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저자사항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 지은이: 유발 하라리 ; 옮긴이: 김명주
Harari, Yuval Noah[1976-] 김명주
발행사항파주 : 김영사, 2017
형태사항619 p. : 삽화(일부천연색), 도표, 지도, 초상 ; 22 cm
주기사항원저자명: Yuval Noah Harari
원표제: Homo deus : a brief history of tomorrow
참고문헌(p. 551-596)과 색인수록
영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
표준번호/부호ISBN 9788934977841 03900: ₩22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331.544 [909.6] 듀이십진분류법-> 303.49 [909.83]
1. 인류의 새로운 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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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동안 이 질문(“오늘 해결할 일은 뭐지?”)에 대한 대답은 그대로였다. 똑같은 세 가지 문제가 20세기 중국인, 중세 인도인, 고대 이집트인을 사로잡았다. 기아, 역병, 전쟁은 언제나 이 목록의 최상 위에 있었다.
- 중국인을 넘어 대한민국도 구한말까지 기아, 역병, 전쟁은 국가적으로 큰 과업이었다. 저서 ‘쌀 재난 국가'(이철승, 2021)에서는 산업화 시대까지 이루어진 벼농사 체제로 인해 기후라는 것도 매우 중요해지는 바, 기아는 곧 국가가 담당하는 사업이었다. ‘좀 더 복잡한 통계분석(다중회귀분석) 결과, <삼국사기>에 기록된 여러 대형 재난 중 오직 가뭄만이 왕의 재위 기간을 단축시키는 데 유의미한 결과를 보였다.’ 이는 기아와 직결되었던 가장 큰 변수였던 것이고, ‘다양한 자연재해 중 가뭄과 역병이 동시에 창궐할 경우가 전근대 국가들에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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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 번째 천년이 밝아올 무렵 인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 일이지만,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들은 이제 자연의 불가해하고 통제 불가능한 폭력이 아니라 관리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이제 어떤 신이나 성자에게 이 문제들에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기아, 역병, 전쟁을 막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고, 대개는 잘 막아낸다.
- 우리는 폭력이 감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평등한 사회를 이루려다가 평등에 더욱 예민해지듯, 폭력의 감수성은 증가하고 있어서, 직접적 폭력보다도,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이 대두되는 실정이다. 관리는 국가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는 법의 해석인 바, 과거의 폭력 사례로부터의 예방의 연장선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사람보다 많고 자살하는 사람이 군인, 테러범, 범죄자의 손에 죽는 사람보다 많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가뭄, 에볼라,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죽기보다 맥도날드에서 폭식해서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 경제사로 보면, 소품종 다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 이제는 다품종 다량 생산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강령이기도 한 ‘비평’의 시대의 착실한 교인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의 홍수에 피로해진 우리는 대중이라는 믿음을 따르게 되고, 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유행’이라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렇게 대량 효율적인 폭식은 이루어진다.
우리가 기아, 역병, 전쟁을 통제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다음으로 무엇이 인류의 최상위 의제로 떠오를까?
- 그러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역병, 전쟁의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은 최상위 의제를 찾는 일은 우선이 아닌 듯 하다. 그러나, 역병과 전쟁에 관련한 통제와 판단은 정부가 대신 하고 있다. 미래를 살아갈 청년들은 불안한 의지를 함과 동시에 그 너머 불안한 미래를 보려고 한다.
생물학적 빈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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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부 지역에 이따금씩 대기근이 닥치지만 그것은 이례적이며, 십중팔구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정치가 부른 인재이다. 세계에 자연적 기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정치적 기근만 존재한다.
지금도 배를 곯는 사람들이 하루 수억 명에 달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제로 굶어죽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 배부름에 익숙해지면, 조금이라도 배고픈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풍요로운 사회에서 갈증을 더 느끼고 있는, 바닷물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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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다.
버벌리힐스에 사는 부자들은 양상추 샐러드와 퀴노아를 곁들인 찐 두부를 먹는 반면,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트윙키 케이크, 치토스, 햄버거, 피자를 배터지게 먹는다. 2014년에 21억 명 이상이 과체중이었던 반면,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은 8억 5000만 명이었다. 2030년에는 인류의 절반이 과체중일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에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정도였던 반면,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300만 명이었다.
- 통계적 자료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도 정보의 양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풍요롭다. 자기관리는 ‘자기’ 스스로 했지만, 이제는 이러한 데이터들의 조합으로 관리를 해준다. 동시에 자신은 데이터화가 되어 점차 완전히 해석가능한 존재로 변한다.
보이지 않는 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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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까지 어린이의 약 3분의 1이 영양실조에 질병까지 겹쳐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 조선시대 평균 수명은 40세였다. 그러나 저 통계가 사실이라면, 상당히 잔혹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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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전염병의 발생률과 피해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전 세계 아동 사망률은 역사상 최저로,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 어린이는 5퍼센트 이하이다. 선진국에서는 아동 사망률이 1퍼센트도 안 된다.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20세기 의학이 예방접종, 항생제, 위생 개선, 더 나은 의학 인프라 등의 성취를 인류에게 제공해준 덕분이다.
- 동시에 지금은 공교육의 증가로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 인프라 혜택을 얻고 있다. 문해율도 대한민국 같은 경우에는 매우 높아 이미 문맹을 찾기란 전후세대를 제외하곤 찾기가 정말 어렵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의 문해율은 낮아지고 있다. 이는 또 역설적이게도 인프라의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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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바이러스 자체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이 바이러스는 면역계를 파괴하여 환자를 다른 여러 질환에 노출시킨다. 에이즈 환자를 죽이는 것은 이러한 2차 질환들이다.
- 코로나-19도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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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은 암과 심장병 같은 비감염성 질환으로 죽거나 단순히 노환으로 죽는다. (암과 심장병은 새로운 병이 아니다. 이 병들은 실은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이런 병들로 죽을 만큼 오래 사는 사람이 비교적 적었다.)
- ‘노화의 종말'(데이비드 A. 싱클레어)에서는 노화를 질병으로 취급하고 노화를 해부하고 진단한다. 이처럼 과거에는 죽음에 직접적인 여러 변수들이 존재했지만, 요즘은 노화와 무관한 질병이 점차 줄어들면서 동시에 노화라는 변수가 커졌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건강, 사망률, 노화를 연구하는 에일린 크리민스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미국인의 평균수명은 늘어난 반면 건강수명은 그만큼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2015년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환율(일정 기간에 인구 중 병에 걸리는 사람의 비율)을 억제하기보다는 사망률을 줄여 왔다.”‘ 이처럼 현대로 오면서 우리의 수명은 실제로 늘었지만, 또 다시 노화라는 벽에 막혀 뒤이어 나올 생명의 존엄성에 의문을 가하는, 건강이 아닌 생존에만 우선 집중하는 안타까운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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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감염병은 주로 병원균의 게놈에서 일어난 우연한 돌연변이의 결과로 생겨난다. 이러한 돌연변이들로 인해 병원균은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파되고, 인간의 면역계를 극복하고, 항생제 같은 약에 내성을 지닐 수 있다. 인간이 환경에 끼친 영향 탓에 요즘엔 그런 돌연변이들이 과거보다 더 빠르게 발생하고 전파된다.
정글의 법칙이 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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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로 좋은 소식은 전쟁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을 당연한 일로 여긴 반면, 평화는 일시적이고 위태로운 상태로 간주했다.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정글의 법칙이므로, 두 정권이 사이좋게 지낸다 해도 전쟁은 언제든 터질 수 있었다.
-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나 쾌락은 고통의 부재라고 했다. 이는 인본주의적으로 본다면 평화는 전쟁의 부재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대는 정말로 평화로운 시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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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처음으로 정부, 기업, 개인들이 미래를 생각할 때 전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과도 같은 미친 짓으로 만들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강대국들은 무력충돌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하지만 이는 핵을 가진 자들만이 논할 수 있는, 평화는 목적일 뿐인 차선책일 뿐이다. 여기서 평화학자 갈퉁을 언급하고자 한다. 갈퉁은 평화를 ‘국가 안보’라는 거시적인 정치적인 단어로 다루기보다는 인간의 존엄성, 삶의 질을 중시하는 ‘인간 안보’차원으로 좁히며 진정한 평화, 즉 적극적 평화는 평화적 수단으로 이루어지는 평화라고 그는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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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라는 말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이전 세대들이 평화를 일시적인 전쟁 부재 상태로 생각했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를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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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0년 동안 인류는 정글의 법칙뿐 아니라 체호프의 법칙도 깼다. 안톤 체호프는 “연극의 1막에 등장한 총은 3막에서 반드시 발사된다.”고 했다. 그동안의 역사에서 왕과 황제들은 새로운 무기를 획득하면 곧바로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1945년 이래 인류는 그런 유혹에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냉전의 1막에 등장한 총은 결코 발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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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의 본질은 쇼이다. 테러범들은 끔찍한 폭력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우리로 하여금 중세의 혼돈 속으로 뒷걸음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따라서 국가들은 종종 테러리즘의 연극 효과에 안보 쇼로 대응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국민을 억압하거나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등 힘을 대대적으로 과시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테러리즘에 대한 이런 과잉반응은 자국의 안보에 테러범들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된다.
- 이처럼 테러리즘은 특정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테러리즘의 진정한 목적은 혐오감을 넘어서는 공포감일 것이다.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테러리즘은 생생히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러나 대량 살상만큼이나 허무하고 혼돈이 오는 것은 대량 사고이다. 이는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십상이다. 이는 재난, 기아, 역병하고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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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들이 계속 도발해도, 결국 모든 것은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 정글의 법칙이 다시 발효된다면 그것은 테러범들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 의미의 재생성, 해석의 재생산. 우리는 해석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눈은 감을 수 있어도, 귀는 닫을 수 없다. 우리는 범람하는 정보의 수용에 지치기 십상이다. 이는 에코 쳄버 현상(반향실 현상)으로 끔찍하게 울려퍼진다. 반응을 못하는 것 만큼이나 잘못 반응하는 것이 두렵다. 반응하는 정도만큼 나의 정서는 그만큼 요동친다. 결국 우리는 사건이 발생하면,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 피하는 것이 아닌, 반-정치적 해프닝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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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엇이 기아, 역병, 전쟁을 대신해 21세기 인류의 최상위 의제에 오를까?
-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묻는다.
중요한 과제 하나는 우리 자신의 힘에 내재된 위험들로부터 인류와 지구를 보호하는 것이다.
- 인본주의적 접근이다. 우리가 짐승과 다른 점은 이성을 갖고 있다고 대다수는 대답한다. 그 의미는 우리는 이성이라는 힘을, 이는 인류와 지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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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 계몽의 시대, 산업혁명을 거치고 난 뒤의 과도기적 시대였던 19세기 말, ‘선언’의 시대이기도 한 모더니즘이 한창 꽃피우고 있었다. 기술 낙관주의와 동시에, 세기말적 분위기도 띠고 있었다. 찰스 디킨즈의 ‘두 도시 이야기’의 유명한 첫 문장은 이를 느끼게 해준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인류는 개인과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마다의 목표를 가지기 시작했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죽음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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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인간은 불멸에 진지하게 도전할 것이다. 노화와 죽음과의 싸움은 인간이 그동안 해온 기아와 질병과의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고, 이 시대의 문화가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 인간은 먼 옛날부터 자연에 순응하다가, 대등해지려고 했고, 이제는 넘어서려고 한다. 이는 집약적 노동, 총체적 결과물인 건축으로 먼저 표현되었고, 이제는 인간 스스로 넘어서려고 한다. 인간 생명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지만, 과연 그 대상은 누구일까. 스스로의 증명을 이루어가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역사를 통틀어 종교와 이념은 생명 그 자체를 신성시하지는 않았다. 종교와 이념은 언제나 세속적인 존재 위의 어떤 것, 또는 그런 존재를 초월한 뭔가를 신성시했고, 따라서 죽음에 꽤 관대했다. 오히려 몇몇 종교와 이념은 죽음의 사신을 대놓고 반겼다.
- 대놓고 중세 가톨릭에서의 현세는 천국으로 가기 위한 고행의 길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성시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의 평민이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기만당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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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법이 있다.
- 기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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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죽음은 거의 자동적으로 소송과 수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죽었을까? 누군가 어딘가에서 잘못한 것이 틀림없다.”
-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중으로 중첩된다.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지?” 그리고 “죽은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전자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은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이 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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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조건은 초인간들을 역사상 가장 불안한 사람들로 만들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그날그날 위험을 무릅쓰며 사는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말라야산을 등반하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길을 건너거나 집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하는 등 많은 위험스런 행동들을 한다. 하지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는다면, 미치지 않은 한 목숨을 걸어가며 그런 정신 나간 도박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정신 나간 도박을 하지 않는 대신 정신 나갈 정도로 예민해질 수 있다. 물론 환경과 자신의 조절을 이룬다면, 상관없다. 생명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그렇고 당연하지만, 만일 생명의 복제가 이루어지고 그만큼 생명에 대한 가치가 사라진다면… 일단 지금 언어로는 가치의 혼동이 너무 많아 글을 적어보았자 무의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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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과학은 장례식만큼 진보한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한 세대가 사라질 때 비로소 새로운 이론이 옛 이론을 뿌리 뽑을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 그 유명한 토머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도 그것이다. 이는 결국 세대 갈등의 본질이기도 함과 동시에 해결의 불가능함을, 무기력함으로 알려준다. 구조주의 철학의 변화 가능성도 내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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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평균 기대수명이 지난 백 년 동안 두 배가 되었지만, 그것을 토대로 백 년 뒤 기대수명이 그 두 배인 150세가 될 거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 1900년에 인간의 기대수명이 40세를 넘지 않았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 감염병, 폭력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현대 의학은 인간의 자연수명을 단 1년도 연장하지 못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서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과의 전쟁에 거부할 수 없는 추진력을 제공할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의 일상에 신체적 문제가 끼치는 영향을 못 느끼거나 미미하게 아는 이들은 과감하게 죽음에 대한 순응을 하는, 항상성 유지에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이는 담배를 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담배 피는 사람들을 보면 그만큼 관리 잘 하는 사람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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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닌 예술적 창의성,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앙심은 상당 부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연료를 얻는다.
- 현대 사회에서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듯 싶다. 사회적 죽음은 곧 사형 선고와도 같고, 이는 실제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에 결국 두려움의 확산은 당연한 듯 싶다.
행복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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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의제에 오를 두 번째로 큰 주제는 행복의 열쇠 찾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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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만 계속되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에피쿠로스에게 행복 추구는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것이었다. 반면 현대 사상가들은 그것을 집단적 과제로 간주한다. 개인이 정부차원의 계획, 경제적 자원, 과학적 연구 없이 행복을 찾아나선다면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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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기업가들은 부를 키워야 하고, 학자들은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왕이나 국가 또는 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과 내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많은 이들이 벤담의 비전에 대해 번지르르한 말을 쏟아냈으나, 정부, 기업, 연구실은 눈앞의 분명한 목표에 집중했다. 국가가 생각하는 성공의 척도는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영토의 크기, 인구증가, GDP 증대였다. 독일, 프랑스, 일본 같은 산업화된 나라들은 대규모의 교육제도와 보건복지제도를 만들었지만, 이 제도들의 목표는 개인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국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학교를 세운 것도 국가에 충성할 유능하고 말 잘 듣는 시민들을 길러내기 위해서였다. 18세 청년은 애국심을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읽고 쓸 줄 알아야 했다. … 보건제도도 … 복지제도도 원래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국민연금과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을 때, 그의 주된 목적은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70세가 되면 나라가 당신을 보살펴줄 테니, 18세에는 나라를 위해 싸우고 40세에는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생명 추구권, 자유 추구권과 함께 행복 추구권을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세 가지 권리로 규정했다. 그런데 미국 독립선언문이 보장한 것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였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토머스 제퍼슨이 국민의 행복 보장을 국가의 책임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는 단지 국가권력에 제한을 두려 했을 뿐이다. 즉 국가의 감시를 받지 않는 사적 선택의 영역을 개인들에게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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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국민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국민은 생산이 아니라 행복을 바란다. 생산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행복의 물질적 바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생산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었다. 행복은 쉽게 오지 않는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인류는 유례없는 성취를 이루었지만, 지금 사람들이 옛날 조상들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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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튼튼한 기둥이 행복의 유리천장을 떠받치고 있는데,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인 것이다. 심리적 수준에서 보면,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기대치에 달려 있다. 우리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와 기대가 일치할 때 만족한다. 나쁜 소식은, 조건이 나아질수록 기대가 부풀어오른다는 것이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인류가 겪은 것처럼 조건이 확 좋아지면,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대치가 높아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성취하면 할수록 불만이 커질 것이다.
생물학적 수준에서 보면, 기대와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화학적 조건이다.
- 결국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관계없이 생화학적 조건만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할 것인가? 그 조절하는 순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그 무수히 많은 외부 상황들을 고려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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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에 따르면, 행복과 고통은 단지 그 순간에 어떤 신체감각이 우세한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반응할 뿐이다.
- 그렇다. 항상성 유지로 인해 그렇게 많은 마약 중독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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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과학에 따르면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승진하고, 복권에 당첨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 몸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감각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 그 말은, 유쾌한 감각을 일으키게 만들기만 한다면, 이는 무수한 방법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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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진화 탓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기제는 수없이 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생존과 번식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 적응했을 뿐, 행복을 위해 적응하지 않았다.
- 그래서 생존과 행복이라는 두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지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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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설명처럼 행복이 실제로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에 달려 있다면, 영구적인 만족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기제를 조작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사회개혁, 정치혁명 따위는 잊어라. 전 세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인간의 생화학적 기제를 조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난 몇십 년 동안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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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정신과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고 있다. 그들은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일상적인 기분저하와 주기적 우울감에 대처하기 위해 그런 약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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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국인 병사 가운데 12퍼센트, 아프가니스탄에 주둔 중인 미국인 병사 가운데 17퍼센트가 전쟁의 압박과 고통을 덜기 위해 수면제나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이 병사들에게 두려움, 우울증,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것은 포탄, 지뢰, 차량폭탄이 아니다.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신경망이 그런 문제들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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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학적 행복 추구는 세계 최대의 범죄 원인이기도 하다. 2009년 미국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절반이 약물 때문에 이곳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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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생화학적 행복 추구를 규제하고자 ‘나쁜’ 조작과 ‘좋은’ 조작을 분리한다. 원칙은 명확하다. 정치안정, 사회질서, 경제성장을 강화하는 생화학적 조작은 허가하는 것을 넘어 장려한다. 안정과 성장을 위협하는 조작은 금지한다. 하지만 매년 새로운 약물이 대학 연구실, 제약회사, 범죄조직에서 탄생하고, 국가와 시장의 필요도 변한다. 생화학적 행복 추구가 가속화함에 따라 정치, 사회, 경제의 모습도 바뀔 것이고, 그럴수록 생화학적 행복 추구를 통제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다.
67
행복에 대한 이런 불교적 시각은 생화학적 시각과 공통점이 많다. 쾌락은 생겨나자마자 사라지고, 쾌감을 갈구할 뿐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한 불만 상태가 계속된다는 데 양측은 동의한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양측이 꽤 다르다. 생화학적 해법은 한순간도 쾌감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쾌감을 제공하는 제품과 치료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쾌감에 대한 갈구 자체를 줄여 쾌감이 우리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부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마음수련을 통해 감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이 덧없고 무의미한 동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런 감각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게 된다. 생기자마자 사라지는 것을 뭐하러 뒤쫓는가?
지구라는 행성의 신들
73
수천 년 역사는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격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딱 하나의 상수가 있었는데, 바로 인류 그 자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기술로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할 수 있을 때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인류의 역사가 끝나고 완전히 새로운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74
21세기 인류의 세 번 째 큰 과제는 신처럼 창조하고 파괴하는 힘을 획득해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세 번째 과제는 앞의 두 과제를 포괄할 뿐 아니라, 이 두 과제에 의존하다.
77
건강, 행복, 힘을 추구하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될 때까지 자신들의 모습을 한 번에 하나씩 점진적으로 바꿔나갈 것이다.
누가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을까?
78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많은 이들이 유전자 조작 아기나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연구비와 교수직과 관련된 시간 척도에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아직 멀었다’는 말은 대략 20년 정도를 뜻하고, 기껏해야 50년을 넘지 않는다.
80
우리가 거대한 미지의 세계로 빠르게 돌진하고 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죽음 뒤에 숨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은 누군가 브레이크를 밟아 그 속도를 늦춰줄 거라는 바람이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브레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시스템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멈출 사람도 없다.
둘째, 만일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밟는다면, 경제가 무너지고 그와 함께 사회도 무너질 것이다.
85
결국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한 발짝씩 유전자 아기 카탈로그를 집어드는 길로 들어설 것이다.
모든 업그레이드가 처음에는 치료를 이유로 정당화된다.
지식의 역설
87
지난날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아마 행복, 신성, 불멸을 추구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우리를 죽일지라도 말이다.
88
지식이 축적될수록 예측은 어려워진다.
89
이것이 역사 지식의 역설이다.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지식은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행동을 바꾼 지식도 곧 용도 폐기된다. 우리가 데이터를 더 많이 보유할수록,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
90
… 그 결과 현재를 이해하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데 점점 더 무능력해진다. 1016년에는 1050년의 유럽이 어떤 모습일지 에측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다. 분명 왕국은 멸망할 것이고, 미지의 습격자들이 침입할 것이고, 자연재해가 닥칠 것이다. 그렇지만 1050년에도 여전히 왕과 성직자들이 유럽을 통치할 것이고, 농업사회일 것이고, 국민 대부분이 농부일 것이고, 계속 기아, 역병, 전쟁으로 큰 고통을 당할 것이다.
잔디의 간략한 역사
91
과학은 단지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분야의 학자들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그럼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미지의 미래를 열고자 한다. 역사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따금씩 역사학자들이 예언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성공 사례로 꼽을 만한 것은 딱히 없다),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92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 과정을 공부하고, 미국 흑인들이 노예무역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목표는 과거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93
대저택 입구에 깔린 정갈한 잔디는 따라서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지위의 상징이었다.
1막에 등장한 총
99
불멸과 신성에 대한 꿈 앞에서 사람들이 당황하는 이유는 그것이 낯설고 불가능한 일처럼 들려서가 아니라, 그렇게 직설적이고 말할 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100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는 인본주의의 논리적 결론인 동시에 인본주의에 내재된 결함들을 드러낸다.
우리는 인본주의의 결함이 드러나는 과정을 노인 병동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는 인본주의의 고집스러운 믿음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 무엇이 신성하다는 건가요?”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 애처로운 상태에 이를 때까지 환자들을 무리하게 살려둔다.
지금으로서는 불멸, 행복, 신성이 최우선 의제로 올라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목표들을 거의 달성할 무렵, 그 목표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격변들이 우리를 전혀 다른 목적지로 향하게 할 것이다.
여기에 기술한 미래는 과거에 기반한 미래일 뿐이다. 즉 지난 3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생각과 희망들에 기반한 미래이다. 진짜 미래, 즉 21세기의 새로운 개념과 희망에서 탄생한 미래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되짚어 호모 사피엔스가 누구이고, 인본주의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으며, 왜 인본주의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가 그 꿈을 해체할 수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것이 이 책의 기본 얼개이다.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 인류세
107
하지만 지난 7만 년을 인류세, 즉 인류의 시대로 부르는 것이 나을 듯핟. 이 몇만 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생태계의 독보적 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래가 없는 현상이다. 약 40억 년 전 생명이 처음 출현한 이래, 단일종이 혼자 힘으로 지구 생태계를 변화시킨 예는 없다. 생태혁명과 대멸종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사건들은 특정 종인 도마뱀, 박쥐, 곰팡이가 일으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 지각판 운동, 화산 폭발, 소행성 충돌 같은 자연의 막대한 힘이 그런 사건들을 일으켰다.
108
그런데 지금 인류는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대체하고, 생명을 유기적 영역에서 비유기적 영역으로 확장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110
수만 년 전 석기시대 조상들이 동아프리카에서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이미 그들이 정착한 모든 대륙과 섬의 식물상과 동물상을 바꿔놓았다. 그들은 전 세계의 다른 모든 인류 종,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던 대형 동물의 90퍼센트, 아메리카에 살던 대형 포유류의 75퍼센트, 지구의 모든 대형 육상 포유류의 약 50퍼센트를 멸종으로 내몰았다. 이 모든 멸종 사건들은 그들이 최초의 밀밭에 파종하고, 최초의 금속 도구를 만들고, 최초의 글을 쓰고, 최초의 동전을 주조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조상의 필요
115
지금은 대형동물의 90퍼센트가 가축화되었다.
120
농장주들은 암퇘지의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충분한 먹이를 주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고,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인공수정을 한다. … 하지만 돼지의 주관적 관점에서 보면 그 돼지는 여전히 이 모든 것에 매우 강한 욕구를 느끼고, 그런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생식 우리에 갇힌 암퇘지들은 흔히 극심한 좌절과 지독한 절망을 번갈아 드러낸다.
생존과 번식에는 불필요하다 해도, 그 동물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수천 세대 전에 형성된 필요를 계속 느낀다는 것, 이것이 진화심리학이 주는 교훈이다.
유기체는 알고리즘
122
감정은 모든 포유류의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은 계산을 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일군의 방법론적 단계들이다.
125
그보다는 긴팔원숭이의 몸이 곧 계산기이다. 감각과 감정이라는 것은 실은 알고리즘이다.
126
심지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조차 자신이 하는 결정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펜, 종이, 계산기를 이용해 결정한다. 배우자, 직업, 거주지 같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들을 포함해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99퍼센트는 감각, 감정, 욕망이라고 불리는 매우 정교한 알고리즘을 통해 이루어진다.
127
물론 인간은 모르는 돼지들만의 감정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감정 하나만큼은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 듯한데, 바로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감이다. ‘포유류’라고 불리는 이유도 실은 이 유대감 때문이다. ‘포유’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맘마’로 ‘젖가슴’이라는 뜻이다. 포유류 어미들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젖을 빨게 할 만큼 새끼를 극진히 사랑한다. 포유류 새끼들은 어미와 유대감을 느끼고 어미와 가까이 있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128
야생에서 어미와 유대를 맺지 못한 새끼 돼지, 송아지, 강아지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최근까지 인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129
존 왓슨과 <인펀트 케어>의 전문가들이 미처 몰랐던, 포유류는 먹이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새끼 원숭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포유류에게는 정서적 유대도 필요하다. 수백만 년의 진화는 원숭이들에게 정서적 유대를 맺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심어주었다. 또한 진화는 원숭이들에게 딱딱한 금속 물체보다는 부드러운 털로 덮인 것과 정서적 유대를 맺는 것이 쉽다고 각인시켰다.
농업계약
131
유대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같은 종교들의 초기 신학이론, 신화, 전례는 재배식물 및 가축들과 인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32
성경시대의 유대교 같은 유신론적 종교들은 새로운 우주론적 신화를 통해 농업경제를 정당화했다.
133
한편 신들에게는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첫째, 신들은 사피엔스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며, 왜 그가 다른 모든 유기체를 지배하고 이용하는지 설명해야 했다.
둘째, 신들은 인간과 생태계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만물이 직접 소통했다. 순록, 무화과나무, 구름, 바위에게서 뭔가 얻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하지만 유신론적 세계에서는 인간을 제외한 존재들은 말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은 나무나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134
신은 비를 내리고, 열매와 젖이 많이 생산되게 하고, 농작물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단, 인간이 그 대가로 뭔가를 해야 했다. 바로 이 부분이 농업계약의 본질이었다. 신은 농작물을 보호하고 수확량을 늘려주며, 그 대가로 인간은 신과 수확물을 공유해야 했다. 이 계약은 두 당사자의 이익을 위해 생태계의 나머지 구성원을 희생시켰다.
135
<노아의 방주>
전통적인 해석들에서는 이 홍수를 인간의 우월성과 동물의 무가치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겼다. 그 해석들에 따르면, 노아는 동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인간의 공동 이익을 위해 생태계를 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인간 외의 생물들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지 않고 오직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137
농업사회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우월하다는 사실과 동물들을 착취하는 행태를 정당화할 방법을 찾았다.
500년 동안의 고독
139
근대 과학과 산업이 등장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났다.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동식물을 침묵시키고, 애니미즘이라는 장대한 경극을 인간과 신의 대화로 바꾸었다. 그런데 인류는 과학혁명을 통해 신도 침묵시켰다. 세계는 1인극으로 바뀌었다. 인류는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서서 혼자 말하고, 아무와도 협상하지 않고, 어떤 의무도 없는 막강한 권력을 획득했다. 물리, 화학, 생물의 무언의 법칙들을 해독한 인류는 지금 이 법칙들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다.
142
농업혁명이 유신론적 종교를 탄생시킨 반면, 과학혁명은 신을 인간으로 대체한 인본주의 종교를 탄생시켰다. 유신론자들이 ‘테오스’를 경배하는 반면,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을 경배한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같은 인본주의 종교들의 창립이념은 호모 사피엔스는 특별하고 신성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의미와 권위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 선 또는 악이 된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 농장을 정당화했다.
3. 인간의 광휘
149
다윈은 우리에게서 영혼을 박탈했다.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은 독실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세속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인간은, 비록 분명한 종교적 교의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저마다 일생 동안 변하지 않고 자신이 죽어도 그대로인 영원한 개인적 본질을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영어 단어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나누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개인’이라는 말은 내 ‘진정한 자아’는 따로 떨어진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체라는 뜻이다.
증권거래소에 의식이 없는 이유
152
인간의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 가운데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의식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155
오늘날 정설은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에 의해 의식이 생기고, 마음의 경험들은 어떤 필수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일군의 생화학적 반응과 전류가 어떻게 고통이나 분노, 또는 사랑 같은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58
과학의 멋진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자들이 어떤 것을 알지 못할 때 온갖 종류의 이론과 추측을 시도해볼 수 있고, 그러고도 결국에는 모른다고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섹스와 폭력을 넘어
196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동물들 가운데 사피엔스만이 유연한 대규모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면, 인간 존재가 신성하다는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199
최후통첩 게임은 고전경제학 이론에 타격을 가했고, 지난 몇십 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발견에 큰 기여를 했다. 바로 사피엔스들은 냉정한 수학적 논리를 따르기보다는 훈훈한 사회적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202
대규모 집단의 사람들은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203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대게 성공한다.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다. 그런데 우리의 침팬지 사촌들은 그런 이야기를 짜내고 퍼뜨리지 못한다. 그들이 대규모 협력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미의 그물망
204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재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며 제3의 옵션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고 확신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라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하지만 실재에는 제3의 층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206
한때 소련은 인류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권력이었지만, 펜 놀림 한 번으로 사라졌다.
207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이야기의 그물망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이야기망을 함께 짤 때 의미가 생겨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꿈의 시대
212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만이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214
인문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호르몬과 뉴런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내용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물론 사학자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 돌연변이 같은 객관적 요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지어내고 믿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본다. 북한과 남한이 많이 다른 것은 평양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과 다른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서도, 북한이 더 춥고 산이 많아서도 아니다. 그것은 매우 다른 허구들이 북한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215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들이 유전암호와 전자암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를 삼키고, 생물학은 역사와 융합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거시앋.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독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야 한다.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
225
문자사회 사람들은 네트워크로 조직되어 있어서, 각 개인들은 거대한 알고리즘의 한 단계일 뿐이며 알고리즘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것이 관료제의 본질이다.
종이 위의 삶
228
이렇듯 문자는 강한 허구적 실체의 출현을 도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조직하고 강, 습지, 악어의 실재를 재편하였다. 이와 동시에 문자는 사람들이 이런 허구적 실체의 존재를 더욱 쉽게 믿도록 만들었다. 문자 덕분에 추상적 상징의 매개를 통해 실재를 경험하는 일이 점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230
겨우 고무도장 한개로 무장한 소사 멘데스는 홀로코스트에서 개인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펼쳤다.
231
1958년 중국 정부에 보고된 그해 곡물 생산량은 실제보다 50퍼센트 많았다. 보고서만 믿고 국민이 먹을 식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정부는 수백만 톤의 쌀을 외국에 팔아 무기와 중장비를 사들였다. 그 결과는 역사상 최악의 기아와 수천만 중국인들의 죽음이었다.
233
조세 당국이나 교육부서 같은 복잡한 관료조직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서식에 적힌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성경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진다. 그들은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그리하여 관료의 환상과 일치하는 외적 실제가 생기지만, 그것은 강요된 실제일 뿐이다.
234
20세기 후반 유럽의 제국들이 해체되고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었을 때, 새로 생긴 나라들은 기존의 식민지 국경선을 그대로 수용했다. 국경선을 새로 정할 경우 일어날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아프리카 국가들이 직면한 나제들의 대부분이 실정에 맞지 않는 국경선에서 기인한다.
236
정기적으로 엄밀한 평점을 매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시대의 대중 교육제도이다. 공장과 정부 부처가 숫자언어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학교가 그 뒤를 따랐다. 학교는 평균점수에 따라 학생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교사와 교장의 가치는 그 학교의 전체 평균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이 이런 척도를 채택하자 실제가 변했다.
초기 학교는 학생의 계몽과 교육에 중점을 두는 곳이었고, 점수는 그저 성공을 측정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학교들은 곧 높은 점수를 받는 일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237
현실에서 협력 네트워크의 힘은 진실과 허구의 절묘한 균형에 달려 있다. 실제를 지나치게 왜곡하면 명료한 시야를 잃게 되어, 더 명료한 눈을 가진 경쟁자들을 이길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허구적 신화에 의존하지 않고는 대중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허구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실제를 고집한다면 그를 따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242
실제로 오늘날에도 미국 대통령들은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한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법정에 서는 증인들 역시 성경에 손을 올리고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진실이 아닌 것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허구, 신화 그리고 오류가 넘쳐나는 책에 대고 진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잘 돌아간다!
245
인간의 협력 네트워크를 평가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떤 잣대와 세계관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246
특히 신, 국가, 기업 같은 상상의 실체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간 네트워크는 일반적으로 상상의 실체의 관점에서 성공을 평가한다. 종교는 신의 계명을 글자 그대로 따르면 성공이고, 국가는 국익을 높이면 성공이고, 기업은 돈을 많이 벌면 성공이다.
그러므로 인간 네트워크의 역사를 검토할 때는 이따금 멈춰서 실재하는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어떤 실체가 실재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아주 간단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보면 된다.
우리가 허구와 실제를 구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5. 뜻밖의 한 쌍
249
기술만 있으면 인간을 업그레이드하고, 노화를 극복하고, 행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신,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들에 신경을 덜 쓰고 대신 물리적 생물학적 실제를 해독하는 데 주력하지 않을까?
그럴 것 같아 보이지만,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근대 과학은 확실히 게임의 룰을 바꾸었지만, 그렇다고 신화를 사실로 대체한 것은 아니다. 신화는 계속 인류를 지배하고 있고, 과학은 그런 신화를 더 강화할 뿐이다. 과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를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통제하게 할 것이다. 컴퓨터와 생명공학 덕분에 허구와 실제의 차이가 모호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다.
세균과 악마
251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오해의 대부분은 종교를 잘못 정의한 데서 기인한다.
252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여부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다. 종교는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종교는 사회구조에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한다.
254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다른 근대 이념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믿음 체계가 ‘종교’라고 말하면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힘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를 만난다면
258
이런 여행이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종교가 세속적 질서를 굳건히 하려는 시도인 반면, 영성은 그런 질서에서 도망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259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영적 여행이 언제나 비극인 것은 사회 전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합한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신을 위조하다
261
과학이 잘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262
그래서 과학자들이 진행하는 모든 실용적 과제는 종교적 통찰에 기대고 있다.
263
치열한 종교적 논쟁 가운데 다수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 가운데 다수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사실적 주장과 관련된 것들이다.
269
성경은 그 안에 기술된 사건들이 일어난 시점으로부터 수백 년 뒤 여러 명의 인간 저자들이 작성한 수많은 텍스트들의 집합으로, 성경시대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는 사실이 동료 검토를 거친 과학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성스러운 교의
272
샘 해리스 같은 몇몇 철학자들은, 인간의 가치 안에는 언제나 사실적 진술이 감춰져 있으므로 과학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72
그런데 설령 해리스가 옳고, 모든 인간이 행복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해도, 현실에서 이런 통찰을 이용해 윤리적 논쟁을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나 척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령 과학이 윤리적 논쟁에 기여하는 몫이 생각보다 크다 해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떤 종교의 인도하는 손 없이 대규모 사회질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대학과 연구소조차 종교적 지지가 필요하다. 종교는 과학 연구에 윤리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과학 의제와 과학 발견의 용도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는다. 그러므로 종교적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는 과학사를 이해할 수 없다. 과학자들은 잘 생각해보지 않는 사실이지만, 과학혁명 그 자체가 역사상 가장 교조적이고 불관용적이고 종교적인 사회 중 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마녀 사냥
275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타협 없는 진리 추구는 영적 여행이라서, 종교나 과학의 제도권 내에 머물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즉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6. 근대의 계약
280
근대라는 계약은 이렇듯 인간에게 굉장한 유혹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위협이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전능함을 거머쥘 수 있지만, 발밑에는 완전한 무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실질적인 견지에서 보면, 근대 이후의 삶은 의미가 사라져버린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은행가가 흡혈박쥐와 다른 이유
283
왜 근대에 와서야 경제성장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을까?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미래의 성장을 별로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육감, 진화적 유산, 세상 돌아가는 방식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연 시스템은 평형 상태로 존재하고, 대부분의 생존투쟁은 한쪽이 성공하면 다른 쪽이 손해 보는 제로섬 게임이다.
기적의 파이
285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같은 전통 종교들은 수중에 있는 자원 내에서 현존하는 파이를 재분배하거나 천국의 파이를 약속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 이 기본교의를 하나의 간단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가 있으면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
286
근대는 ‘더 많이’라는 교의를 종교적 근본주의부터 제3세계 독재와 실패한 결혼에 이르기까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막론한 거의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바꾸었다.
289
‘더 많이’ 신조는 개인, 기업, 정부에게 경제성장에 방해가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 무시하라고 몰아친다.
290
자본주의는 지상의 기적을 약속한다. 때로는 정말로 그런 기적을 가져다주기까지한다. 기아와 역병을 극복한 공의 대부분은 성장을 신봉하는 자본주의에 돌아가야 한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폭력을 줄이고 관용과 협력을 증가시킨 점에 대해서도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291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경제를 네 이윤이 곧 내 손실인 제로섬 게임이 아닌, 네 이윤이 곧 내 이윤인 윈윈 상황으로 보게 함으로써 세계 화합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런 호혜주의적 접근방식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을 내어주라는 수백 년간의 기독교 설교보다 세계 화합에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교가 성장이라는 지고의 가치에 대한 믿음에서 연역해낸 최고의 계명은 ‘너희는 너희의 수익을 성장시키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이다.
방주 증후군
294
세계를 크기가 고정된 파이로 보는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 세계에 오직 두 종류의 자원만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원재료와 에너지이다. 하지만 실은 세 종류의 자원만 존재한다고 본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된다. 사용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이다.
297
인류는 이중의 경주에 내몰려 있다. 한편으로는 과학 진보와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다른 한편으로 우린느 생태적 아마겟돈보다 적어도 한 걸음은 앞서 있어야 한다.
끝없는 경주
301
지금껏 많은 것을 이루었음에도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이 생산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302
현대세계는 개인과 집단이 경주로 인한 긴장과 혼돈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그만두지 ㅇ낳도록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
304
근대 계약은 우리에게 전례 없는 힘을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졌다. 그렇다면 그 대가는 뭘까? 근대 계약은 우리가 힘을 얻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기를 기대한다.
305
무엇이 근대사회를 붕괴에서 구했을까? 인류를 구원한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혁명적 종교인 인본주의였다.
7. 인본주의 혁명
306
근대 계약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대한 우주적 계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힘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계약을 자세히 살펴보면 교묘한 면책조항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떻게든 그 우주적 계획에 바탕을 두지 않고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계약위반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사회를 구원한 것은 이 면책조항이었다.
307
과거에는 장대한 우주적 계획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인본주의는 역할을 뒤집어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한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해라. 이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1계명이다.
308
그러므로 근대의 핵심인 종교혁명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었다.
311
중세의 신부들이 핫라인을 통해 신과 연락해 우리가 한 일이 선인지 악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면, 현대의 심리치료사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감정과 직접 연락하도록 도울 뿐이다.
312
인본주의는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일으킬 경우에만 나쁘다고 가르쳐왔다.
317
중세에는 예술을 지배하는 객관적인 잣대가 있었다. 미의 척도는 인간의 일시적 감정을 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미적 감각은 초인의 지시에 따를 뿐이라고 여겼다. 오히려 인간의 미적 감각은 초인의 지시에 따를 뿐이라고 여겼다.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초인의 힘이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는다고 여겨진 시대에 이것은 전혀 이상한 생각이 아니었다.
319
윤리학에서 인본주의의 모토는 ‘좋게 느껴지면 해라’이다. 정치학에서 인본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고 가르친다. 미학에서 인본주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322
반면 현대 인본주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아리스토텔레스, 솔로몬 왕, 아퀴나스가 정치, 예술, 경제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 것도 좋지만, 의미와 권위의 최고 원천은 자신의 내면이므로, 자신이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
326
권위의 다른 모든 원천들과 마찬가지로, 감정에도 나름의 단점들이 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진정한 내적 자아는 단 하나라고 추정하지만, 막상 그 자아에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침묵하는 목소리 또는 상충하는 목소리들의 불협화음과 맞닥뜨리기 일쑤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인본주의는 권위의 새로운 원천과 그 권위를 이용해 진정한 지식을 얻는 새로운 방법을 공표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공식은 지식=성경x논리였다.
327
과학혁명은 지식에 대한 사뭇 다른 공식을 제안했다. 그것은 지식=경험적 데이터x수학이다.
329
인본주의-> 지식=경험x감수성
만일 당신이 어떤 윤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자 한다면, 내면의 경험을 꺼내 예리한 감수성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우리는 수년간 경험을 쌓고, 그 경험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감수성을 갈고 닦는다.
경험과 감수성은 끝없는 고리로 이어져 서로를 강화한다. 감수성 없이는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고,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없다. 감수성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서 키울 수 있는 추상적인 소질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용해야만 무르익고 성숙하는 실용적 기술이다.
331
인본주의는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점진적인 내적 변화 과정으로 본다.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 것이다.
전쟁에 관한 진실
335
지식=경험x감수성 이라는 공식은 대중문화뿐 아니라 전쟁 같은 무거운 쟁점들에 대한 인식까지 바꿔놓았다.
인본주의의 분열
342
모든 인본주의 분파가 인간의 경험을 권위와 의미의 최고 원천으로 치지만, 각 분파들은 인간 경험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인본주의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우선 정통파는 인간은 저마다 독자적인 내적 목소리와 재생 불가능한 일련의 경험을 소유하는 유일무이한 개인이라고 주장한다.
343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와 나치를 가장 유명한 신봉자로 둔 진화론적 인본주의이다. 이 두 분파는 인간의 경험이 의미와 권위의 최종 원천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344
하지만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와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경험이 개인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개인이 존재하고, 그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느끼고 서로 상충하는 욕망을 품는다. 만일 모든 권위와 의미가 개인의 경험에서 나온다면, 각기 다른 경험들 사이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345
…이런 모순은 자유주의자들의 영원한 숙제이다. 로크, 제퍼슨, 밀, 그밖의 동료들이 부단히 노력했으나 이 수수께끼를 푸는 쉽고 빠른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누가 투표하느냐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346
일반적으로 종교나 민족신화 같은 공동의 결속으로 묶인 집단 내에서만 민주적 투표가 효력을 발휘한다. 민주적 투표는 기본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많은 경우 오래된 집단 정체성 및 동족의식과 융합해 근대 민족주의를 형성했다.
346
마치니 같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민족 집단의 독자적 경험이 편협한 제국주의 세력에 억눌려 사라지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했고, 그래서 각 민족국가가 이웃 국가를 해치지 않고 저마다의 민족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탐색하는, 민족국가들의 평화로운 공동체를 상상했다. 이러한 이상은 유럽연합의 공식 이념으로 남아있다. 2004년 유럽연합 헌법에는 유럽이 “다양성으로 결합되어”있고, 유럽의 각기 다른 민족들은 “자민족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적혀 있다. 자유주의적인 독일인들조차 이민자에게 문을 여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독일 민족의 독특한 공동 경험을 보존한다는 가치 때문이다.
348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관심의 초점을 다른 사람들의 경험보다 자신의 감정에 둔다고 비난한다.
349
자기반성은 오히려 자신에 관한 진실에서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결정에 지나친 공과를 돌리고 사회조건은 거의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350
…이런 문제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아탐구를 권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세계를 판독해주는 강력한 공동 기구(예컨대 사회주의 정당과 노조)를 설치하자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자유주의 경제에서는 고객이 항상 옳다면, 사회주의 정치에서는 정당이 가장 잘 알고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노조가 항상 옳다. 권위와 의미는 여전히 경험에서 나오지만(정당도 노조도 사람들로 구성되고 인간의 비극을 줄이기 위해 일한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보다는 당과 노조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350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충돌하는 인간 경험의 문제에 대해 다른 해법을 갖고 있다. 다윈주의 진화론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갈등은 한탄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칠 일이라고 주장한다. 갈등은 자연선택의 원재료로 진화를 추동한다.
… 351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 국가가 인류의 진보에 항상 앞장섰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국가를 인류 진화에 기여한 바가 적거나 없는 국가들보다 우월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 결과 오토 딕스 같은 자유주의 예술가들과 달리,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전쟁이라는 경험은 가치 있고 심지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352
니체는 이런 생각을 전쟁은 “인생의 학교”이며, “나를 죽이지 않은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베토벤이 척 베리보다 나은가?
360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과오를 범할까봐 문화 비교라는 지뢰밭을 조심스레 우회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이 지뢰밭을 통과하는 옳은 길을 찾는 문제를 당에 떠넘기는 반면,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그 안으로 신나게 뛰어들어 모든 지뢰를 터뜨리고 대혼란을 즐긴다.
인본주의 종교전쟁
전기, 유전학, 이슬람 과격주의
370
현재 개인주의, 인권, 민주주의, 자유시장이라는 자유주의 패키지를 대신할 이렇다 할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 사회운동은 민주주의, 개인주의, 인권, 나아가 자유시장경제의 기본원리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이들은 정부가 이런 자유주의 이상들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370
자유주의 패키지의 결함을 찾아내는 것은 서구 학자들과 사회활동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지만, 그들도 아직까지 더 나은 제도를 내놓지는 못했다.
서구의 사회운동가들보다 중국이 자유주의에 훨씬 더 진지한 도전장을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와 경제가 자유화되었음에도 중국은 민주주의 체제도 진정한 자유시장경제도 아닌데, 그것은 중국이 21세기의 경제 거인이 되는 데 아무 지장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경제 거인치고는 이념적 그림자가 너무 작다.
371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알지 못하는 반면,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 잘 안다.
372
기술은 흔히 종교적 비전의 범위와 한계를 정한다.
373
역사에서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는 대중이 아니라 앞을 내다보는 소수의 혁신가들이다.
376
증기기관, 철도, 전신, 전기는 전례 없는 기회뿐 아니라 전대미문의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경험, 필요, 희망은 성경시대 농부들의 그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러한 필요와 희망에 답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증기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탄광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철도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기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377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기술적 현실과 새로운 인간 경험을 이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사회의 새로운 문제들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았을 뿐 아니라, 그 전례 없는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한 독창적인 생각들을 해냈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용감한 신세계를 위한 용감한 새 종교를 창조했다. 그들은 기술과 경제를 통한 구원을 약속했고, 그럼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기술종교를 세우고 이념적 담론의 토대를 바꾸었다.
378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자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79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윤리적 개혁뿐 아니라 중요한 경제적, 기술적 진보까지 도맡았다. 가톨릭교회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행정 시스템을 확립했고, 문서보관, 목록 자성, 일정표, 그밖의 데이터 처리 기법들을 가장 먼저 활용했다. 로마 교황청은 12세기 유럽의 실리콘밸리였다. 그리스도교 세계는 유럽 최초의 경제법인인 수도원을 창설해 천 년 동안 유럽 경제를 이끌면서 선진농법과 경영방법을 도입했다. 수도원은 시계를 사용한 최초의 기관이었고,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 학교들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볼로냐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살라망카 대학교 같은 유럽 최초의 대학들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80
자문해보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가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항생제 같은 과학적 발견, 컴퓨터 같은 기술적 발명, 페미니즘 같은 사상적 창조를 포함해 후보 목록이 많아 고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381
많은 과학자들을 포함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권위의 원천으로 계속 성경을 이용하지만, 이 문헌들은 더 이상 창조성의 원천이 아니다.
성경은 더 이상 창조적 자극을 주지 못하는데도 권위의 원천으로서 계속 자리를 지킨다.
382
그러므로 전통 종교들은 자유주의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유전공학, 인공지능에 대해 할 말이 없고, 대부분의 신부, 랍비, 무프티는 생물학과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일어난 최신 발견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본주의가 인간의 생명, 감정, 욕망을 신성시한 지 오래되었음을 고려하면, 인본주의 문명이 앞으로 인간의 수명, 행복, 힘을 극대화하려 할 거라는 점은 불 보듯 훤하다.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8. 실험실의 시한폭탄
386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유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 387
인간에게 자유의자가 있다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사실적 진술이다. 이른바 이 사실적 기술은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토머스 제퍼슨 시대에는 타당한 말처럼 들렸지만, 생명과학의 최신 연구결과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자유의지와 현대과학 사이의 모순은, 많은 사람들이 현미경과 기능자기공명 영상을 볼 때 못 본 척하고 싶어하는 ‘실험실의 코끼리’이다.
389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결정론과 무작위성이 케이크를 모두 나눠갖고, ‘자유’에는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의지는 앞으로 우리 인간이 지어낸 상상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이다.
393
자유의지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단순한 철학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유기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약물, 유전공학, 직접적인 뇌 자극을 통해 그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통제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394
호모 사피엔스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들은 인간 역시 쥐처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 뇌의 적소를 자극해 사랑, 분노, 두려움, 우울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98
현재 경두개 자극기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고, 샐리 에디가 겪은 20분간의 경험은 꽤 이례적인 사례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누구인가?
399
과학은 자유주의의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도 약화시킨다.
… 하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생명과학은 이런 자유주의 이야기가 완전히 신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400
뇌의 두 반구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은 아니지만 정서적 인지적 차이도 있다. 대부분의 인지 활동에는 양쪽 반구가 모두 사용되지만 똑같이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개 좌반구는 말하기와 논리적 추론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 우반구는 공간정보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402
…가자니가와 그의 연구팀은 좌뇌에 닭의 갈고리 발톱 사진을 휙 보여주는 동시에 우뇌에 눈 내린 풍경을 휙 보여주었다. 환자 PS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닭의 갈고리 발톱’이라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가자니가는 PS에게 일련의 그림카드를 주고 방금 본 것과 가장 일치하는 사진을 가리키라고 했다. 환자는 오른손(좌뇌가 통제하는 부분)으로 닭 그림을 가리켰지만, 동시에 왼손을 내밀어 눈삽을 가리켰다. 가자니가는 PS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왜 당신은 닭과 눈삽을 둘 다 가리켰나요?” 그러자 PS는 대답했다. “아, 닭의 바롭과 가장 일치하는 그림이 닭이고, 닭 우리를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잖아요.”
…가자니가는 좌뇌에는 언어능력뿐 아니라 내면의 통역사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내면의 통역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납득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부분적인 단서들을 이용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낸다는 것이다.
407
실제로 의사는 이야기하는 자아의 관점에서 검사 막바지에 불필요한 몇 분간의 둔한 통증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면 기억 전체가 덜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이다.
408
진화는 소아과 의사들보다 더 오래전에 이 요령을 알아냈다. 많은 여성들이 출산하는 동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떤 여성도 두 번 다시 출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만 마지막 순간과 이후 며칠 동안 산모의 몸에서는 코르티솔과 베타-엔돌핀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들은 통증을 줄여주고 안도감, 때로는 고양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아기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지고 가족, 친지, 종교적 교의와 국가적 선전의 박수갈채까지 더해져 출산의 경험이 고통에서 긍정적인 기억으로 바뀐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날카로운 가위와 검은색의 두꺼운 마커를 들고 우리의 경험들을 검토해 끔찍한 몇몇 순간을 잘라낸 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문서보관소에 보존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대부분(배우자, 직업, 거주지, 휴가)이 이야기하는 자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생의 의미
415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수천 년 전에 이 원리를 발견했다. 수많은 종교의식과 계명의 근저에 이런 원리가 깔려 있다. 신이나 국가 같은 상상의 실체를 믿게 하려면 , 사람들이 가치 있는 뭔가를 희생하게 해야 한다. 희생이 고통스러울수록 그 희생을 바치는 대상의 존재를 더 확실히 믿게 된다.
416
…정부만 이런 덫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기업들도 실패한 사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개인들도 파탄 난 결혼생활과 앞날이 보이지 않는 직업에 매달린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도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내 이야기하는 자아가 지난날의 실수를 인정하려고 할 경우, 줄거리에 반전을 꾀해 실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예컨대 파시스트 퇴역군인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 내 실수로 다리를 잃었어. 하지만 이 실수 덕분에 전쟁이 지옥임을 깨달았지. 앞으로 남은 인생은 평화를 위한 싸움에 바치겠어. 그러니 결국 내 부상은 의미가 있었던 거야. 나에게 평화의 가치를 가르쳐주었으니까.’
417
이제 우리는 이야기하는 자아 역시 국가, 신, 돈과 마찬가지로 상상 속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저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정교한 장치를 갖고 있는데, 그 장치는 경험의 대부분을 버리고, 고르고 고른 몇 가지 표본만 간직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본 영화, 우리가 읽은 소설, 우리가 들은 연설, 우리가 음미한 몽상의 파편들과 뒤섞는다. 그런 다음 그 뒤범벅 속에서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일관되어 보이는 이야기를 짜낸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를 증오하고 무엇을 할지 알려준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줄거리에 필요하다면 내 목숨까지 희생시킨다.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장르를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극 속에 살고, 어떤 사람들은 끝없이 계속되는 종교극 속에서 산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액션영화처럼 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극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이야기일 뿐이다.
418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든다. 뇌의 생화학적 기제들이 한순간의 경험을 일으키고, 그런 경험은 일어나는 순간 사라진다. 그런 다음 또 다른 순간적 경험들이 재빠르게 이어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런 순간적 경험들이 모두 더해져 지속되는 본질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끝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그런 경험들은 이 이야기 안에서 저마다 자기 자리를 갖고, 따라서 모든 경험이 지속되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력 있고 매력적일지라도 이 이야기는 결국 허구이다. 중세 십자군 전사들은 삶의 의미가 신과 천국에서 온다고 믿었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인생의 의미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419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 그 밖에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자유주의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백 페이지에 걸친 박식한 논증으로 자아와 자유의지를 해체한 뒤, 숨이 막힐 듯 놀라운 지적 공중제비를 넘어, 마치 진화생물학과 뇌 과학의 모든 경이로운 발견들은 로크, 루소, 토머스 제퍼슨의 윤리적, 정치 이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18세기에 착지한다.
419
세 번째 천년의 초입에 자유주의가 직면한 위협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기술들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들, 도구들, 구조들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시장, 인권이 과연 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9. 중대한 분리
420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시장과 민주적 선거를 지지하는 이유는, 모든 개인이 저마다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권력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전개될 세 가지 실절적 상황이 이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다.
421
세 가지 위협을 자세히 살펴보자. 첫 번째 위협이 철학적 수준에서 자유주의가 틀렸음을 증명하지는 못할 테지만, 실질적 수준에서 민주주의, 자유시장, 그밖에 자유주의 제도들이 그런 타격을 과연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이념이 된 것은 그 철학적 논증이 한치의 오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자유주의가 성공한 것은 모든 인간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이다.
425
지난 몇십 년 동안 컴퓨터의 지능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컴퓨터의 의식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한 현재의 컴퓨터는 1950년대 컴퓨터의 원형과 똑같이 의식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중대한 혁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고, 이로 인해 인간은 경제적 가치를 잃을 위험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 높은 지능은 발달한 의식과 항상 짝지어 다녔다. 의식을 가진 존재만을 체스를 두고, 자동차를 몰고, 질병을 진단하고, 테러범을 찾아내는 것 같은 높은 지능을 요하는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일들을 인간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비의식적 지능을 개발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패턴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데, 머지않아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인간의 의식보다 패턴 인식을 더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26
지능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하지만 21세기에 이 문제는 절박한 정치적, 경제적 쟁점이 되었다. 그리고 군대와 기업은 이것이 “지능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의식은 선택사항이다”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임을 알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자동차가 말을 대체한 것은 시스템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일에서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429
대부분의 평범한 변호사들은 서류를 끝도 없이 검토하면서 판례, 법적 허점, 증거가 될 수 있는 정보들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낸다.
435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을 더 잘할 수 있는 높은 지능의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생긴다면, 의식을 가진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436
인간은 두 가지 유형의 기본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육체능력과 인지능력이다.
442
알고리즘이 인간을 직업시장에서 몰아내면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전례 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445
21세기 우리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계급이 탄생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으며, 사회의 번영, 힘과 영광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쓸모없는 계급’은 그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447
사람은 뭐라도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미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할까? 약물과 컴퓨터 게임에서 한 가지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쓸모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3D 가상현실 세계에서 보낼 것이고, 그 세계는 바깥의 따분한 현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정서적 몰입이 잘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인간의 생명과 경험이 신성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적 신념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다.
87퍼센트 확률
451
앞으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기 소망에 따라 인생을 운영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대신, 네트워크로 얽힌 전자 알고리즘들의 관리와 인도를 받는 생화학적 기제들의 집합으로 보는 데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457
알고리즘은 반란을 일으켜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위해 유익한 결정을 내려줄 것이고, 그러므로 그 조언을 따르지 않는 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463
자유주의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신성시하고, 투표소, 슈퍼마켓, 결혼시장에서 선택할 권한을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준다. 수백 년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가 온갖 허구와 판타지를 믿는다 해도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은 기표소 안에 있는 나는 지난 선거 이래로 수년 동안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선거유세, 그럴듯한 해석, 무작위적인 기억들의 공세 속에서 내 선택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카너먼의 냉수 실험에서처럼, 이야기하는 자아는 정치에서도 정점-결말 법칙을 따른다. 즉 대다수의 사건들은 잊고 극단적인 몇 가지 사건만을 기억하며, 최근에 발생한 일들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다.
신탁에서 주권으로
467
우리가 질문을 하면 신탁이 답하지만, 결정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하지만 신탁이 우리의 신뢰를 얻으면, 그다음은 대리인으로 변신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최종 목표만 부여하고, 그러면 우리가 감독할 필요 없이 알고리즘이 알아서 그 목표를 실험한다. 웨이즈의 경우 우리가 무인자동차에 웨이즈를 연결하고 “집까지 가장 빠른 길로 가줘” 또는 “가장 경치 좋은 길로 가줘” 또는 “오염을 최소로 일으키는 길로 가줘”라고 말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명령은 우리가 하지만, 그 명령을 실행하는 것은 웨이즈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웨이즈는 주권자가 될 것이다.
472
유기체가 알고리즘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생명과학이다. 그렇지 않다면 컴퓨터가 다른 분야에서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도 우리 인간을 이해하거나 우리의 인생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며, 우리와 융합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결론을 내린 순간,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개인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들에게로 이동했다.
473
개인은 빅브라더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조용히 붕괴할 것이다.
불평등을 업그레이드하다
474
자유주의가 직면한 세 번째 위협은, 일부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해독 불가능한 존재로 남아 소규모 특권집단을 이룰 거라는 점이다.
475
인류가 생물학적 계급으로 쪼개지는 즉시 자유주의 이념의 근간이 파괴될 것이다.
478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가장 위대한 의학적 성취는 대중 위생시설의 보급, 예방접종 운동, 유행병 극복이었다.
… 하지만 대중의 시대는 끝나고, 더불어 대중의학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인간 병사와 노동자들이 알고리즘에 밀려나면, 적어도 일부 엘리트 집단들은 쓸모없는 가난뱅이 대중에게 더 나은 건강, 아니, 표준적인 건강조차 제공할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표준을 능가하는 소수의 초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10. 의식의 바다
481
새로운 종교는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이나 중동의 마드리사에서 탄생할 리 없다.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생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증기와 전기를 통한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를 장악했듯이, 도래하는 시대에 새로운 기술종교들은 알고리즘과 유전자를 통한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482
이런 신흥 기술종교들은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술 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데이터교)이다.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을 여전히 창조의 정점으로 보고, 전통적인 인본주의의 여러 가치들을 고수한다. 기술 인본주의는 우리가 아는 형태의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의 행로를 완주했으며 미래에는 할 일이 없다는 데 동의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기술을 이용해 호모 데우스(훨씬 우수한 인간 모델)을 창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호모 데우스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들은 그대로 보유하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향상된 능력을 갖춘 덕분에 매우 정교한 비의식적 알고리즘들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지능이 의식과 분리되고 있고, 비의식적 지능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인간이 이 게임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다면 인간은 마음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483
…우리의 게놈에 추가로 몇 가지 변화가 더 일어나고 뇌 배선이 한 번 더 바뀐다면 두 번째 인지혁명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기술 인본주의의 생각이다.
마음의 간극
484
마음들의 스펙트럼이 무한할지도 모르면서 과학은 지금까지 그 가운데 아주 작은 두 구역만을 연구해왔다. 바로 ‘표준 이하’와 이른바 ‘WEIRD’라는 영역이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심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자폐증에서 조현병까지 다양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연구를 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느끼고 생각하고 소통하는 능력이 표준 이하인 마음의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불완전하지만 자세한 지도를 갖고 있다. 이와 동시에 과학자들은 건강하고 표준적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연구해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과 경험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서구의 많이 배우고 산업화되고 부유하고 민주적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사실 이들은 인류를 대표하는 표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간 마음에 대한 연구는 호모 사피엔스가 곧 호머 심슨이라고 가정했다.
489
마음의 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헌들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 <박쥐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이다.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1974년에 발표한 이 글에서 사피엔스의 마음으로는 박쥐의 주관적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491
적어도 우리는 감정과 경험의 일부 영역에서는 고래, 박쥐, 호랑이, 페리컨보다 열등할 것이다.
두려움의 냄새
495
현대 인류는 소외공포를 앓고 있고, 우리는 전보다 선택의 여지가 많아졌지만 선택한 것에 실제로 집중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온 우주가 걸린 못
498
기술 인본주의는 또 하나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인본주의의 모든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기술 인본주의도 인간의 의지에 온 우주가 걸려 있다고 여기며 인간의 의지를 신성시한다. 기술 인본주의는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 따라 어떤 마음의 능력을 개발할지 선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의 마음을 결정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기술 진보로 우리의 욕망 자체를 재형성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499
현대 정신의학에 따르면, 많은 ‘내적 목소리들’과 ‘진짜 소망들’은 단지 생화학적 불균형과 신경질환의 산물이다.
501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만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우리가 욕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토대로 그것을 선택할까?
502
기술 인본주의는 해결이 불가능한 딜레마에 봉착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므로, 의지를 제어하고 재설계할 수 있는 기술을 어서 개발하려고 우리를 독촉한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통제력을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막상 그런 통제력을 갖게 되면 기술 인본주의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신성한 의지가 또 하나의 맞춤 제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와 경험이 권위와 의미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믿는 한, 우리는 그런 기술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11. 데이터교
503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데이터교는 그렇게 함으로써 동물과 기계의 장벽을 허물고, 결국 전자 알고리즘이 생화학적 알고리즘을 해독해 그것을 뛰어넘을 것으로 본다.
504
데이터교는 두 모태 학문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데, 바로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이다. 둘 중 생물학이 더 중요하다.
505
오늘날에는 개별 유기체들만이 아니라 벌집, 박테리아 집단, 숲과 도시 같은 사회 전체가 데이터 처리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경제학자들도 점점 데이터 처리 시스템으로 경제학을 해석하는 추세이다. 일반인들은 경제가 밀을 재배하는 농부, 옷을 만드는 노동자, 빵과 속옷을 사는 소비자로 구성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경제란 욕망과 능력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해 그 데이터를 결정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505
이렇게 보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가 통제하는 공산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이념, 윤리적 신조, 정치제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둘은 경쟁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나누어 처리하는 반면, 공산주의는 중앙에서 모두 처리한다.
509
자본주의가 이기고 공산주의가 패한 것은 자본주의가 더 윤리적이어서도, 개인의 자유가 신성해서도, 신이 이교도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어디로 갔을까?
511
정치과학자들도 인간의 정치구조를 점점 데이터 처리 시스템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처럼, 민주주의와 독재도 본질적으로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경쟁 메커니즘이다. 독재는 중앙 집중식 처리 방법을 사용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분산식 처리를 선호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민주주의가 우위를 점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독특한 조건 아래에서 분산식 처리가 더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512
(민주주의) 제도들은 정치가 기술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시대에 진화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산업혁명은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서,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항상 한발 앞에서 그 경로를 규제하고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의 리듬이 증기시대 이래로 크게 바뀌지 않은 반면, 기술은 1단에서 4단으로 기어가 전환되었다. 현재 기술혁명은 정치 과정보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의원들과 유권자들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515
현재 기술은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의회도 독재자들도 미처 다 처리할 수 없는 데이터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따라서 지금의 정치인들은 1세기 전의 정치인들보다 생각의 규모가 훨씬 작다. 그 결과 21세기 초에 정치는 장대한 비전을 잃었다. 정부는 단순히 행정부가 되었다. 정부는 나라를 운영할 뿐 이끌지 못한다. … 어느 정도까지는 이것이 좋다. 20세기의 거대한 정치적 비전들이 우리를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대약진 운동으로 이끌었음을 생각하면, 근시안적인 관료들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신 같은 기술과 과대망상증적 정치의 결합은 재앙의 레시피나 다름없다.
516
우리의 미래를 시장의 힘에 맡기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 힘들이 인류나 세계에 유익한 일을 하기보다는 시장에 유익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517
권력 공백은 오래가지 않는다. 21세기에 전통적인 정치구조들이 유의미한 비전을 생산하기에 충분할 만큼 빨리 데이터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새롭고 더 효율적인 구조들이 진화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 새로운 구조들은 민주적인 것이든 독재적인 것이든, 이전의 어떤 정치제도와도 다를 것이다. 남은 질문은 누가 이 구조를 만들고 제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인류가 이 일을 맡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아주 간략한 역사
517
데이터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종은 단일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고, 개인은 시스템을 이루는 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 전체를 이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방법으로 진행된다.
- 프로세서의 수를 늘린다 -> 인지혁명 ~ 농업혁명
- 프로세서의 다양성을 늘린다 -> 농업혁명 ~ 문자와 돈 발명
- 프로세서들 간의 연결을 늘린다 -> 문자와 돈 발명 ~ 과학혁명까지
- 현존하는 연결을 따라 이동할 자유를 늘린다. -> 1492년 경 시작
정보는 자유롭고 싶다
521
자본주의가 그랬듯이 데이터교도 처음에는 가치 중립적인 과학이론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옳고 그름을 결정할 권한을 주장하는 종교로 변화하고 있다. 이 새로운 종교가 떠받드는 지고의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523
데이터교는 정보의 자유를 최고선으로 친다.
인간이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한 때가 인본주의 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감동적인 이상들을 설교한 18세기였다. 1789년 이래로 무수히 많은 전쟁, 혁명, 격변이 있었지만,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내놓지 못했다. 그 이후의 모든 무력충돌과 투쟁은 인본주의의 세 가지 가치를 위해, 또는 신에게 복종하거나 국가에 봉사하는 같은 더 오래된 가치들을 위한 것이다. 데이터교는 1789년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새로운 가치(정보의 자유)를 창출한 운동이다.
기록하고, 업로드하고, 공유하라!
528
인본주의 과학은 개인 연구자를 찬미하므로, 모든 학자들은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자신의 논문이 실리기를 꿈꾼다. 하지만 요즘에는 점점 많은 예술과 과학 창조물이 ‘모든 사람’의 끝없는 협업으로 생산된다. 위키피디아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 모두이다.
개인은 점점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 시스템 안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날마다 이메일, 전화, 기사와 논문을 통해 수많은 데이터 조각들을 흡수하고, 그 데이터를 처리하고, 새로운 데이터 조각들을 더 많은 이메일, 전화, 논문과 기사를 통해 재전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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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자들은 데이터 흐름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을 인생의 의미 자체를 잃는 일로 생각한다. 내 행동이나 경험을 아무도 모르고, 그것이 전 지구적 정보교류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면, 뭔가를 하고 경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본주의는 경험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우리 안에서 찾음으로써 우주에 의미를 채워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이터교도들은 경험은 공유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고, 우리는 자기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실은 발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에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고리즘들이 그 경험의 의미를 알아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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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모토는 이렇게 말한다. “경험하면 기록하라. 기록하면 업로드하라. 업로드하면 공유하라.”
530
우리는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과 시스템에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치는 경험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경험들을 자유롭게 흐르는 데이터로 전환하는 데 있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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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교는 자유주주의적이지도 인본주의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은 데이터교가 반인본주의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데이터교는 인간의 경험에 반감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인간의 경험 자체에 가치가 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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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교는 인간의 경험을 데이터 패턴으로 여김으로써 권위와 의미의 원천을 파괴하고, 18세기 이래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력적인 종교혁명을 예고하낟. 로크, 흄, 볼테르 시대에 인본주의자들은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데이터교가 인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로 똑같이 돌려줄 차례이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데이터 흐름 속 잔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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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교의 교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21세기의 가장 큰 과학적 과제일 뿐 아니라, 가장 긴급한 정치적, 경제적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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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으로 데이터교는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했던 일을 호모 사피엔스에게 하겠다고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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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훗날 되돌아본다면, 인류는 그저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흐름 속 잔물결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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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명이라는 실로 장대한 관점으로 본다면, 상호 관련된 다음의 세 과정 앞에서 다른 모든 문제와 상황들은 작게 보일 것이다.
-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의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의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과정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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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가 전작 <사피엔스>에서 던진 질문 가운데 가장 주요한 질문은 ‘아프리카에 살던 별 볼일 없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이 행성을 지배하게 되었나?’이다. 하라리는 인간의 역사를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라는 세 가지 혁명의 틀로 바라보면서, 집단신화를 믿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덕분에 인간이 이 행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즉 나의 상상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 함께 존재하는 상호주관적 실재인 법, 돈, 신, 국가 등을 믿는 능력 덕분에 인간은 대규모로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었고, 이는 사피엔스의 성공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상상을 믿는 능력과 상호 간의 협력이 계속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과학이 점점 발전한다면 상호주관적 실재의 세계를 떠나 객관적인 과학 지식에만 의존하면 되지 않을까? <호모 데우스>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우리의 오랜 신화들이 21세기 신기술과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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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우리가 지난날 동물들에게 한 일을 그대로 돌려받을 거라는 하라리의 서늘한 예측은 그 어떤 말보다 섬뜩하게 들린다.
