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니체를 찾고.

푸른 선혈

 글을 쓰는 도중에, 빨간색 볼펜이 바닥에 떨어지니 붉은 잉크가 팍-하고 터지고, 그 잉크는 쓰레기가 된 볼펜을 집으려 하던 내 손가락을 끈적하게 적시고, 나의 흐릿한 두 눈은 그 엄지손가락 끝을 보며, 찝찝하면서도 불쾌한 감정과 동시에, 그것을 내 피로 속여 무수한 이들에게 동정, 연민, 관심을 받고 싶다는-청소년기 자아 중심성이 나타내는 특성 마냥-이상한 짜릿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에게 말과 행동 등으로 가식으로 보이는 관심을 표하는 이들에게 “이거 잉크야”라고 말을 하고 싶은 기만의 충동이 든다. 물을 가장 세차게 틀고 염증처럼 부어오른 듯하게 커다래지는 나의,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지문이 닳도록 빡빡 닦아보지만 지워지지 않는 잉크처럼 나의 그 어쩔 수 없는 주목을 받고 싶은 여우 같은 마음도 좀처럼 씻겨 내려가기는 커녕 여우는 늑대가 되고 욕망에 자신이 먹히기를 고대한다.

 현재의 대중과 전문가 뿐 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두가 사회가 절대적으로 나의 아픔을 거짓으로 단정하더라도 잉크를 피라고 확신시킨다면, 점차 신체적 무(無)의 고통에서 정신적 유(有)의 고통으로 재탄생하여 그 통증을 즐기고 싶다는 나의 운명적 나약함을 몸소 느낄 수 있고 이는 곧 자신을 위로해 줄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나는 이처럼 원하지 않은 척 수동적으로 삶을 살면서 막상 모든 비극 중 제일가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주목받고 싶어 하는가? 또 왜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 단순히 자신을 속이고 속여, 그 멀쩡한 자상에서 나오는 차가운 나의 피로 침묵의 비명을 지르고자 하는 모든 것이 거짓인 것을 진실로 채택한 것인가?

 그렇게 온갖 허울을 씌우기 시작해 ‘자신의 자신’이라는 세계를 축조하고 꿈같은 이상 속에서 살고 있다며 나의 모든 것을 ‘자신’이라는 타인에 맡기면서 ‘자신’ 세계의 시간이 곧 자신이 즐기는 삶의 시간이고 자신의 행복임을 타인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은 단절된다. 애초부터 자신만을 믿고 ‘자신’이라는 만들어진 자아 속에서 마치 달걀 속에서 성숙한 닭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안주하는 자신인데, 증명의 의미인 참/거짓의 판단 행위는 철저히 거부하면서 타인에게 해명을 꼭 해야 한다는 의무와 그에 따른 통렬한 다른 성격의 고통으로 느껴지는 책임을 느끼고 있는 이유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의 원인에 대한 결론은 크게 하나로 강렬하게, 추상적으로 추려진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사랑의 극단에서 끝부분인 증오를 하는 중인 것이다. 바로 자신 말이다!

 그렇게 정신적 자해를 마음껏 하는 동시에, 생존적 욕구는 나의 나약함과 인간성이라는, 실은 진실한 자아를 타인에게 분출하고 싶어 하고 있다. 이 생존적 욕구이자 의지는, 진화론적으로 분명히 나의-인간의 불완전함으로 대변되는-미성숙에서 일어난, 타인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본능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있겠는가? 이제 나는 생각한다. ‘저는 사실 대단히 아픕니다.’, ‘저는 고통과 저주의 굴레에 치이고 짓밟히니 당신들의 연민과 동정이 필요해요’ 등 따위의 관심을 끄는 생각들이 든다. 그와 동시에 나는 생각하는 짐승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본래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사고에 대한 유무로 분류되는데, 나는 사고를 해 봤자 그런 과한 본능에 따른 생각으로 비춰보아 생각하는 짐승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또 웃긴 점이 이렇게 자아비판을 하면서 침묵의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즐기는 자신을 더욱더 하찮게 보고, 그렇게 나는 비 내리는 사막으로, 가벼운 심해로, 맑은 우주로 간다.

 우울이란 이런 글이다. 우울이란 이런 행동이며, 우울이란 우울을 고통이란 환희 속에서 낳고, 사방팔방 얼룩을 퍼트리고, 마침내 어긋난 자아를 만들어 진정한 자아에 기생해 끝내 지배하고 만다. 질병이란 ‘유기체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된 상태’라 하니, 이러한 우울감에 지배된 나는 정상이 아니라고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으므로, 내 마음이 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스트레스로 인한, 병으로 시작되어 스트레스를 거치고 이 과정을 무 비판적으로 수용해 갑작스레 일어난 원인 모를 폭발하는 분노 같은 비정상적 감정을 유치하게나마 붉은 잉크를 ‘피’로 둔갑시키는 망상을 함으로써 승화시키고자 하던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묻는다. 나는 왜 병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군대에서 느낀 경험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듯한 눈치가 들 정도의 감정 기복이 점차 들쑥날쑥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고,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원하지 않는데 너무 서럽게 나와 나를 당황하게 한 잊고 싶은 기억으로 보아 망상이 심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내면의 우울과 분노를 억지로라도 꺼내어 두통으로 새하얘지는 글을 꾸역꾸역 작성해 나가는 것일까? 바로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이 수필을 작성 중인 것이다. 이 글을 그저 아픔을 회피하려고 적지 않았다면, 나의 우울은 암처럼 퍼지고 퍼져 매번 온몸을 더 비틀고 찌를 것이다. 암 따위의 병을 치료하려면, 그것에 대한 철저한 분석, 그리고 직접 칼을 갖다 대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지 않기보다는 적는 것이 좋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우울도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언제 이 편집증적 우울은 사라질 것인가는 바로 이 비탄의 글이 끝남과 동시일 것이다. 세네카는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분노로 비추어지는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이 굴레를 끝마치기 위해서, 다시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나를 증오하게 된 것인가?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왜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가? 타인에 비해 완전하지 않아서? 열등감 콤플렉스에 빠져서? 나는 생애에 있어서 물질적으로 허덕이지 않았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정도의 잔인한 고통을 주는 가난부터 돈이 급해 돈에 쫓기는 정도까지 못 느껴 보았고, 그에 따라 나의 그러한 쪽의 욕구는 충족되기를 넘어 욕망과 욕심, 그리고 허영심만 자라날 뿐이었다. 다시금 묻는다. 자신을 왜 증오하는가? 자신에게 너무 관심이 많아서 사소한 것들도 너무나도 잘 보여서 그런 것 아닌가? 자신에게 지나친 관심과 그에 따른 집착을 놓으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잠시나마 치우고, 나의 세계를 넘기만 한다면, 그러한 변화의 고통을 이겨낸다면! 나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이전의 나는 그렇다고 무가치한 한 줌의 재로 버려진 것일까? 과연 아니다. 이 재가 있기에 나는 비옥하게, 그리고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자신에 대한 집착을 끄는 순간, 나의 오감에는 타인을 향하고 있고, 타인을 추구하고, 타인을 만나고 싶은 감정이 너무나도 크게 나의 흥분을 배가시킨다. 이 흥분과 기대가 큰 만큼 실망과 좌절도 큼과 동시에, 나의 우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악순환의 시작을 울린 무언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외로움’이었다! 쇼펜하우어는 고독은 행복과 마음에 대한 평정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말을 했지만, 전제조건으로는 자신만의 독자성을 굳건히 갖는 사람이어야지 가능한 것이므로, 불완전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한 나로서는 고독을 추구해서는 위험이 크다고 판단된다. 그 근거로 고독에서 파생되는 이러한 성찰이라는 가면을 쓴 자아비판을 즐기고 해서 자신의 머릿속에 파란 실타래들이 서로 엉키고 엉켜 우악스러운 군집을 형성하고 드디어 이런 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아 성찰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금 와서야 처절히 깨닫는다.

 다시 말해 나는 그동안 모든 우울의 근원이 곧 고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고독과 외로움만으로 우울감에 빠지는 것이 아닌, 자아 속 내재가 되어있는 세계 속에서 홀로 안주하고 싶은 자신 속의 자신과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대변되는 나약함에서 일어난, 타인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본능에 따른 자신 간의 대립으로 더욱 수렁에 빠지는 것이라고 자연스레 말한다. 그러나, 과연 외로움을 없애려고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난다면, 외로움을 더욱 느끼지 않을까? 마치, 평등을 부르짖는 사회일수록 더욱 평등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옆에 있는 존재 자체로 순수한 행복을 느낄 그 존재, 그 사람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 같은 진정한 소망은 본래 사회로부터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거리가 멀어진 군대라는 이곳에서 더욱 증대되어 매번 꿈은 깊어지고 인간관계에 대한 갈증 또한 무수히 느끼게 된다. 비록 물질적 결핍으로는 나와의 상황이 다를지언정, 인간관계에 대한 똑같은 현기증을 느끼고 분열증을 느꼈다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이 나인 듯 그와 나의 슬픔을 연결 짓고 싶을 정도이다.

 터진 볼펜에서 흘러나오던 그 빨간 피, 아니 평범한 잉크는 이제 굳어서 흘러내리지 않고, 나의 편집증적 망상은 점점 상상으로, 잡념으로 변해간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특별한 존재이므로 연기하게끔 하는 우울이라는 감옥을 지어 그 속에 살면서 원인 모를 편두통으로 계속 앓고만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나의 살아있는 생생한 피가 그 쾌락을 그만 즐기라고 신호를 계속 보내 편두통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병이던 나는 중대장한테 긍사적천,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라는 뜻의 말을 들었고, 현재 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라고, 적어도 군대에서의 좌우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이 군대에 와서 더욱더 깊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당연히 바꿀 수 없으면, 나의 사고를 바꾸면 될 터. 이 글을 작성할 시기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가 유행하는 시기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당연시되는 때이다. 그러나 군대라는 특수한 작은 사회에서는 방역수칙만 잘 지킨다면 집단생활을 큰 지장 없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의 외로움은 오히려 용사와 간부들 덕분에서 시나브로 사라져 갈 수 있고 나의 좌우명을 실현해 볼 수 있는 환경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군대를 다시금 기회로 본다.

 나의 외로움은 특별한 것이 절대 아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쌀쌀한 가을바람이다. 작년과 올해는 유난히 더욱더 추웠고, 대부분 몸을 웅크린 채 안으로, 안으로 생각만 하는 동면에 빠져있고야 말았다. 그대들이여, 봄날은 이러한 시기가 있기에 더욱 찬란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다. 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나를 믿는다. 드디어 나의 개벽은 이 글이 끝남으로써 일어났다!

게시자: Phronesis.ysb

건축과 도시, 그리고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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