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화함에 있어서, 언어로 소통을 한다. 언어라는 개념은 체계로, 시스템으로, 방법론으로 이해가 되곤 한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에 상응하는 기관이 입과 귀로 하여금, 우리는 언어라는 매개로 이런 글을 쓸 수 있고, 곧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마치 기관에서 언어로, 언어에서 생각이 되었다는 우선적인 흐름으로 이해될 법한 글인데, 여기서 글의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한계란, 그 밖의 세계를 가정하는 것인데, 나는 그 밖의 세계를 자연으로 가정한다면, 그 한계의 예시란, 주어와 서술어로부터 이루어지는 문장에서 우리는 주체에 대해 가정하는 경향, 그리고 그로 인해 인과관계, 수단과 목적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한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연은 확률로 존재한다. 인과관계는 설정할 수 있지만, 모든 것에 대한 원인과 모든 것에 대한 결과로 사실 상 우리가 보는 인과관계는 해석으로서, 과거로서 존재하는, 번역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로 하여금 우리는 정의를 해 나가는, 즉 일반화의 과정들을 거치고, 그 틀에 맞추어 해석을 하는, 해석을 통한 해석, 즉 자연과의 괴리되는, 디지털화같은 작업들을 당연시하게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목적은 사실상 인간의 믿음과, 욕구와 같은 무능력이고,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상 주체가 없다고 보아, 확률을 예측한다는, 그저 기계, 생존 기계로 보이고, 우리는 이 목적에 의해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이는 결국 배제를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사실 상 이해의 여부는 다시 말해 우리의 언어에 대한 규칙, 즉 정의에 대해 얼마나 합의를 본 그 정의를 기억하고 적용하는가, 즉 어휘력에 좌우된다고 보고, 이 글에 대한 무가치함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준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인가? 논리중심적으로 보면 당연히 그럴 듯 싶다. 그 논리란 그러나 자연의 논리인가, 언어라는 시스템의 규칙, 즉 학습된 논리인가? 그 두 면에서 보아도 이 글은 오해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 언어의 어휘에 대한 한계로, 우리는 ‘한계’라는 단어와, ‘오해’와, ‘경향’ 등 무수한 단어에 대하여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부여하게 되어 버리는, 편견이 조성될 수 밖에 없다는 역할로써 언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결국 표현의 자유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분열증을 선사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언어의 한계로는 (자연을 포괄해서 보았을 때)
- 언어의 구조로 하여금 주체와 대상의 탄생, 이로 인한 해석의 발생
-자아의 발생
- 인과관계와 목적의 탄생, 그리고 언어의 세계에서의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각, 이의 집중화 발생
-이데올로기의 발생
- 해석에 따른, 즉 가치가 부여된 언어의 이차적 해석, 재 생산 -> 해석 폭력
이렇게 말을 하다 보면, 언어의 한계라기 보다는 특성이라고 보이는, 즉 언어 안에서 서술했으니 무의식적으로 언어의 세계에 대해 서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분명히 한계로 보고,(이미 나는 한계라고 말한 이후부터 나는 해석폭력을 저지르고 있으며 정치적인 글임을 시인하고, 안타깝지만 배제를 하게 된다.) 뛰어넘을 한계로써 다시 본다면, 우리는 그 뛰어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다시, 언어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언어, 즉 다른 표현 수단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 수단으로 우리는 대표적인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즉, 수학과 과학, 과 같은 자연에 대해 기술하는, 해석이 아닌 기술을 최대한 하고자 하는 그 정제된 언어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여기서 수학과 과학이 진정 자연의 언어인지는 또 한계가 있다고 인지했기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한계로는, 수학과 과학의 언어의 탄생의 과정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보고’, 이를 해석, 추상적인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즉 무수한 변수를 벗겨 내고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했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신체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수학을 했다는, 과학을 했다는, 추상적인 사고를 했다고 보기에, 이는 인간의 언어와 비교해서, 자연의 언어는 결국 인간의 언어를 도구삼아 탄생했다는 것이고, 이는 인간의 언어와 혼동이 되기 너무나도 쉽다는 점에서, 이 언어로도 표현을 못하는 정도로, 나의 말을 다시 정리해서 서술해보고자 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수학과 과학은 자연을 기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로 탄생했으며, 그 수식은 인간의 경험으로 정립된 ‘언어’에 속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국 언어의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지만,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의 한계를 그 속에서 계속 드러냄으로서 한계를 자각시키는, 소중한 반-언어적 역할을 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상 과학중심주의가 우리의 언어의 한계를 벗겨내고, 또 인류의 진보를 향해서라면, 더 큰 세계로의 운동의 도구로써는 최선의 도구이고, 이는 우리가 갖춰야 할 필연성을 부여한다. 왜 갖춰야 하는 점은 다음부터 서술하겠다.
첫 문단의 첫 문장으로 돌아오자면, ‘우리는 대화함에 있어서, 언어로 소통을 한다.’ 언어의 탄생 목적은 결국 소통을 위한 것이고, 이 소통은 결국 불완전한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라고 정의를 하려면, 이 언어는, 서로를 같은 생각으로, 즉 사회적 행위를 위한, 의지를 하기 위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추상적인 관념이다. 이 추상이라는 점에서부터 우리는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배워야만 하고, 이 배움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그 추상적인 개념은 우리의 신체에 따른 경험으로 하여금 구체화되며, 이로써 우리는 결국 추상이라는 착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환각이고, 우리에게 자칫 소통의 목적을 잃을 정도로의 환각에 빠지게 된다. 환각을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 많고,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정치적인 말을 함으로써, 이 글에 대한 부정과 철저한 반성을 해야 한다고, 거기서 그치지 말고 우리가 왜 표현 수단을 많이 찾으러 노력해야 하는지, 진정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라는 목적론적 오류이기도 한 목적에 따른 합리화를 하는 것이므로, 양해를 부탁 드린다. 그래서 이는 다시 말해 왜 우리가 환각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실험을 해 나가야만 하는 강조는 되풀이 된다. 그 실험이라 함은, 모두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배제가 아닌 포용으로써의 그런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방법론에 대한 탐구이다. 해석은 실험이 아니다. 이는 평가이고, 과거에 머문다. 이 글 또한 해석인지라, 우리 모두는 이 글을 해석의 과정도 거칠 수 있지만, 실천으로써의 그 움직이고자 하는, 실천적인 방법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과 방법론은 참으로 내가 개념적으로 파악해보지도 않은지라, 부끄럽지만, 언어적으로도 매우 모호하고 사실 상 같은 것으로도 보이지만, 나는 편견을 조장하여 방법론에 대한 탐구에 집중을 하여 해석은 그저 우선순위로써 존재한다는, 방법론의 그림자로 생각하고자 한다. 왜? 인류의 진보를 위해.
그렇다면, 실험을 해 보자, 과연 언어 말고도 모두가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매개는 무엇이 있을까? 매개체라고 하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우리 모두 동감할 것이다. 돈이다. 돈은 우리 모두가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만인에 대해 인정된 매개이다. 돈으로 우리는 소통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언어보다 돈이 사실 상 인류의 이해에 더 쉽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진보의 최선의 방법으로서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이라고도 합리화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왜 소통이 많이 가능할 수록 인류의 진보가 진행되는 것이지? 퇴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진보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 나는 인류의 진보가 다시 말해 인류의 발전으로 동치할 수 있다고 보고, 이 기저에는 인류의 존속의 목적이 있다. 하지만, 발전에 대한 관점은 너무나도 많기에, 나는 그 오해의 소지를 인정하며, 인류의 존속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겠다. 다시 흐름으로 돌아와, 소통이 많이 된다는 것은, 인간 간 지식의 공유, 경험의 공유 등이 많이 된다는 점에서, 자연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확률론적 세계에서 인간의 생존에 대한 경우의 수가 매우 많아져, 이는 곧 생존 확률의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지식의 공유와 경험의 공유 과정에서, 네트워크가 끊어지는 과정도 우리는 수 없이 경험하곤 한다. 그래서, 이 네트워크의 연결 과정, 힘에 있어서 즉 공통의 언어로써 ‘돈’이라는 것이 아이 때부터 쉽게 이해가 되고 그만큼 비판도 가능한, 실험이 많이 이루어질 수 있는, 파급효과가 크다고 느끼기에, 자본주의가 인류의 생존에 대한 최선의 존속 체계라고 인식을 해볼 수도 있다.
일단 돈이라는 매개로 이 진행되는 실험은 이미, 경제학이라고도, 이데올로기라는 언어와 결합해 자본주의라고도, 충분한 실험이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그만큼 오류도 크고 혼란도 가중되어 가고 있다. 언어의 한계에 대한 모호한 정의들과 같이, 돈 또한 그 정의의 틀에 대입시키면 그럴싸한, 즉 한계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부단히 느끼곤 한다. 그렇다면, 돈 말고도 모두가 이해하고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다른 매개는 무엇일까? 언어도 당연히 나오겠지만, 나는 여기서 신체를 들고 싶다. 여기서 매우 주의해야 할 점이, 내가 신체라고 얘기한들, 언어와 분리되었다고 절대로 생각하는, 즉 정신과 몸 등의 이원론 등의 언어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계속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방법론을 이용해, 다른 방법론을 찾아보는, 한계에서 벗어나기의 실험의 과정을 하고자 하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신체라고 말하고 싶은데, 왜 그런가 하면, 일단 신체의 언어라고 말을 포장해서 시작해보자, 나는 결론적으로 ‘먼저’ 신체가 있기에 생각을 한다고 착각을 하고 싶으므로(사실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라고 말하고 싶지만, 합리화를 위해 ‘먼저’를 대입한 순간 인과관계로 착각을 부여하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이를 상관관계라고 보려고 한다.), 그만큼 생각의 공유에 앞서, 인간이라는 종의 일반적인 신체의 소통으로(눈짓, 몸짓, 웃음 등) 최대한의 소통 가능성과 그에 따른 의사소통의 성공 확률에 있어 시간 초기부터 매우 높다는, 즉 학습 난이도가 매우 낮다는 점을 들어 돈보다, 만인에 대한 포용의 수단으로 바디랭귀지는 인류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와 신체 상관관계를 따져보자 하면, 일단 두 부분이 같다고 단정지을 정도로 나는 관계성이 깊다고 느끼고, 신체가 있기에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즉 신체가 생각보다 더 큰 범주에 있는 언어로서 작동한다고, 애매한 말을 하게 된다. 뇌과학의 최근 연구를 보아도, 우리는 행동을 하고 그에 따른 생각을 만들어 낸다고 알려졌다. 물론 맹신하면 안 되지만, 그 데이터의 자료는 자연에서 추출한, 인간이라는 자연물로 하여금 발견 되어진거라 그만큼 언어에 비해 신뢰는 더 높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현 신체를 통해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로 하여금 신체가 필요 없어지는 소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나는 키보드에 타자를 두들겨서 쓰는 것이고, 이와 관계되어 나의 사고의 속도도 제어되거나, 부풀려지는, 그러한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글을 읽는 것도, 나는 눈으로 하여금 글을 읽는 것이므로, 이도 마찬가지이다. 말하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사고가 곧 신체를 제어하는 것은 착각이지만, 신체가 사고를 제어하는 것은 자연의 입장에서 당연한,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지금까지 수학, 과학과 같은 자연을 기술하는 언어, 그리고 돈, 신체를 들었다. 이처럼 우리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이런 예시들을 찾을 수 있고, 여기서 나는 해석을 더 하여 우리는 무슨 표현 수단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하는지 파악해보려 한다.
일단, 그 파악의 기준은, 결론이 이미 나버렸지만, 자연에서 바라봐서 판단하고자 한다. 자연에서 인간은 태어나고 성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교사의 입장이라면, 어느 표현 수단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아이들에게 비용이 낮을 것인가? 비용에 대한 공식을 찾고 싶으나, 이는 뒤에 더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일단, 인과관계적으로, 즉 시간이라는 관념을 덮어 파악해보자면, 먼저 아이들은 신체의 발달과 함께 경험을 통해, 신체의 언어를 배우고, 주위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언어를 배우는데, 이 과정은 양 쪽 모두 상당한 투자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신체의 언어 학습보다 난이도가 높다는, 비용이 높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돈이라는 언어는, 돈이라는 매개라고, 즉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있는, 언어적 체계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돈은 언어 학습보다는 뒤이어 배워지지만, 난이도가 낮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비용은 신체, 돈, 언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이라는 자연의 언어까지 오게 된다면, 이 순간부터 그 아이는 언어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엄청난 관계의 재정립, 즉 비용을 투자하게 되고, 난이도도 그만큼 높게 된다. 그래서, 예시들로 비용의 위계를 따져보면, 신체, 돈, 언어, 자연 언어 순으로 비용이 높아진다고 대략적으로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비용은 곧 소통에 있어서의 난이도 정도이므로, 어느 표현 수단이 소통의 가능성이 높은가 따져보면, 신체, 돈, 언어, 자연 언어 순이라고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존속이 아닌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 표현 수단에 있어서 한계를 계속 넘어야 하는, 포용을 하고자 하는 배제의 과정이 필연적이므로, 자연에 곧 근접한 언어가 다시 말해 한계 범위가 넓다는 것이므로, 중요도는 마찬가지로 신체에서부터 돈, 언어, 자연 언어 순으로 높아진다고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계에 다가갈 수록 오류도 높아지는 정도도 비례하므로, 언어와 자연 언어가 매번 착각에 빠지게 된다고도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상 자연 언어는 크게 언어에도 포괄되므로, 결국 신체, 돈, 언어 순이라고도 볼 수 있고, 이는 물질에서 관념으로의 인간의 운동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돈도 관념이므로, 사실 상 물질에서 관념이라는, 자연과 이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귀결로도 마칠 수 있지만, 여기서 이렇게 그친다면, 결국 나는 흐릿한 렌즈로 실천으로의 이행은 연결 짓지 못하는, 즉 자연과 이성의 매개에 대해 고찰해보지 않는, 안일함의 착각 속에 빠지므로, 이렇게라도 어지럽게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다. 우리는 실험을 해 보자에서 시작했으므로,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실험은 결과를 위한, 목적을 위한 도출이 아닌, 과정을 보자는 것이고, 이 과정은 실천으로 나타난다.
신체, 돈, 언어, 자연 언어로 돌아와, 그렇다면 그것 안에서 표현을 하는 순간, 결국 이는 한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닌, 이는 다시 말해 실험을 하지 않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당신은 춤을 춘다. 이를 영상을 찍어 올린다. 과연 그것은 실험인가? 여기서 우리는 표현 수단을 다른 표현 수단으로, 즉 목적에 따른 수단을 바꾼다는 것은 언어 틀에서의 실험이라고 규정되어지는 것이고,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다. 일단 언어적 측면에서 실험이란 목적을 위해 다른 표현 수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춤을 언어로 표현한다던가, 돈을 언어로 분석을 한다던가, 자연 언어를 -언어지만-, 즉 경계를 뛰어넘는 당신은 주체로서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당신은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의 실험을 말하고자 하는 순간, 이는 말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체를 돈이라는 표현 수단으로 표현한다고 이렇게 적는 순간, 이는 신체와 돈을 언어라는 표현 수단으로 해버리는, 즉 실험적 성격은 사라지는 것이다. 당신은 진정 예술작품을 볼 때 이해하려 하는가? 해석하려 하는가? 그 순간 당신은 그 해석의 틀이 언어에 있다고 자각을 했으면 좋겠다. 당신은 그 순간 그 실험을 하고자 하는 예술작품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처럼, 현대에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치적으로 문해율이 높아지는 추세를 들어, 언어의 공유는 곧 언어의 한계에 단체로 빠져서, 언어의 놀이 속에서 배제가 만연해지는, 포용으로써의 그런 실험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뭐든지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인류의 퇴화를 보는 것이고, 배제는 인류의 퇴화에 선행된다. 우리는 포용을 해야 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즉 공유의 목적으로 설정해, 해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해석에서 표현으로도 가야 한다는 출력의 과정, 즉 생각의 산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매개가 진정 인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매개는 적극 장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 역설적이지 않는가? 이 사회는 표현이 만연해 문제가 많다고 하면서도,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전자에의 표현과 후자에의 표현의 의미를 구별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언어적으로도 상당히 이렇게 모순적인데, 갈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필요로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대화의 촉진재로서 그 매개의 최적합체는 현 시점에서 무엇일까? 나는 기술이라고 든다. 기술은 신체, 돈, 언어를 포괄한다. 소통의 비용을 대폭 경감시키다 못해 신체, 돈, 언어라는 인간과 인간의 관념은 무의미해진다. 인본주의는 흔들리는 것인가? 나는 적어도 그렇다고 본다. 주제를 아주 확장하고 이만 글을 줄여보겠다.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이끌었고, 이는 두 부분의 해석에 따른 이데올로기들의 투쟁의 근본적 원인이기도 하다. 인본주의가 흔들리는, 인간이라는 종이 대화의 필요성 조차도 느끼지 않는 그 순간이 온다면, 즉 대화가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그동안의 노력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이제 가축화로 진행된다. 욕망하는 기계이지만, 쓸모가 없는 기계로 전락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