 위해, 아, 벗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은 웬만하면 스쳐 지나가야 한다. 특히 그대들의 귀에 군중과 군중들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허다한 천민의 곁을 지나쳐야 한다.”

 결국, 우리는 자연을 경멸할 적이 아닌, 제일 자랑스러운 적으로, 인간의 존재에 필수적인 적으로서 보라는 것이다.

  • 오히려 건축으로 어떻게 자연을 사랑할까를 배우며 흐뭇해지기 전에, 자연과 대치할 수밖에 없는 건축의 한계를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한계를 계속 보려는 태도. 어떻게 사랑할까는 건축가가 할 일이 아니라, 그 건물을 이용할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의미 부여할 환경을 창작하는 일.

  • 자연을 효율이나 공리적인 것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이상 가져서는 된다는 경계심을 갖는 것이 자연에 대한 건축가의 도리다.

@우리는 근대건축을 어떻게 물었는가?

<건축가 코르뷔지에 : 근대의 정신주의자>

  • 코르뷔지에가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특히건축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유명한 정의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살기 위한.

  • 오히려 그는 사물의 도구성을 시적으로 변화하려 전통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달리 말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신정신이란 근대적 정신이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추고 있는 정신을 고양하는 .

시대를 초월, 근대적 정신.

  • 코르뷔제 손이 지나가 버린 세기의 쓰레기로 더럽혀져 있다 해도, 나는 손을 잘라 버리지 않고 오히려 씻고 싶다. 과거의 세기가 반드시 손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풍부하게 해준다.”

-> 역사를 부정하고 단절하려던 전형적인 근대주의자와는 달리, 그의 사고의 한가운데에는 역사의 연속성 있다. 언제나 자신을 과거라는 위대한 교사 이외에는 선생을 갖지 않은 혁명가 불렀듯이, 코르뷔지에에게는 과거와 혁명이 공존하고 있었고, 고전과 근대를 정신으로 연결함으로써 단편화를 추구하던 근대의 아방가르드의 반대 입장에 서서 건축을 옹호한 인물이었다.

그는 즉 기술에 대해 고찰 없이 말한 기술이란 미명 아래 과거를 전복시키려는 태도를 가진 이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 그는 정신주의자다. 고원한 정신이야말로 근대인이 가져야 정신이라고 그는 보았다.

-> 정신적인 질을 건축으로 구체화하는 .

  • 그가 말하는 주거기계는 단순히 물리적인 주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정신을 생산하는 기계였다

주택은 가지 목적을 갖는다. 신체의 요구인 쾌적함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빈틈없이… –> 편안함 추구.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그나마 특징되어지는 차이점, 즉 온라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최대의 단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점이 바로 편안함이다. 이 편안함은 공통 감각으로서 사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건축은 전화기 속에도 있고 파르테논 속에도 있다.”
  • 기술과 건축은 은유적인 관계 속에서 등가물이 된다.

기술에 대한 고찰을 나중에 진행해보고 싶다. 기술이란 건축이고 건축이란 기술이다. 그러나, 이는 은유로서, 문학이라는 언어, 이성에서만 성립가능한 것이지, 자연과 정신에서는 엄밀히 구분이 된다.

  • 모든 예술의 목적이 이제 분명해졌다. 그것은 시적인 것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 그는 건축과 기술을 양극에 놓고, 개를 변증법적으로 융합하거나 분리시켰기 때문.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건축과 기술은 은유적인 관계 속에서 등가물이 된다.’ 라고 했지만, 이는 이성으로 보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 건축은 자체가 자율적인 법칙을 갖는 내적 세계로서 시인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공학은 새로운 사회생활을 반영하는 외적인 세계로서 기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위 말이 맞다면, 건축은 이성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다 말장난이라고 여기고, 이런 관점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야겠다.

  • 그가 말하는 기하학과 백색은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미건조하고 획일적인형상을 대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특히 그에게 백색이란우리의 정신이 전방에 넓게 열려 있는 광대한 사막을 향하는 자유의 빼앗기지 않기 위한 응시였다.
  • 코르뷔지에에게 기하학은 기술과 건축을 은유적으로 연결하는 가교였다.

나는 다르게 본다. 건축이 입체적 기술이고, 건축이 이성과 자연을 연결하는 가교라고 보아, 이성에는 기하학이 대응되고, 자연에는 말 그대로가 대응된다. 기하학과 기술과 건축에 대해 탐구를 더 해야겠다.

  • 흔히 코르뷔지에가 경직된 근대건축의 대표자로서 비판받는 것은 그의 도시계획에서였다. -> 그러나 사정은 다르다. 그가 이렇게 간단한 요소로 도시를 해석한 것은 당시의 열악한 도시 환경을 건축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었다. 따라서 그의 도시계획은 건축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열린 텍스트로서의 도시였지, 도시 자체를 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작업이 결코 아니었다.
  • 그의 건축에는 시학이 있다. 시학이란 비약이며 비약은 결코 연속될 없는 가지 영역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시학(詩學, poetics)은 언어 기호가 예술성을 구현하기 위하여 스스로 작동하는 미학적 장치를 발견하는 학문 분야이다. 라고 한다. 언어 기호 분야의 미학인 것인가. 그의 책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학을 배우고, 그의 건축물을 통해 나타나는 비약을 우리는 느낀다.

  • 현실과 이상이 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현실과 이상이 만들어 내는 모순은 시와 은유를 통해 해소되어 있으며, 말레비치의 비대상성처럼 비어 있어야 근대건축의 순수형태는 이러한 이상으로 가득 있다.

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 결국 가교 또한 이성 아닌가. 아! 현실과 이상, 그렇다. 아니, 이상은 이성이니 이성과 가교로서의 이성의 영역을 현실과 비교하면, 결국 근대건축은 이성의 영역이 너무 큰 것 아닌가? 아.. 직접 건축을 해야 하는데.

–이제부터, 이 생각들은 다 위에 내가 단 생각들을 다른 말들로 말한 것 뿐이니, 이 행위가 이제는 충분히 했다고 느껴지고 그래서, 중요한 부분, 생각의 단편 등만 적고 넘어가겠다.

  • 기술이란 서정을 담는 그릇이므로, 서정의 폭만이 중요해지게 이상, 기술 자체가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 그의 정신은 근대적 정신이 아니라, 더욱 넓은 자연과 교감하고 태양의 풍경과 교감하는 정신으로 확대되어 갔다.
  • 다시 말해 코르뷔지에의 건축은 사정거리가 크다. 근대건축이면서도 현대건축의 시발점에 있고, 현대건축이면서도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건축의 근원적인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 코르뷔지에의 위대함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며 건축의 정신을 중심에 두고 건축을 통해 인간과 예술울 접목시켜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진실을 말하였다.

<아돌프 로스의 묘를 찾아간 이유>

  • 아방가르드, 전위의 선상에 서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그들은 극한의 선상에 서고자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무질서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이탈이란 정상적인 부분에서 빠져나온 것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이탈이 가능하다는 이다. 그리고 세계 자체가 단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 세계관에 따라 행동하는 바로 인간이 단편화를 불러 일으키고 그것을 증대시켜 나갈 따름이다.
  • 우연을 절대시하고 혼성과 단편의 범람을 증폭하며 이를 즐기는 건축은 로스의 말을 빌리면 어떤 건물이나 죄다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시끄러운 건축이다.
  • 다시 말해 전위적 예술은 정열이며, 정열은 어떤 의미에서는 광기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광기는 연출하기 위한 광기이며, 작가의 작품을 세상에 유포하기 위한 과잉된 광기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전통적 표현과 파생 개념 비판>

  • 전통론이 대두되었던 이유는 크게 가지.
  1.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립된 후진국이 다시금 문화적인 자주성을 획득하려고 .
  2. 오래된 선행문화가 이질적인 외래문화에 종속되었을때.
  • 그러나 우리가 부정할 없는 점은 서양 문화에만 도취될 없다는 당시의 자각이 문화적 자신감의 결여라는 콤플렉스 위에 성립하였다는 사실이다.
  • 전통의 문제를 외래문화와 구별 짓기 위한 수호적 전승의 의미로만 해석한다는 것이다. -> 구별이라는 안이한 방법 사용.
  • 현대와 과거라는 서로 다른 시간 개념으로 표현되었을 최종적으로는 현대건축의 기능과 전통건축의 형태라고 하는 건축의 본질적인 과제에 관련된 임을 있다.
  • 기념비의 어원은 remind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 루이스 멈포드같은 사람은 기념비 또는 그러한 성격을 지닌 건물을바람직하지 못한 은유 무의미한 장대함, 의도적인 진열, 지나친 인상이라는 특성을 갖는 이라 비판한다.

기념비는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가 있는 사회적인 의도에 의해 표현된다.과거의 며칠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세대, 수세기를 위하여.”

  •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나아가야 기념적인 건축물을 이와 같이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면 무언가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닐 있으리라는 애매한 기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 문제는 집단적으로 기억해야 사건을 어떻게 보고 이를 형상화하는가 하는 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 : ‘근대 갈등을 잃은 한국 현대건축의 기점>

  • 건물은 한국의 현대건축의 귀중한 출발점이 이데올로기를 삭제한시정이라는 레벨에서 시작하고 있음을 말한다.

<규방의 건축을 벗어나기 위해>

  • 다시 말해 긴장되고 대립할 만한 소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대립의 소재를 내부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이상, 건축은 외부의 요인에 의해 침식되어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 한국 현대건축이 대립과 긴장의 소재를 찾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건축의 개인적 창작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문제를 건축가 개인의 감성으로 단순화해 버리거나, 주관적인 느슨한 관조를 건축에 투사해 보는 일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 건축이 지니고 있는 가장 오류 중의 하나는 바로 이처럼 건축을 순수하게 외부의 산물로 여기겨나 아니면 작가의 내면적인 세계만으로 국한해 두려는 있다.
  • 근대건축에 대한 생산적인 독해 없이는 현대건축의 어떠한 것도 새로워질 없다.

근대건축에 대한 연구하기

  • 한국 현대건축 속에서는 이같이 철저한 테크놀로지관에 입각하여 자신의 건축을 전개해 가는 예를 보기 힘들다.
  •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건축을 하나의 일관된 원리가 아니라 상황적이며 전략적인 차원애서만 파악한다.
  • 그러나 과연 역사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에 연속되고 있는 것일까? … 역사도 현실과 함께 인간에 의해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이다.

그렇다. 시간의 크기와 집단의 크기에 비례해 역사에서 일기까지, 본질은 연속은 커녕 한 순간을 표현하고자 하는 단편인 것이다.

  • 역사를 불연속의 역사로 인식하지 않는 이상, 그것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노스텔지어에 불과한 것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건축은 여전히 역사를장대한 내러티브 신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과 역사의 회복이 미로와도 같은 현대건축의 한국적 돌파구가 된다고 믿고 있다.

<공간그룹의 미래와 김수근>

  • 김수근은 건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찾던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건물은 깄어도 그의 건축적 사상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유감스럽게도 선명하지 못하다.
  • 그리고 엘리트 건축가가 지은 세운상가도 이제는 세월이 흘러 B 건축이 되어 버렸다. ‘건축가 있는 건축 세운상가도건축가 없는 건축으로 변하고 것이다.
  • 한국 건축의 미래를 말하고 싶으면 지금 공부하는 학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집중하면 그것을 발견할 있다.
  • 김수근이 예술을 포괄한 것은 인간적인 포용력, 인간적인 카리스마였지, 이론적인 포괄 아니었다.

  그는 이론적인 포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 김수근 선생이 중요하게 여겼던 좁은 의미의 한국성이나 전통 등과는 거리를 두고, 현대의 조건에서 건축과 문화를 바라보는 것이 미래를 위해 일이다.
  • 오늘날 세계건축을 이끄는 건축가는 무엇으로 자신의 건축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현대의 조건 성실하게 묻고 있는 바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의 조건을 성실하게 묻는다는 것은, 이는 현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다방면으로 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공간사옥은 부동산이 아니다, 문화다.”라는 기자회견은 결국 내가 하는 건축은 문화고, 그렇지 않은 너희들이 하는 건축은 부동산이라는 주장으로 배타적인 엘리트적 자세를 보여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배타적인 자세로 건축 세상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이제 그만하라.
  • 건축을 비판하고 쇄신하자면 전혀 다른 말로 말하라.
  • 일하다가 떠나게 되는 건축계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과 글은 어디 한군데도 없었다. 건축계는 매정한 집단이다. 과연 이런 곳이 건축계라는 곳인가?

@ 건축의 공공성은 사회를 위한

<한국 건축에서 공공을 말하다>

  • Ex) 서울시청사. 말하는 시티, .

-> 모두 짓고 나서야 건물을 이야기하였을 , 공공건물이 지어지는 목적이나 과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 그러나 완공을 앞둔 건물이 도마 위에 오르자 비판은 감정적, 인상적, 유추적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공공건물을 대하는 태도다.
  • 혹자는 말할 것이다. 건축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라고. 천만에 수준이상으로, 사회에 공헌하는 실천에 비해, 그리고 ‘~ 미학이라며 뿌리도 없는 건축 슬로건을 언론에 유포시켜도 대단한 철학이 담겨 있는 알고 융숭하게 대접해 주는 너그러운 사회가 바로 우리나라다.
  • 세빛섬. 만들며 어떻게 사용할 것이며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없아 행정적인 성과를 올리려고 지어진 건물이었기 때문.
  • 건축의 공공성은 건축에 관계되는 사람으로는 과연 누가 있을까를 인식하는 이다.
  • 그러니 건축가만 공공성을 실현하는 유일한 직업이 아니라는 이다.
  • 건축이 공공성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건축이라는 자체가 아름다움을 전제로 하지 말고, 정말로 다양한 배제의 구조를 가진 것임을 반성하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 건축사가 스피로 코스토프는 공공건축의 시작을 스톤헨지라고 보고 있다.

<건축제도와 건축의 공공성>

  • I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제도라는 뜻과 함께 시설이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시설로 표현되는 건축이 얼마나 인간의 제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 건축제도는 건축 밖의 부분이 아니라 마땅히 건축을 이루는 중요한 바탕이다.

제도는 언어에서의 정의와도 같은 역할이다. 제도는 변경되어야 되는 대상임과 동시에, 그 시간을 버틴 과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우리가 마땅히 배워야 할 대상이다.

  • 그런데 문제는 건축이 제도와 동등한 상호관계가 아니라 제도의 영향 아래에있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제도는 행정으로 실현된다. 건축가란 본래 건축잡지에서는 강한 존재지만 건축행정기관에 대하여 약한 전문직업이다.

즉 제도로 인해 형태를 설정하고, 콘셉트를 가지며, 제도를 원인으로 잡지 말고, 제도를 목적으로 보라. 도구로 보라는 것이다. 기술과 제도.

  • 보통 건축가들도 자기 이름과는 무관하게 건축행정에 능통한 건축사무소를 서슴지 않고구청 허가방이라 낮추어 부른다.
  • 학교에 오래 있었던 내가 아는 건축행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건축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는 학교는 별로 보지 못하였다.
  • 한국토지주택공사 등에서 위촉한 마스터 아키텍트, 공공건축가의 필요.

공공건축가라 함은, 그 기술과 제도를 아우르는 능력을 갖춘 이를 지칭할 것이다.

  • 특히 도시설계 토목공학과의 접점 분야 등은 건축사의 엽역에 적극 도입하거나 참여해야 부분이다. 예를 들어 인프라스트럭처를 건축과 통합하는 예는 이미 유럽과 일본에서도 주요한 이슈가 되어 있다.

소통을 통해서 같은 목표를 지향하도록, 우리는 실천해야 한다.

< 문화에 근거한 건축정책이 필요한가?>

  • 문화가 사람들에 의해 나누어 가질 있는 국가와 사회적 자산에 있어서 가장 최대공약수인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 사회에 대하여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구조물. 그것이 바로 건축이다.
  • 기술을 하대하는 풍토에서는 건축은 문화 속에 여간해서 제자리를 잡기가 어려운 토대를 가지고 있다.
  • 건축설계 커뮤니티.
  • 원인은 안다. 문제는 이를 실천하는 결집되지 못한다는 원인 있다.

<좋은 공공건축물을 만드는 조건>

  • 설계된 학교는 매력적인 학교이기 이전에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 이것은 공간과 규모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시간 설계하는 것이다.
  •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 세상에는 낮에는 해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해는 사라지고 무수한 별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건축은 예술을 넘어 생활을 품는 존재 이유가 있다.
  • 해결책 없는 비판은 불평이다. 비전과 대응 보여야 한다.

<만드는 자와 그리는 >

  • 그러니 건축가는 건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건물이 현실적으로 나타나도록그렸을뿐이다.
  • 오히려 건축가들은그리는행위 안에 갇혀 가고 있다. 건축가는만드는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 건축이란 물질적이면서 정신적인 가치를 동시에 지닌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산물이다.

<건축가의 자리를 없애는 사회>

  • 더구나 공공건물일수록 설계자를 존중하고 준공식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게 하는 것은 공공건축물을 짓는 이들의 책무다.
  • 그런데도 사회는 건축가는 제쳐 두고 정치적, 행정적으로 윗 분을 상석에 모시는 데만 열심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결국 이는 건축가의 권위를 회복하고, 그러기 위해서 건축의 권위를 높이고자, 또 그러기 위해서 언어로서, 자연으로서, 재정의에 들어가는, 철학의 과정을 부르는 것이다.

<건축하는 사람들의 숙제>

  • 건축계는 이와 같은 이분법의 연속이다.
  • 최근 나는 건축과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그런데 차라리 문제가 밖에 있으면 답을 찾기가 쉬운데, 문제가 안에 있으니 찾기가 어렵다고까지 생각할 때가 많다. 참으로 유행어로 끝내서는 통섭의 실천이 요구되는 이다.
  • 최재천 이대 교수 : 통합은 물리적이고 융합은 화학적이며 통섭은 생물학적이라고 한다. 통섭의 특징은 개체가 뚜렷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건축계가 통섭을 말하고 싶으면 건축계의 구성 인자가 자기 존재를 뚜렷이 하면서도 생태적인 상호 관련을 맺는 지혜를 키워야 것이다.
  • 21세기는 부분이 전체를 만드는 사회.

<건축이론은 따라가지 않기 위한 >

  • 건축이론은 건축가 자신의 문제.

군대에서 건축학과 학생하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사람과 문득 어느 건축가를 제일 좋아하냐는 주제로 넘어갔는데, 그는 당당하게, 그러나 당연하듯이 자기 자신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건축가가 아니라고 정의를 내려도, 내가 건축가라고 선언하는 순간, 나는 건축가인 것이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단 내부로부터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질서란 곧 건축이론인 것이고, 이는 그의 손으로 실현된다.

  • 이론의 어원은 이미 그렇게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전체적으로 이해한다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따라서 건축에는 이론과 실천을 대립하여 바라볼 일이 아니다. 이론은 어떤 것을 경험한 이후에 다시 발견되는 바를 끝까지 모두 되돌아봄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건축이론은 건축비평과 목적이 다르다. 건축이론은 건축가가 다른 이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며, 건축비평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 아, 나는 여기까지 이성에 빌려서 이론을 이해했다고 말만 했지, 경험한 이후에 다시 발견하는, 그렇다면 나중에 경험하고 다시 이 글을 읽는다면 얼마나 내 글이 부족한지 보인다는 점에 있어서 정말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건축이론은 건축가가 다른 이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며, 건축비평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의미심장하다.

<건축은 사람을 가르친다>

  • 어떤 건축가이던 간에 초등학생 30 정도를 앞에 두고 가르쳐 보는 것이다. 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내가 얼마나 건축을 모르는지 또는 내가 어떻게 해야 건축을 쉽게 생각하고 말하고 설명해야 하는지를 있다.

그렇다! 아이들과 대화할 정도로 나는 건축을 쉽고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이 제일 중요하므로!

  • 기초건축교육의 필요. 건축을 통한 공공교육. Civic Education through Architecture.
  • 건축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에 근거하지 않는다. 사람은 수학처럼 수는 없고 물리학처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건축은 단지 사람이 어떻게 거주하는 것이 소중한일인가에만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을 보고 배우며 중요하다고 듣는 장소, 물성, 지역성, , 공동체와 같은 말들은 모두 인간에게소중한것들이다. 이것들은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authenticity 나타내는 말들이다. …진정성이 있는 삶이란 나의 내면적인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 실천하고 있는 소중한 삶을 말한다. 진정성이란 무언가를 나와 관련하여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 진정성. 옳고 그름은 곧 구별이고 허상이다.

  • Walter Gropius “건축은 교육

-> ‘건축교육 아닌건축은 교육

건축은 교육이라는 것은 사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이 건축을 통하여 삶의 진정성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건축은 사람을 가르친다.

게시자: Phronesis.ysb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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